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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걸으면 힘이 난다
▲ 만고 불변의 법칙 함께 걸으면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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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진 한 장만 찍어줘요."

찰칵.

"자, 갑시다!" 

밖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눈곱을 떼고 보니 오전 일곱 시였다. 알베르게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덜컥 마음이 급해졌다. 이층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얼굴이 제멋대로 찌푸려졌다. 멍든 발톱이 '발사'되는 고통이었다. 큰일이다.

아침 공기가 찼다. 마을 입구에 있는 다리가 괜스레 초라해 보였다. '잘 있어라, 안녕' 하며 손으로 다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차라리 발톱이 빠지면 덜 아플까? 새로 산 샌들도 소용없었다. 뒤뚱거리며 걷다 보니 금세 식은땀이 맺혔다. 걸음은 더뎠고,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 800km를 어떻게 걸어' 하며 막막하고 화도 났다. 그래, 차라리 오늘 빰쁠로나(Pamplona)에서 관두자.

남들보다 늦어진다는 압박감, 800km를 걸어야 한다는 막막함이 날 주저앉히고 있었다.

나폴레옹 병사들이 가짜로 눈싸움을 하는 게 재밌어 보여서 성문을 열었을 때 빼곤 함락된 적이 없다는 성벽, 높이를 보면 왜인지 알 만하다
▲ 역사상 단 한 차례 함락된 성벽 나폴레옹 병사들이 가짜로 눈싸움을 하는 게 재밌어 보여서 성문을 열었을 때 빼곤 함락된 적이 없다는 성벽, 높이를 보면 왜인지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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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까미노가 있다

"부옌까미노(Buen Camino)." 

뒤를 돌아보니 웬 거지꼴을 한 청년이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레게머리에, 긴 턱수염, 다 해진 옷, 양손에 든 나무 지팡이, 범상치 않았다. 꼭 시간을 건너온 순례자 같았다.

대장간에서 나무 지팡이를 손보고 있다, 오른쪽.
▲ 며칠 후 다시 난만 매튜 대장간에서 나무 지팡이를 손보고 있다,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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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왔다고?"

놀라서 다시 물었다.

"프랑스, 파리!"
"뭐? 걸어서?"
"그럼, 하하."

맙소사, 매튜는 이미 800km를 넘게 걸었다. 그는 마치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사람처럼 활력이 넘쳤다. 눈이 싱싱하다고나 할까.

"왜? 왜지? 어쩌다가 파리에서 걷게 된 거야? 집이 거기야? 아니면 여행전문가 뭐 그런 건가?"
"아니, 난 캐나다에서 목수로 일해. 사실 처음부터 이 길을 걸을 생각은 없었어. 휴가를 좀 길게 받아서 유럽 여행을 왔는데 파리에서 이 길을 알았거든. '그래? 한 번 걸어보지 뭐'하고 걷게 된 게 지금까지 걷고 있네?"
"발은 괜찮아?"
"아무 문제 없다고, 친구!"

중세 때 순례자들은 자기가 사는 곳에서부터 산티아고까지 걸었다고 한다. 때문에, 순례길은 유럽 전역에 퍼져있다. 마음만 먹으면 유럽 어디서든 산티아고 순례를 시작할 수 있다. 2000km를 넘게 걷는 사람도 있고, 100km 남짓 걷는 사람도 있다.

바욘 대성당에서 만난 여자 순례자가 떠올랐다. 1600km를 걸었다던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차분하면서 단단한 기운, 매튜에게서 비슷한 기운이 감돌았다.

"매튜, 너랑 더 대화하고 싶지만, 먼저 가." 

매튜는 절뚝거리는 날 보며 알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악수를 건넸다. 내가 그의 손을 잡자,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한 마디 건넸다.

"이봐, 친구, 까미노에서 순례자들 사이에 지침처럼 돌고 도는 말이 있어. '각자 자기만의 까미노가 있다(Everyone has their own Camino)'. 이 길에선 다들 자기가 걸을 수 있는 만큼 걷는 거야, 빨리 걸을 수도, 천천히 걸을 수도 있고, 산티아고까지 갈 수도, 못 갈 수도 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 길을 즐기는 거야. 스스로를 너무 밀어붙이지 마. 행운을 빌게!"

습관 같았다. 고등학교 땐 남들보다 좋은 대학, 대학교 땐 좋은 직장을 목표로 달려왔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급했다. 그저 뒤처질까 불안해했다. 지금 내가 그랬다. 800km 완주를 목표로 경주를 벌이고 있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걷고 싶었다. 뒤처지니까 불안했다. 다음 마을에 일찍 도착하면 조금 더 쉰다는 것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일찌감치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고통받을 필요가 있나?'라면서.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아침마다, 마치 장난 같은 물안개가 길을 덮는다
▲ 길을 덮은 물안개 아침마다, 마치 장난 같은 물안개가 길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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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는 다시 뛰듯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길을 덮은 물안개가 나타났다. 더 이상 공기가 차갑지 않았다. 걸을 만했다. 눈물이 났다.

서로 인사하다 보면 처음 봤어도 친구가 된다
▲ 쉬고 있는 순례자들 서로 인사하다 보면 처음 봤어도 친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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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것도 잊게 만드는 인사의 힘

"올라, 부옌까미노!"

좁은 산길이었다. 잠깐 쉬고 있는 백발의 순례자를 지나치며 우리는 줄줄이 인사를 건넸다. 백발의 순례자는 웃으며 네 명 모두에게 '부옌까미노'를 되 건넸다.

"그거 암? 우리 금방 인사 파도타기 했다는 거!"

어느새 일행이 생겼다. 대구에서 온 '백자매'와 군대를 제대하고 산티아고에 온 호기와 함께였다. 백자매 언니 선주는 스물일곱으로 나와 나이가 같았다. 동생 희민이와 호기는 스물둘, 스물셋이었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20대, 같이 걸으니까 힘이 났다.

"인사 파도타기라니, 창의력 장난아니다!"
"한국에서 이렇게 인사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겠지?"

'인사 파도타기'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까미노를 걷는 자의 특권이랄까? 이곳에선 인사를 건네면 인사가 돌아온다. 인사 파도타기도 종종 벌어진다. 처음엔 신기하고 재밌어서 인사를 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상대에게 인사를 건넨다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좁은 길에선 일렬로 줄지어 걷곤 한다
 좁은 길에선 일렬로 줄지어 걷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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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의 힘을 깨달았다. '부옌까미노!' 인사를 할 때만큼은 힘들다는 걸 잊는다. 순례자들 사이에 있는 모종의 동질감 때문인지, 인사를 보내고 나면 피식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힘들지? 나도'라며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는 신호인 셈이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인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볼까?" 
"돌을 아십니까?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걸."

우스갯소리였지만, 약간의 씁쓸함 찾아왔다. 맞아… 한국에서 이러면 미친 사람 취급당하겠지….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며 지낼 수 있다면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며 지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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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은 이어진다
 길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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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걷다가 학교 가는 소년... 정답을 내려놓다

오후 세시가 넘자 햇빛이 얼굴로 내리쬐었다. 빰쁠로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숲길을 벗어나니 마을이 나왔다. 마을에 있는 성당이나, 다리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금으로 칠해져 있는 성당 내부는 눈을 사로잡았다. 몇백 년이나 된 다리를 사람들이 아직도 쓴다는 게 신기했다.

1583년 로마 시대 때 만들어진 다리가 지금까지도 쓰인다니!
▲ 뜨리니닷 다리 1583년 로마 시대 때 만들어진 다리가 지금까지도 쓰인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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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매치기가 많다니까 조심해." 

칼이 달려왔다. 우리가 시가지에서 어영부영하는 모습이 불안했는지 조심하라고 일러줬다. 시가지에서는 순례자를 노리는 얌체 범이 더러 있다고 했다. 새하얀 피부에 가느다란 팔, 다리를 가진 칼은 언뜻 보면 여자아이 같았지만, 단단한 목소리를 가진 중학생 남자였다. 함께 걷기로 했다.

숲길을 걷다가 시가지에 들어가면 혼란스럽다
 숲길을 걷다가 시가지에 들어가면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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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걸었어?"
"생장."
"혼자 왔어?"
"아니, 엄마랑 엄마 친구랑 왔는데, 아마 뒤에 오고 있을걸?"
"오늘 어디까지 가?" 
"빰쁠로나."
"최종 목적지는 어디야? 산티아고? 피스테라?"

많은 순례자가 산티아고를 지나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피스테라(finnistella)까지 간다는 걸 막 알게 된 뒤였다.

"최종 목적지가 빰쁠로나인데? 나 오늘 밤에 집에 가." 
"어? 어떻게 가는데?" 
"버스로 타고 두 시간 가서, 지하철 한 시간 타면 돼. 나 프랑스에 살 거든. 내일모레 학교 가야 해."
"와…"

성벽을 끼고 성문으로 향한다
▲ 빰쁠로나로 가는 길 성벽을 끼고 성문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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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모든 순례자가 산티아고를 간다고 생각했다. 칼이 빰쁠로나에서 멈춘다고 하니 어색했다. 버스랑 지하철 타고 집으로 간다니까 왠지 억울하기도 했다. 생일에 공항에서 잤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렇게 걷는 사람도 있구나, 칼에겐 산티아고 순례길이 제주도 올레길쯤 되지 않을까? 칼은 책가방 달랑 하나 메고 있었다. 그나마도 속이 비어있는 것 같았다. 아까 소매치기 조심하라며 뛰어왔던 게 이해가 됐다. 보통 순례자들은 뛰고 싶어하지 않는다.

"걸으니까 어때?"
"좋아. 길이 아름답잖아? 다음에도 또 올 거야. 다음번엔 빰쁠로나에서 부르고스(Burgos)까지 걸으려고."

칼은 편안해 보였다. 얼굴에 '해야 한다'가 없었다. 나도 산티아고까지 가야 한다는 '정답'을 내려놓기로 했다. 걷는 걸 그만두기로 했던 마음이 풀렸다. 더 걷기로 했다.

'산티아고까지 가지 못해도 되니까, 가보자. 갈 수 있는 데까지.' 

'모두 자기만의 까미노가 있다'던 매튜의 말이 떠올랐다.

빰쁠로나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문, 웨딩 촬영을 하고 있었다
▲ 수말라까레기 문 빰쁠로나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문, 웨딩 촬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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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성곽이 보였다. 빰쁠로나에 도착했다. 이름 모를 작은 축제가 한창이었다.

축제가 한창이었던 빰쁠로나, 모두가 거리에 나와 춤을 춘다
 축제가 한창이었던 빰쁠로나, 모두가 거리에 나와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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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걷다가 마을에 들어가면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인다
▲ 빰쁠로나 힘들게 걷다가 마을에 들어가면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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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라기엔 크고, 도시라기엔 아기자기한 빰블로나
▲ 저물어가는 빰쁠로나의 밤 마을이라기엔 크고, 도시라기엔 아기자기한 빰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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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7년 5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걸어서 산티아고를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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