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이란 이름 두 글자는 지난 열흘여 동안 '즐거움'과 '기다림'의 대명사였다. 28일 열리는 2018 호주 오픈 결승에서 아쉽게도 그를 볼 수 없으나, 시민들은 그간 아낌없이 그를 응원했고, 정현 선수 또한 최선을 다해 성원에 보답했다. 더 무엇이 필요하랴.

그러나 테니스는 영원할 것이고, 정현 선수의 향후 선전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그 자신 역시 꿈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한바탕 축제의 꿈이 깨기도 전에 정현 선수의 과제를 운운하는 건, 성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제라는 말을 희망 사항 정도로 바꾸면, 그에게도 또 시민들에게도 각자의 몫이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정현의 과제

 정현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발바닥 물집 부상 사진 갈무리.

정현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발바닥 물집 부상 사진 갈무리. ⓒ 인스타그램


26일 준결승전에서 정현은 발바닥 부상으로 페더러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기권했다. 발바닥 부상은 일과성 해프닝이 아니다. 발바닥 물집은 페더러 그 자신도 경험해 봤다고 밝혔듯, 남녀 프로 테니스 선수들 사이에 가장 흔한 부상 가운데 하나다.

발바닥 물집이 터져 살이 삐져나오는 정도였으니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정현과 그의 스탭들은 발바닥 부상을 가장 무겁고 심각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의학적으로 이번 부상은 한 달 이내에 완치된다. 하지만 발바닥 부상을 불러온 정현의 플레이 스타일은 쉬 교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현은 누구보다 많이 뛰는 스타일이다. 받아치기는 세계 최정상급이고, 서브로 포인트를 끝내거나 짧은 랠리 몇 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유형이 아닌 까닭이다. 많이 뛰는 선수들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거나 무릎에 부상이 흔한 건 자명한 일이다.

나달이 페더러보다 5살이나 어리지만, 가장 부상이 많은 선수 가운데 하나인 것은 많이 뛰는 그의 스타일 때문이다. 그의 부상이 하체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플레이 스타일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지만, 한 단계 기량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장기적으로 좀 덜 뛰는 테니스를 지향해야 한다.

아울러 체중 감량 여지를 체크해 봐야 한다. 16강전에서 맞붙었던 조코비치는 정현과 키가 188cm로 같지만, 체중은 정현보다 10kg 덜 나가는 77kg이다. 그까짓 10kg이 아니다. 이는 뛰어다니는 게 숙명인 운동선수에게는 어마어마한 차이이다.

오랜 시간 미국 랭킹 1위를 유지한 역대 최고의 서버 앤디 로딕이나, 그와 절친한 세계 톱10 선수 마디 피시 등은 감량을 통해 선수 생명을 연장하고 좋은 성적을 얻은 대표적 사례였다. 이 두 사람 말고도 체중 감량이 코트 위에서 성공으로 연결된 예는 허다하다.

올해 호주 오픈은 실질적 상위 랭커의 결장이 가장 많았다. 지난 20여 년 간의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앤디 머레이(영국), 니시코리 케이(일본)가 대표적이고, 조코비치 역시 막판 망설이다가 출전한 케이스이다. 페더러의 동료 스탠 바브링카(스위스)는 통증을 호소하며 어거지 출전했다가 초반 고배를 들었다.

테니스는 '쉬지 않고 뛰는 황소' 스타일의 나달 등장 이후, 또 페더러와 조코비치 머레이 등의 각축으로 황금시대를 구가하며, 가장 격렬한 스포츠 가운데 하나로 부상했다. 세계 프로 선수들이 지난해 말 대회 숫자 축소를 놓고 갑론을박 했던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요즘 인기 스포츠로 부상한 종합 격투기 선수들이 실제 경기를 치르는 것은 1년에 몇 차례 안된다. 무엇보다 격렬하고 부상이 많은 까닭이다. 테니스는 치고 받고 피만 흘리지 않을 뿐, 선수들을 속된 말로 반쯤은 죽여 놓는 가장 육체적으로 고된 스포츠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장기간 부상으로 신음해야 했던 세계 톱 10급 선수들의 공통점이 유난히 많이 뛰거나 체중이 과하게 나가는 선수라는 사실이 시사 하는 바는 막중하다.

시민들의 과제

 호주 오픈 홈페이지가 소개하는 정현 선수.

호주 오픈 홈페이지가 소개하는 정현 선수. ⓒ 김창엽


정현은 테니스 국가대표지만, 호주 오픈을 비롯한 그랜드슬램 대회와 세계테니스협회(ATP) 주관의 대회에는 개인자격으로 참가한다. 그의 선전으로 국격이 올라가고, 그가 졸전을 펼치면 나라의 위신이 깎인다고 여길 수 없다.

정현이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고,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좋은 성적을 거두니 즐거운 것이며, 패배하면 아쉽고 안타까운 것이다. 정현의 이번 호주 오픈 쾌거는 한국이라는 공동체 틀에서 보면, 시민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숙제를 안겨줬다.

어줍잖지만 영어로 표현하면, 테니스가 한국 사회에서 'fair share'를 갖고 있느냐는 물음으로 치환될 수 있다. 뭐라 우리 말로 옮겨야 그 느낌을 최대로 살릴지 모르겠지만, '제 몫' 혹은 '응분의 몫' 정도가 어떨까 싶다.

사계절 운동할 수 있는 테니스 코트는 오히려 늘어나는데, 갈수록 줄어드는 테니스 인구, 그리고 평소 시들한 테니스의 인기는 테니스협회 관계자나 테니스 선수들만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시민들이 야구 축구 농구를 제쳐두고 테니스에 억지로 관심을 가지라는 뜻도 아니다. 다른 주요 스포츠에 비해 제 몫 만큼의 테니스 인구, 인기가 없다는 얘기이다. 테니스는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 그리고 가까운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한국인의 체질 체형 취향이 테니스와 안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정현 선수의 선전, 그리고 그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보면 한국인도 유럽인이나 아메리카인, 일본인들과 같은 보편적인 '테니스 정서'를 갖고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테니스 인구가 적고, 인기가 저조한 이유를 현역 선수들의 부진한 실력 때문이라고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탄탄한 테니스 저변이 확률적으로 훌륭한 선수를 다수 키워낸다는 점을 외면해선 안 된다. 유럽이나 아메리카, 일본의 경우는 전적으로 후자인 축에 속한다.

부상으로 이번 대회 불참했지만, 아시아 길러낸 최고의 테니스 스타 니시코리는 유소년 테니스의 산물이다. 일본은 니시코리 외에도 세계 랭킹 100위 안에 다른 2명의 선수를 보유하고 있다. 100위 권 밖에도 줄줄이 일본 선수들이 분포한다. 테니스를 즐기는 문화가 널리 확산된 가운데, 어렸을 때 걸출한 자질을 보이는 선수가 자연스레 프로 선수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테니스는 체력이나 체형 등의 측면에서 한국인이 얼마든지 세계인들과 겨뤄볼 수 있는 종목이다. 개인적으로 농구를 가장 좋아하지만, 예를 들어 한국인의 체형 체력적 특징은 미국프로농구(NBA)의 주전급 선수를 길러내기에는 불리한 구석이 있다.

거칠게 말해, 한국인 가운데 세계 '톱10'에 들 수 있는 테니스 선수가 10~30년 마다 한명쯤 나온다고 가정하면, 미국NBA에서 톱 10 올스타에 들 수 있는 한국인 농구 선수가 나오려면 훨씬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꼭 농구가 아니라 하인즈 워드 선수로 주목받았던 미식축구 같은 데서도 세계 톱 10급 선수가 나오기는 가뭄에 콩나기처럼 어렵다.

테니스는 한국 사람들이 잘 할 수 있고, 또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그럼에도 그에 걸맞은 인구도 없고, 인기도 형편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 전체가 좀 고민을 해야 한다. 테니스가 애닯게 '울면서' 우리 시민들의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제2, 제3의 정현 선수가 출현하기를 고대한다면 시민들도 해야 할 몫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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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실립니다.
정현 테니스 페더러 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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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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