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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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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에게 부치는 편지'

딸아, 어린 너를 독립시킨 지 10년 결혼 두 달을 앞둔 네가 사는 집을 처음으로 갔구나. 무심한 아버지 아니냐 하겠지만 사는 모습이 아버지 맘에 안 차면 서로가 마음이 상할까 싶어 차마 가보지를 못했다. 아버지 대접한다며 나름대로 술상을 봐왔지만, 엄마의 손맛에 길든 입맛이라 사실 좀 그렇더라. 허허.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 네 고향은 전주니라"
"아버지 고향이 홍천이고 서울서 태어난 제가 결혼했다고 해서 고향이 바뀌어요? 아버지 그 말씀은 못 따르겠습니다. 지금 이 결혼도 어떻게 하다 보니 하게 됐지만 저의 정체성까지 포기하면서 결혼생활에 올인 못 하겠습니다."

"정체성이라?"
"아버지가 저의 고향마저 시댁 고향을 따르라 하셨지만 저는 결혼을 해도 지금까지 아버지가 봐왔던 아버지의 딸 그대로 살 겁니다. 며느리와 딸의 역할은 평행선을 달릴 겁니다. 그리고 결혼생활 때문에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어느 하나라도 포기 안 할 겁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독립을 했던 것처럼 시댁과 남편으로부터 철저하게 경제적인 독립을 할 겁니다. 저는 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바라는 일이다."
"그런데 왜 고향까지 시댁 고향으로 바꾸라고……."

"시댁에도 그 집 고유의 가풍이라는 게 있을 게다. 아버지의 뜻은 네가 시댁에 좀 더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 한 거지 너의 정체성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다. 옛날 어떤 시인이 영화관 매표소 아가씨를 꼬여서 결혼했다. 가난한 시인이 고향을 등지고 청계천 판잣집에 도착해서 한다는 첫마디가 '이제부터 여기가 내 고향'이라고 외쳤다지. 서정춘 시인의 이야기를 이시영 선생이 시로 썼더구나. 서로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오늘은 네가 정성껏 마련해준 안주에 사위가 사다 준 좋은 술이나 마시고 싶다. 그동안 아버지 살아온 걸 본 게 있으니 잘 살겠지. 아버지는 딸을 믿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영주 시인의 '고음과 저음'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탁한 저음과 독한 고음이 어울리지를 못하고 삼십 년을 싸우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집에 가서 페이지 접어 놓을 테니 나중에 잘 읽어 보아라. 사랑한다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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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음과 저음

정영주

여자는 탁한 저음이고
남자는 독한 고음이다.
매너 모드가 없다
손가락으로 누를 별표도 우물 정자도 없다.
가까이 다가가 정수리를 누른다.
말랑말랑하더니 단단해지는
그들의 별표에서 갑자기 소리가 바뀐다.
저음이 고음으로 고음이 저음으로 바뀌는 찰나만
한집 같다.
저들은 삼 개월 황홀하고
삼 년 인내하고 삼십년 싸우는 중이다.
여기저기 털 빠진 방구들이
늙은 말처럼 길게 누워 있다.

시집 '달에서 지구를 보듯' 61쪽

- 사진은 태국여행 다녀온 작은 딸에게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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