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는 2018년 현재까지 총 12편의 작품을 촬영한 중견 감독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환상의 빛>(1995)에서의 쓸쓸함과 <걸어도 걸어도>(2008)를 통한 가족의 조망, 그리곤 최근작 <세 번째 살인>(2017)을 통해 다시금 변곡점을 맞이했다. 그런데 고레에다가 <걸어도 걸어도> 이후로 점차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탓인지 한국의 관객들은 그를 가족을 그리는 감독이라 단언해버리곤 한다. 그래서인지 여태껏 고레에다가 마주하지 않은 사회의 잔혹함이 <세 번째 살인>에서 드러났을 때 몹시 놀라는 관객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 고레에다의 영화가 일본 특유의 잔잔한 형태를 띠지만 어떤 사람을 단 하나의 수사로 칭한다는 건 무척 아쉬운 일이다. 어느 하나로 치부하기엔 그 사람이 지닌 장점이 너무 많다. 고레에다는 그런 감독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대표작을 꼽는다면 <원더풀 라이프>(1999)나 <걸어도 걸어도>(2008) 둘 중의 하나다. 두 작품은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비슷한 분위기를 지녔고, 그가 여전히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표를 공유하기도 한다. <원더풀 라이프>는 전작인 <환상의 빛>처럼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가족보다 더 큰 운명공동체의 삶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하나의 공통분모 아래 집합을 이루는데, 사실 그건 가족의 연장선에 해당한다. 가족이란 피로 이어진 것이며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원더풀 라이프>란 죽음에 대한 성찰이기에 앞서 삶에 대한 성찰이며, 그 속에는 당연히 가족에 대한 것도 있을 테다. 
 
그리고 <걸어도 걸어도>는 한 가족을 조망하며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지만 사실은 흘러간 시간이라는 점에서 <원더풀 라이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영화가 끝날 때쯤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 버린다. 그러한 이별은 마치, 우리가 영화관에 불이 켜지고 나면 영화 속 그들을 금세 잊어버리는 것만 같이 느껴져 마냥 슬프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잊힌 영화 속 그들은 <원더풀 라이프>에서의 '영원'으로 떠날 것에 틀림없다. 어느 특정 시점에 고정된 채 살아간다는 건 영화관에 불이 켜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스크린 속 그들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을 묵묵히 '바라보는' 고레에다의 카메라
 
결국 고레에다의 대표작인 두 영화는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올바르게 보여주는 증표다. 고레에다가 많은 책과 숱한 인터뷰를 하며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번 작품을 만들었는지 언급하곤 하나, 우리는 그의 영화가 한결같이 남겨진 것들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후회와 한탄이 섞여 있기도 하나 사실은 여기에서 그곳을 관찰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다른 영화가 태풍 속에서 꿋꿋하게 버티어 내는 인간 찬가를 그리거나, 혹은 태풍의 눈에서 맞이하는 '고요함'을 그리곤 하지만 고레에다는 아니다. 고레에다의 작품 제목 중 하나를 빌려 표현하자면 마치 <태풍이 지나가고> 같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거센 바람이 할퀴어 낸 상흔이 자리 잡지만 그 위에 재건되는 건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무너진 것은 단지 건물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며, 재건되는 것도 그러하다. 
 
그것은 단지 작품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고레에다는 철저하게 카메라로 시간을 잡아내고 있다. 시간을 붙잡는다는 것이 카메라의 역할이기는 하나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단지 '붙잡기만'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이별해야 하는 운명, 필멸자의 흔적 뒤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는 느낌이 든다. 말하자면 고레에다는 거대한 흐름에 저항하려 하지 않고 묵묵히 그 후를 기약하는 감독이다. 이를테면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철저하게 관찰자 혹은 내부자의 시선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고레에다의 영화 전반에서 대부분 장면은 이렇게 촬영된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많은 가족이 나오고 그들은 하나의 집에 모이게 된다. 더군다나 명절을 배경으로 했으니 '그래도' 많은 대화가 오고 갈 수밖에 없으니 카메라는 숏-리버스 숏을 분주하게 잡아내야 한다. 하지만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그것을 정직하게 잡아내기보단 사람 간의 눈을 피하듯 대각선에 자리 잡는다. 하지만 가끔은 대각선에 자리 잡은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조차 외면해버리는 듯 보인다. 가족이 모두 앉은 식사 자리에서 대화가 오고 가지만, 발언하는 인물을 보여주기보단 그것을 듣는 어느 인물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고레에다가 보여주고 싶은 건 그들의 대화가 냉랭하다거나 대화 내용을 새겨들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사로 읊어지는 메시지가 아니라 외면과 무관심으로 이루어진 상흔이다. 어쩌면 잔소리에 질려 서로를 외면하게 돼버린 듯한 모습, 우리는 긴 잔소리가 끝나기 전까지 여러 인물을 잡아내는 카메라를 본다. 그것은 동상이몽이거나 몸통보단 꼬리가 중요하다는 것일 테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한 장면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늘어진 꼬리에 무미건조한 시선을 보내곤 하는데, 그게 인물의 마음을 직접 대변한다. 분명 <걸어도 걸어도>는 핵가족으로 분열되는 가족의 신기루이기 이전에 죽은 장남을 그리워하고 있기도 하다. 장남은 물에 빠진 행인을 구하고 사망했고, 그 행인은 일 년에 한 번씩 이 집에 찾아와 사죄한다. 장남은 옳은 일을 행하다 사망한 것이며 행인은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고야 만다. 사실은 행인이 사죄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는 미안해하며, 가족들은 대놓고 행인에게 면박을 준다. 어느 영화라면 그것을 따스하게 포옹해 화합의 메시지를 주었을 테고 그것으로 잔잔한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의 주인공들은 에둘러 상처를 보듬으려 하지 않는다. 상처는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것이라며 일체의 소독도 하지 않는다. 
 
장남은 이미 죽었기에 신기루조차 될 수 없고 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써 마음속에 담아두어도 망자는 이승으로 돌아올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 가족은 자꾸만 장남의 빈자리를 응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그들이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느껴지는 것은, 정작 혐오와 비난이 오가는 말 속에서도 돌아가는 행인에게 선물 하나 들려주기 위해 버스 정류장까지 달려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마음 속 상처를 언어로 표면화해 어딘가로 흘려보내고픈 것처럼 보인다. 
 
어딘가로 흘러가야 한다는 점은 떠도는 삶과 나아가는 시간을 연상케 한다. 그러한 느낌은 이 가족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갈지 뻔히 보인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신의 입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 말하는 둥 이 영화 속에는 시간이 한정된 사람들과 그에 따른 결과가 내재되어 있다. 장남이 사망하고 장남이 되어버린 차남은 형의 죽음에 별생각이 없는 듯 보이며, 더 나아가 어머니 집에 방문하는 것도 귀찮아한다. 단지 자가용이 없다는 것만으로는 그 귀찮음에 이유를 달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듯, 점차 해체되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영화 속으로 끌어와야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영화 속 카메라, 왜 내부적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하는 걸까
 
<걸어도 걸어도>는 그러한 것들, 말하자면 복잡한 사회적 현상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흘러가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며, 죽음이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인지하는 것이다. 장남은 그냥 어느새 죽어 있었고 그들은 죽음을 대비할 새도 없이 장남의 빈자리만 계속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 가족의 시선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이다. 그들 가족은 그 사건의 내부자이기에 기울어가는 달과 같은 현상을 목격할 수가 없다. 단지 영화 밖에 위치한 우리만이 그들 가족의 상흔을 인지한다. 
 
이 영화의 카메라가 바로 그러한 인지를 가능케 하는데, 이 영화에서 장남은 카메라를 통해 존재한다. 그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죽어 이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카메라는 분명 장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그들 가족을 바라본다. 우리는 이 영화의 대다수가 집안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초반이 지나면 대략적인 집 구조를 알게 된다. 말하자면 장면 하나를 우리에게 말하려는 설정 숏이 아주 거대하게 펼쳐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알려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를 물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카메라가 왜 내부적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하는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이 영화 속 집의 부엌과 거실의 탁상 위에 죽은 장남의 얼굴이 있음을 알고 있고, 대화가 오가는 장면 중간마다 그러한 장남의 시선이 삽입되곤 한다. 거실에서 교환되던 시선은 거실과 붙은 부엌 위의 영정사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영정사진이 하나의 시선이라는 것이며, 사실상 그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것으로 '기능'하거나 정말로 '살아'있는 것이다. 
  
어쩌면 죽은 장남은 단지 영정사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정작 인물이 나오지 않는 풍경들을 조망할 때만 정면을 응시한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현관문을 바라보며 누군가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길고 긴 일본식 주택의 복도에는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경사가 높으니 노인에게는 너무 불편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 복도는 작품 초반과 후반에 할아버지가 산책하는 장면에서 보이는 산책길과 대응되고, 그 계단은 산책하는 장면에서의 육교나 언덕길과 대응된다. 
 
작품에는 그 두 장면이 세 번에 걸쳐 나오는데, 초반 후반은 노인들만 있으며 중반은 자녀들과 함께다. 그런데 중반의 언덕 장면에서 카메라는 젊은 모자를 위에서 아래로 잡고, 늙은 어머니와 아들은 아래에서 위로 잡는다. 대다수 평자에게 그 두 가지 장면 중 어느 것이 더 힘들게 보이느냐 묻는다면 대체로 아래에서 위로 오르는 것이라 답할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는 아들의 마음이거나 혹은 늙은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어린 자녀는 야외의 언덕과 실내의 계단을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지만 늙은 어머니는 그저 조심스럽기만 하다. 
 
늙은 어머니와 늙은 집, 이 작품에서 어머니는 자신이 이 집에 40년 동안 살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자동차 구매할 돈도 없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아들이 자신에게 많은 돈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고, 둘은 이 집에서 아들과 함께한 추억이 많아 그만큼 장남을 쉽게 떠나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 영화의 주요 무대인 낡은 집과 죽은 장남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지금껏 우리가 줄곧 언급해왔던 장남의 시선은 이 공간의 시선인 동시에 우리의 시선이다.
 
말하자면 어디를 가나 망자의 온기가 서려 있고, 그것은 이제 곧 세상을 떠날 노인에게도 있다.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떠나간 사람, 떠나야 할 사람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공간은 수십 년의 세월이 담긴 시간인 동시에 가족을 잇는 연결 도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장소를 떠나 독립한 차남은 필연적으로 가족을 이탈하게 된다. 

영화 속 카메라의 시선, 낯설지만은 않은 이유
 
결국 핵가족이라는 현대 사회의 현상은 이 영화에서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 되며 반대로 이 집에 사죄를 위해 찾아온 행인은 무척 부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그는 이 집에 찾아옴으로써 가족 안에 자리 잡게 되므로 그렇다. 그런데 분명 아들이 그에 관해 묻자 어머니는 그렇게 매년 찾아와야 자식을 죽인 행인이 고통스러울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말과 행동은 정반대이다. 어머니는 죽은 행인을 죽은 장남을 대체할 무엇인가로 여기지만 동시에 그가 절대로 장남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혈연이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 말하자면 물질적으로 환산이 불가한 시간이며 이 오래된 집에 깃든 세월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편의 거대한 장례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어느 특정 시점에 고정되어 있다. 영화에 등장한 가장 처음의 위치를 고수하며 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거실을 비추는 장면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그 위치는 변함없다. 정면에서 살짝 왼쪽으로 빗겨나 2미터 정도를 떨어져 있다. 우리는 그러한 반복을 통해 고정된 장소와 시간에서 미묘한 가족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다. 마치 하나의 시간에 자리 잡고 여생을 살아가는 나무처럼, 그것은 죽은 장남의 혼백이 쉽사리 집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따금 이 영화에서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처럼 보이는 설정 숏들은 그런 면에서 죽은 장남이 집안을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를테면 카메라는 텅 빈 복도와 계단, 현관문이나 방안, 건조한 화장실과 축축한 부엌을 비추며 자꾸만 공백을 강조하려 든다. 분명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시끌벅적해야 할 명절은 그다지 화목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이 영화가 '사라진' 가족의 모습을 조명한다는 목적에 충실하게 만들며, 혹은 저승으로 떠나 이승의 그들과 이어질 수 없는 장남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출연하지도 않은 장남을 그리워하고 떠올리게 된다. 그때 그 장남의 얼굴은 우리가 떠나 보낸 누군가로 대체된다. 
 
고레에다는 자신의 영화가 오즈 야스지로에게 영향을 받았다 언급한 바 있는데, 이 영화를 보면 정말로 그렇다. 사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깊은 울림을 받는다면 어느 정도 오즈의 그것이 떠오르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분명 오즈의 것과는 다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의 손길이 닿아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즈는 50년대에 <동경 이야기>로 사라져 가는 가족의 형상을 그려낸 적 있고, <걸어도 걸어도>는 어쩌면 그것을 분해-재조립한 듯한 느낌이 있다. 
 
그 과정에서 달라진 것은 약간의 사선과 죽음에 관한 성찰이 첨가되었다는 것이고 유지된 점은 가족이라는 공간의 인격에 대한 것이다. 사실 오즈의 집과 고레에다의 집은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집이라고 불릴 이유가 없다. 그것은 집이라기보단 혈연이라는 교집합에 가깝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수십 년 뒤에도 오즈의 이야기가 유효하다는 것이며 또한 그를 이어받은 고레에다가 그것을 어떻게 변용했는지다. 우리가 오즈 하면 떠올리는 것은 한 편의 정물화를 빼닮은 다다미숏이지만 고레에다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살짝 위에 위치하며 늘 그렇듯 사선을 유지한다. 
 
그런데 그 사선은 어떻게 보면 현상을 직시하지 못하고 옆에서 훔쳐보는 듯한 느낌일 것인데도 전혀 비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지나간 것을 마주하지 못해 애써 고개를 돌리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우리가 <원더풀 라이프>에서 보았듯, 죽음은 문득 지나쳐 가지만 추억은 순간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일 테다. 그렇게 지나쳐가는 시간과, 죽음과, 삶의 경험을 사선이라는 시선에 미끄러지듯 흘려보내는 고레에다의 카메라가 전혀 낯설지만은 않은 이유다.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 원더풀 라이프 걸어도 걸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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