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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놈들, 그렇게 했으면 됐지, 또 그러느냐! 하지마라."

병원 의료진이 이기정 할머니의 몸에 소변줄을 설치하려고 하자 할머니는 강하게 싫은 내색을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의 유족인 김입분씨는 "할머니가 혼미한 정신에도 그렇게 싫어했어요. 옛날 끌려가서 고통 받았던 아픔이 떠오르셨겠죠. 그 정신에도 몸은 내주기가 싫어서 저런 말을 하시는데 눈물이 나서..."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지난 11일 채운동에 있는 우리병원(탑동사거리 인근)에서 8시 35분 경 이기정 할머니는 한 많은 세월을 마감했다. 평소 같으면 손녀가 인천에서 내려와 함께 있을 시간이다. 하지만 그날따라 고속도로가 막혔고 가장 사랑했던 손녀는 9시에야 겨우 도착했다. 그렇게 이기정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 누구도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손녀인 김입분씨는 "평소에는 8시 20분이면 도착할 시간이에요.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다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 같아 가슴 너무 아파요"라고 말했다.

딸이 되어 버린 손녀 

남편과 손녀가 같이 찍은 사진. 40대 중반 추정
▲ 이기정 할머니 사진 남편과 손녀가 같이 찍은 사진. 40대 중반 추정
ⓒ 최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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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도 추정
▲ 새모이를 주고 있는 이기정할머니 89년도 추정
ⓒ 최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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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손녀는 법적으로는 딸이 되었다. 집안에서 양자로 들인 아들이 호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사망하면서 손녀가 할머니의 법적 보호자를 맡기 위해서였다.

싱가포르와 버마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돌아온 할머니는 현재 생가인 송산면 오도리(행정명 당산리)로 시집을 왔다. 동네 사람들은 20살이 넘는 나이 차의 남편 김의환씨가 술도 마시지 않고 사람 좋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부부에게는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나이 차이 때문인지 할머니가 일본군에게 몹쓸 짓을 당해서인지 확인된 사실은 없다. 손녀 김입분씨는 "어떤 사람 잘못인지 확인할 수 없는데도 할머니는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어요. 당연히 일본군에게 당한 것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한테 더 애정을 쏟으셨고요"라고 말했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한 말

다정했던 남편이 떠나고 홀로 남은 할머니는 중학교까지 키우다시피한 손녀의 방문을 기다리며 노년을 보냈다. 외로웠던 할머니는 동네 오랜 친구들의 방문을 반겼다. 손녀를 제외하고 이기정 할머니와 가장 가깝게 지낸 할머니의 요양보호사인 손연례씨는 이기정 할머니에 대해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뭐하나 받으면 찾아오는 손님에게 다 쥐여 보냈다. 그리고 또 외로움을 많이 타셔서 손님들이 오는 걸 좋아하셨다"라고 말했다.

당진평화나비 학생들을 도와주고 있는 오윤희씨는 "할머니는 낯익은 사람이 찾아오는 걸 좋아하셨지만 반대로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많으셨어요. 많이 불편해 하셨어요"라고 말했다.

외로움이 깊은 때문인지 사람들을 좋아하셨지만 할머니는 누구에게도 아픈 기억을 얘기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구도 할머니의 과거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 못한다. 김입분씨는 "할머니는 과거에 대해 자세한 말들을 안 하셨어요. 그저 지나가는 말들로 몇 마디 하신 것뿐이죠"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인 사실을 알고 정부에 피해자로 등록한 것도 이복동생의 힘 때문이었다. 2005년 이복동생은 어렵게 살고 있는 누나를 위해 조금의 도움이라도 받게 하고자 정부에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할머니의 아픈 기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평생의 상처가 된 2년여의 고통

연도미상. 20대 후반 30대 초반 추정
▲ 이기정할머니 젊은 시절 사진 연도미상. 20대 후반 30대 초반 추정
ⓒ 최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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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정 할머니는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가 해방을 맞이해서야 겨우 돌아왔다. 여성가족부 담당자는 "구체적인 것은 개인정보라서 공개가 불가능하지만 위안부 피해자 등록 당시(2005년) 심의위원회 확인 결과 1943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위안부 피해를 당하신 걸로 확인된다"라고 밝혔다.

할머니의 주민등록상 1925년 4월생(소띠)이지만 본인이 쥐띠라고 증언한 만큼 실제로는 19살에서 20살(우리 나이) 정도에 일본군에 끌려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몇몇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5살이라고 말 한 사실과 차이가 있다.

여성가족부의 기록에 따르면 할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의 소개소를 찾았다가 일본군인의 옷을 세탁만 하는 줄로만 알고 위안부로 끌려갔다. 싱가포르와 버마(현재 미얀마)에 1년 정도씩 총 2년의 세월을 고통 속에 지내다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군함)에서 얄궂게 짐 가방을 분실하고 서울에 가까스로 도착한 후 식모살이를 해 여비를 마련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고향인 당진으로 뒤늦게 돌아왔다. 고향에서도 아버지에게만 위안부 생활을 알렸다고 한다.

나눔의 집 입소를 준비하다 맞은 마지막

70대 중반 추정
▲ 이기정할머니 70대 중반 추정
ⓒ 최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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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 김입분씨는 "할머니가 떠나 신 11일에 몸이 더 안 좋으시면 나눔의 집으로 모셔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눔의 집에도 그런 뜻을 전했고요"라고 말했다. 나눔의 집 관계자는 통화에서 "할머니를 뵈러 당진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할머니가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나눔의 집에 따르면 올해만 일곱 분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충남 유일한 생존자인 이기정 할머니 역시 먼 길을 떠났다. 할머니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는 게 고생이지. 하늘 나라 가면 아무 걱정 없잖아. 사는게 고통스럽고..."라고 말했다. 평소에도 자주 하시던 말이었다고 한다. 이제 할머니의 아픔을 푸는 것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덧붙이는 글 | 당진신문에도 송고한 기사입니다.



태그:#이기정 할머니, #위안부 피해자, #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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