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염력>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이에 대해 연상호 감독 본인은 "<염력>을 애니메이션으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투자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며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작게나마 항변한 바 있다.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 연상호 감독의 해당 발언에 의문을 표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연상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보면 그의 말을 얼추 이해할 수 있다.

연상호 감독은 과거 어렸을 때 "곤 사토시 감독의 <퍼펙트 블루>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알게 모르게 그가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고, 이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말도 여러 인터뷰에서 했다.

연상호의 작품 세계

 영화 <파프리카>의 작품 포스터

영화 <파프리카>의 작품 포스터 ⓒ 매드하우스


실제로도 그러하다. 이를테면 전작 <돼지의 왕>에서 인물의 얼굴이 개와 돼지로 변하는 장면은 곤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에서도 비슷한 지점이 있다. 

그리고 <염력>에도 곤 사토시 감독에 대한 연상호의 애정이 담겨 있는 듯 한 인상을 준다. 곤 사토시 감독 영화 대부분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연상호는 그 꿈을 '염력'으로, 현실을 사회적 문제로 그렸을 뿐이다. 이 결합이 미숙하게 느껴졌다면 단언컨대 연상호의 잘못이겠지만 그가 어떤 의도로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알아볼 필요가 있다.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꿈과 현실의 일체화가 이루어져 있다. 두 단어는 사실상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꿈'의 중의적 표현이 삶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작품 전반에서 인물은 현실 세계에 꿈의 형태로 진입해 그 경계를 허물게 된다. <퍼펙트 블루>는 인물의 꿈이 현실에 진입하는 형태고, <천년여우>는 두 가지 꿈이 한 장소에 혼재되어 있는 식이다.

 영화 <퍼펙트 블루>의 작품 포스터

영화 <퍼펙트 블루>의 작품 포스터 ⓒ 매드 하우스


말로만 들어선 무척 어려워 보이는 영화지만 직접 보고 나면 그 황홀함에 전율하게 된다. 그건 꿈이라는 것을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우리의 마음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꿈에 대해 얘기할 때면 타인의 눈치를 보곤 한다. 이를테면 회사를 그만두고 작은 커피숍을 차린다는 말에 주변 동료의 반응을 보는 식처럼 말이다. 그건 현실이라는 큰 벽이 꿈의 크기보다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곤 사토시 감독의 매력은 그 현실의 벽 높이가 자유롭게 변하고 그에 상응하는 꿈의 크기도 자유롭다는 점에 있다. 어느 순간의 꿈은 찰나의 환상을 넘어 거대한 현실을 먹어 치운다. 그의 영화에선 결코 현실이 꿈을 잠식하는 법이 없다. 말하자면 일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정말로 꿈만 같은 영화가 된다. 연상호 감독은 <염력>을 통해 그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염력>은 현실 문제를 둘러싼 어느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그 전개에 있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초능력'이기 때문이다.

주인공(류승룡)의 능력은 마치 신과 같은 불허의 권력이며, 다수 대 소수의 대립 구도에서 소수가 다수에 대항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약수터 물이라는 흔한, 현실적인 요소에서 비롯된다. 가장 현실적인 것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것이 비롯되는 그 설정은 여러모로 꿈과 현실의 대립인 곤 사토시를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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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돼지의 왕>의 작품 포스터

영화 <돼지의 왕>의 작품 포스터 ⓒ 스튜디오 다다쇼


차이라면 곤 사토시의 작품들이 어느 정도 비현실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 연상호의 <염력>은 사회적 문제를 예리하게 건드리며 자꾸만 현실적인 문제를 부각했다는 점이다. 그 점이 현실과 꿈의 경계를 오가는 것에서 비롯되는 재미를 삭감하고 오히려 양극단이 자연스레 섞여들지 못해 따로 노는 듯 한 느낌을 주게 된다. 말하자면 은유가 아니라 직접적인 발화를 함으로써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한다는 뜻이다.

사실 연상호 감독의 전작 <사이비>와 <돼지의 왕>은 대중적 영화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현실 세계와 어느 정도 닮아 있으면서도 이따금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돼지의 왕>에서 아이들의 얼굴이 '개'로 변하는 모습이나, <사이비>에서 개를 발로 걷어차는 불량배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왜곡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비약적 상상력'이 아니라 뒤틀린 현실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균열을 뜻한다. 이런 왜곡은 그의 초기 단편 영화에서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지옥–두 개의 삶>이나 <사랑은 단백질>을 보고 나면 농담조로 "감독의 정신세계를 의심"하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초기 작품에서 현재 <염력>에 이르기까지 왜곡의 정도가 유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연상호 감독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카이: 거울 호수의 전설>(프로듀서로 참여)이나 <부산행>을 보면 이것이 연상호 감독의 작품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만큼 대중성에 신경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염력>에선 그 대중성이 다소 지워졌다. <부산행>의 성공으로 오히려 감독 자신만의 개성이 어중간하게 살아나 작품에 영향을 준 느낌이 든다.

작품 자체가 아쉬울지 몰라도 <염력>은 어느 정도 '보호'할 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감독이 작품관을 점차 만들어 가려는 일말의 노력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보통 영화의 가치에 대해 언급할 때 예술과 상업으로 이원화해서 평가하고는 하는데, 대부분 상업성은 관객에게 메시지 던지기에 주력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강한 신파나 서사의 분절성은 그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것들의 총아이다. 서사와 메시지의 전달, 가장 큰 설득력을 위해 가장 강력한 '극화'를 노리는 것이다.

물론 상업영화도 잘 만들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연상호 감독은 저예산, 예술영화 진영에 속해 있었고 <부산행>을 계기로 상업영화에 첫발을 내디뎠다. 첫 상업영화가 큰 성공을 한 나머지 후속작 <염력>에 그의 입김이 조금은 과하게 들어갔다고 생각된다. 연상호 감독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갑자기 얻게 된 '힘'을 다루는 것에 미숙한 게 당연하다. 당장 연상호에 대한 낙인을 찍지 말고 그의 행보를 더 보고 나서 평가하길 권한다.


영화 연상호 염력 곤 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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