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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곳을 옮겼다.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들,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어색하고 정신이 없다. 나만 적응을 못하는 것 같아 힘들고 마음 둘 곳 없는 요즘, 위로가 될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그때 김중혁의 산문 <뭐라도 되겠지>가 눈에 띄었다. '뭐라도 되겠지'라니. 묘하게 위로되는 말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짐이 되지 않게 위해 뭐라도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에 '재능'이란, (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난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건지. 남들은 몇 개씩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재능이 왜 나에겐 하나도 없는지. 원망스러운 마음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드는 것 같다. 스스로가 보잘 것 없이 느껴질 때 앞으로는 이 문장들을 떠올리려고 한다.

<뭐라도 되겠지> 표지
 <뭐라도 되겠지> 표지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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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시간을 견디면 뭐라도 된다고. 그래. 이 두 가지만 견디면 되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안 되면 또 어떤가. 어떻게든 되겠지.

책은 소설가인 김중혁이 직접 그린 만화와 그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산문집은 나도 모르게 키득거리게 해서 옆 사람이 나를 쳐다보게 만들었다가, 몇 쪽을 넘기는 동안 (작가가 그린) 만화만 나와 '이 책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게 만든다.

또 실컷 웃기다가 인생에 대해, 예술에 대해 너무도 진지하고도 깊이 있는 생각을 내놓아 사람을 어리둥절하게도 만든다. 도대체 종횡무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글 쓰다가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가 사진을 찍고, 사진을 찍다가 다시 글을 쓰는 산만한 작가를 그대로 닮은 게 아닌가 싶다.

작가는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삶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 읽는 사람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한다(이 이야기에서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나지?). 그의 글은 웃기지만 기억에 오래 남고, 가볍지만 깊이가 있다.

스무살에 친구들과 당구 치고 영화 보고 술 마셨다는 일기 얘기를 하다가 어떻게 이런 글이 나올 수 있는지 놀랍고,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의 경험이 어떻게 이렇게 공감될 수가 있는지 신비롭다.

"시간은 늘 우리를 쪽팔리게 한다. 우리는 자라지만, 기록은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록은 정지하기 때문이다. 자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쪽팔림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쪽팔림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인생의 비밀은 쓸데없는 것과 농담에 있다'는 작가가 쓸데없는 농담만 하는 것 같지만 글을 읽다보면 위로가 된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초라한 지금의 모습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뭐라도 되겠지>의 저력이다. 쓸데없는 것과 농담의 힘이다.

작가가 그린 만화 중 일부
 작가가 그린 만화 중 일부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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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중혁이란 사람에 대해 소문만 듣고(소설가라는 것, 책 팟캐스트 진행자라는 등등) 그가 쓴 글 한 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산문집을 읽으니 그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 같고, 매력을 느꼈으며,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이 많지만 그 중에 가장 재미있는 일 중 하나가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번에 <뭐라도 되겠지>를 통해 아주 매력적인 그래서 더 알고 싶은 사람을 한 명 알게 되었다.

"개인의 역사란 결정적 순간이 아닌 '덜 결정적 순간'으로 이뤄진 것이 아닐까? 내가 지금 여기서 살고 있구나 느끼는 것은, 내가 지금 삶의 어떤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구나 느끼는 것은, 결정적 순간이 닥쳤을 때가 아니라 덜 결정적 순간을 깨달았을 때이다."
                            

일하는 곳을 옮기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절묘할 수가 있을까. 이 책은 지쳐 웃음을 잃어가는 나에게 농담을 가르쳐 주고, 버티다 보면 뭐라고 될 거라며 괜찮다고 어깨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는 읽기 전보다 좀 더 편안해지고 느긋해졌다. 안면 근육도 조금 더 부드러워졌을 거라 짐작한다.

이렇게 나에게 큰 도움을 줬지만 그럼에도 <뭐라도 되겠지>를 읽은 순간은 나에게 있어 '덜 결정적 순간'이다(아무리 큰 도움을 줬다고 하더라도 이걸 결정적 순간이라고  하기에는 좀 오버 아닌가). 그래서 '나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이 힘들 때, 위로가 필요할 때, 쓸데없는 농담을 듣고 싶을 때 이 책을 찾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세상살이에 지친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다. 힘든 자들이여, <뭐라도 되겠지>를 손에 들어라. 그러면 정말로 뭐라도 될 걸? 되지 않을까?


뭐라도 되겠지 - 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지음, 마음산책(2011)


태그:#뭐라도 되겠지,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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