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축구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덕분에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 다각도의 분석이 가능해져 이전보다 다양한 '숫자'가 팬들에게 데이터로서 제공된다. 데이터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코어, 득점의 수 등 몇몇 숫자만이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보통 경기장 내에서 일어나는 플레이에 대한 숫자(득점, 슈팅 수 등)가 의미를 가지는 와중에 유독 플레이와 아무 연관이 없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숫자가 있다. 바로 선수들 등에 적힌 숫자. 즉 '등번호'다. 등번호는 그 선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동시에 많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 단순히 선수 구분의 편의성을 위해 탄생한 등번호는 세월이 흐르자 단순한 번호가 아닌 의미와 가치를 더해진 '특별한 숫자'로 변모했다. 물론 모든 등번호가 가치 있는 '위대한 등번호'가 될 수는 없다. 세계 축구사에서 소수만 인정받은 '위대한 등번호'의 계보를 살펴보자. - 기자 말

바야흐로 레알 마드리드의 시대다. 지난 10년여 간 라이벌 FC 바르셀로나에게 밀려 한동안 스페인의 '2인자'로 여겨지던 레알이었지만, 지난 네 시즌 동안 세 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패권을 완전히 넘겨받았다. 특히 지난 시즌에는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2연패라는 금자탑을 동시에 쌓으면서 명실상부 세계 최고 클럽으로서 위상을 되찾았다. 주축 멤버들이 건재하고 젊은 자원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는 레알의 거침없는 행보는 계속될 전망이다.

레알은 전 세계 축구 클럽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클럽이다. 한 번도 들기 어렵다는 빅이어(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12번이나 들어 올렸고, 자국 리그에서는 33번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현재 레알은 모든 축구 선수들이 갈망하는 '이상향' 같은 클럽으로서 위치하고 있다. 실력, 역사, 상품성 등 모든 부분에서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클럽답게 레알을 거쳐간 선수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그 중에서도 레알의 역사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한 '등번호'를 꼽자면 7번을 빼놓을 수 없다. 레알의 7번의 역사는 곧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였다.

레알의 '나폴레옹' - 레몽 코파

   동료들을 진두진휘하는 모습이 마치 '나폴레옹' 같았던 레몽 코파

동료들을 진두진휘하는 모습이 마치 '나폴레옹' 같았던 레몽 코파 ⓒ 위키미디어


1931년 태어난 작은 프랑스인은 레알 역사를 비롯해 프랑스 축구 역사에서 큰 인물로 여겨진다. 아버지와 함께 석탄 광산에서 일하던 소년의 재능을 많은 프랑스 팀들이 눈여겨 봤다. 실력은 뛰어났지만 키가 작다는 이유로 레몽 코파를 선택한 팀은 당시 프랑스 2부 리그 팀이었던 앙제 SCO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앙제에서 두 시즌 간 맹활약한 코파의 다음 행선지는 당대 프랑스 최고의 팀인 스타드 드 랭스였다.

1948-1949 시즌에 첫 리그 우승을 달성한 랭스는 코파의 합류로 프랑스 최고 클럽으로 발돋움 했다. 과거의 작은 신장의 선수가 으레 그렇듯 코파의 주무기는 드리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능력 중 가장 고평가 받는 것은 바로 '경기 운영 능력'이었다. 코파는 뛰어난 돌파력과 준수한 득점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플레이메이커로서 뛸 때가 가장 위협적이었다.

코파의 지휘 아래 프랑스를 정복한 렝스는 1955-1956 시즌 유로피언컵(챔피언스리그 전신)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였다. 코파의 활약 속에 렝스가 먼저 리드를 잡았지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버티는 레알이 결국 초대 유로피언컵 우승팀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코파는 패배로 아쉬움을 삼켰지만, 이날의 결승전을 계기로 레알로 이적을 하게 됐다. 당시 그의 플레이에 반한 레알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러브콜로 레몽 코파는 1956-1957 시즌부터 레알의 선수가 되었다.

등번호 7번을 부여 받은 레몽 코파의 레알 적응기는 험난했다. 레알이라는 클럽에는 이미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와 같은 쟁쟁한 선수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경기를 주도하는 역할에 익숙한 코파에게 오른쪽 측면에서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하는 레알의 전술은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에 배치됐다고 해서 코파의 능력이 감춰지지는 않았다.

코파는 본인의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없었음에도 디 스테파노와 헨토와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면서 레알 공격의 일익을 담당했다. 디 스테파노와 헨토만으로도 유럽을 제패한 레알의 공격진에 코파까지 더해지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리그에서 세비야 FC를 밀어내고 우승을 차지한 레알은 유로피언컵에서도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탈리아의 ACF 피오렌티나 등을 꺾고 유로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다.

그 다음해는 코파 커리어의 절정기였다. 레알은 1957-1958 시즌 유로피언컵에서 세비야와 헝가리의 바사스 부다페스트를 대파하고 결승에 또다시 진출했다. 결승전에서는 파울로 말디니의 아버지 체사레 말디니가 버티는 AC밀란을 격파하고 유로피언컵 3연패에 성공했다. 레알의 유로피언컵 3연속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운 코파는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도 활약을 이어갔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공격수 쥐스트 퐁텐이 13골을 터뜨리는 동안 코파는 3골 9도움을 기록하며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프랑스의 우승 도전이 준결승에서 '축구 황제' 펠레에게 막혀 좌절된 것이 유일한 흠이다. 클럽과 국가대표팀 모두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코파는 1958년 발롱도르 수상자로 선정됐다. 프랑스 선수 최초의 발롱도르 수상이었다.

1958-1959 시즌에도 코파는 레알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헝가리의 전설 페렌츠 푸스카스까지 합류한 레알은 리그에서는 바르셀로나에게 밀렸지만, 유로피언컵에서는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 상대는 공교롭게도 코파가 몸을 담았던 렝스였다. 렝스와 결승전이 코파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코파는 레알의 유로피언컵 4연패를 뒤로 하고 친정팀 렝스로 다시 복귀했다. 3년여 간의 짧았던 '나폴레옹'의 스페인과 유럽 정복기는 레알 7번 유니폼 역사의 화려한 서막이었다.

'라울' 마드리드 - 라울 곤잘레스

   '라울'은 곧 '레알'이었다

'라울'은 곧 '레알'이었다 ⓒ 위키미디어


레몽 코파로 시작된 레알의 등번호 7번에는 많은 인물들이 거쳐갔다. 스페인에게 첫 메이저 타이틀을 선물한 '마법사' 아만시오 아마로와 '기적의 사나이' 후아니토도 레알의 7번으로서 무수한 트로피를 쟁취했다. 그 사이 레알은 스페인의 최강자 자리는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1966년 여섯 번째 유로피언컵 우승을 끝으로 유럽 무대에서는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레알은 혜성처럼 등장한 한 남자로 인해 화려하게 유럽의 황제로 복귀했다. 레알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낸 장본인은 '반지의 제왕' 라울 곤잘레스였다. 본래 레알의 지역 라이벌 클럽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소년 팀에서 뛰던 라울은 재정적인 문제로 해체된 아틀레티코 유소년 클럽을 떠나 레알에 입성했다. 빠르게 성장한 라울은 1994년 만 17세의 나이로 1군 무대 데뷔 경기를 가졌다. 데뷔 시즌 라울은 '등번호 17번'을 달고 9골을 뽑아내며 단숨에 스페인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1995-1996 시즌 클루브 셀라뇨로 이적한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를 이어 '등번호 7번'을 달게 된 라울은 해당 시즌 리그에서만 19골, 모든 대회를 통틀어 26골을 성공시켰다. 특히 유럽대항전 8경기에서만 6골을 터뜨리며 '미스터 챔피언스'(챔피언스리그에서 강한 라울의 별명)의 자질을 일찌감치 드러냈다. 단숨에 레알의 주포가 된 라울은 뛰어난 득점력으로 1996-1997 시즌 리그에서 21골을 성공시키며 데뷔 시즌에 이어 두 번째 리그 우승을 쟁취했다. 스페인 최우수 선수의 몫은 당연히 라울에게 돌아왔다.

이 작은 지면에 라울의 득점력과 그가 들어 올린 우승 트로피를 모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라울이 레알에서 이룬 업적은 화려함 그 자체다. 라울 데뷔 후 다섯 시즌 만에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득점왕까지 경험하며 모든 영광을 누렸지만 전성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1999-2000 시즌 레알의 여덟 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 과정에서 라울은 10골을 상대 골망에 집어넣으며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다. 8강전 상대였던 디펜딩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더이상 레알이 두렵지 않다"는 도발에 라울은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하게 해주겠다"며 맨유에게 두 골을 선사한 유명한 일화도 있다.

라울은 다음 시즌에도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타이틀을 따내며 스페인 선수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두 시즌 연속 득점왕이란 업적을 달성했다. 라울은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레알의 '갈라티코 정책'(스타 선수들을 모으는 정책)에서도 살아남으며 본인의 가치를 입증했다. 호나우두의 영입으로 라울은 과거보다 후방에서 플레이를 가져갔다. 득점력은 다소 줄었지만 유려한 발 놀림과 높은 축구 지능으로 영향력을 계속 이어갔다. 그의 헌신 덕에 파트너 공격수는 부담없이 공격에 집중할 수 있었다. 득점력과 헌신적인 모습을 동시에 갖춘 실력에 페르난도 이에로에게 넘겨 받은 주장 완장까지 더한 라울은 곧 레알 마드리드 그 자체였다. 'Real Madrid'가 'Raul Madrid'로 불리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니였다.

라울은 2010년 레알을 떠나기 전까지 6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 사이 레알의 최다 경기 출장자, 최다 득점자도 라울의 차지가 됐다. 유럽 무대에서도 수많은 골을 터뜨리며 유럽 대항전 최다 득점자로서 군림했다. 득점력, 경기를 임하는 자세, 클럽을 향한 사랑 등 항상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라울은 레알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선수가 되었다.

계속되는 레알의 전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레알 '7번'의 정점에 선 호날두

레알 '7번'의 정점에 선 호날두 ⓒ 위키미디어


2010년 라울을 샬케 04로 떠나 보내면서 많은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이 눈물을 흘렸지만, 라울의 퇴장은 새로운 전설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라울의 뒤를 이어 7번을 달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레알 홈구장)을 누비게 된 선수는 라울이 세웠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레알 팬들을 즐겁게 했다. 현재도 레알의 7번으로서 활약 중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그 주인공이다.

호날두의 경이로운 활약상은 레알에 입단하기 전부터 시작됐다. 포르투칼의 스포르팅 CP를 거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성한 호날두는 맨유에서도 빠르게 발전했다. 웨인 루니, 라이언 긱스 등 스타 선수들 사이에서도 호날두의 실력은 돋보였고, 호날두는 맨유가 2007-2008 시즌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동시에 달성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비롯해 각종 대회에서 42골을 터뜨린 호날두는 2008년 첫 발롱도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맨유에서 한 시즌 더 활약한 호날두는 레알의 강력한 러브콜로 당시 지네딘 지단이 가지고 있던 세계 최고의 이적료를 경신하면서 레알 유니폼을 입게 됐다. 호날두가 스페인으로 넘어온 2009년에는 라울이 아직 팀에 있었기에 9번이 호날두의 등번호로 낙점 받았다. 호날두의 이적은 레알의 최근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당시 레알은 리그에서의 부진은 물론이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매 시즌 16강에서 떨어지는 굴욕을 이어가고 있었다. 반면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호나우지뉴-리오넬 메시로 이어지는 황금세대의 등장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레알은 메시에 필적할 만한 선수로 호날두를 선택했고, 레알과 호날두의 반격은 시작됐다.

시작은 좋지 못했다. 데뷔 시즌 무난하게 스페인 무대에 적응한 호날두는 2010-2011 시즌부터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레알의 공격 축구를 이끌었다. 문제는 당시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끄는 바르셀로나가 너무 막강한 경기력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바르셀로나 특유의 '티키타카'에 유럽의 모든 팀들이 무너졌다. 바르셀로나의 압도적인 퍼포먼스의 '에이스' 역할을 했던 메시는 2009년부터 4년 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라이벌 호날두의 활약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보통 선수라면 메시라는 거대한 벽에 좌절할 법도 했지만 호날두는 달랐다. 호날두는 과거 측면에서 보여주던 드리블과 화려한 기술을 다소 줄이고 득점에 에너지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본래 득점에 능했지만 득점에만 힘을 쏟자 골 개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오른발, 왼발, 머리 등 어떤 신체 부위로 모든 상황에서 호날두는 득점을 만들어냈다. 2010-2011 시즌부터 시즌 40골 이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호날두의 기록 행진은 지난 시즌까지 이어졌다. 지난 시즌까지 호날두는 일곱 시즌 연속 시즌 40골 이상을 달성했다.

호날두가 레알에서 지내는 동안 무수한 별들이 레알을 거쳐갔지만 레알의 태양은 언제나 호날두였다. 2011-2012 시즌 스페인 무대에서 첫 리그 우승을 기록한 호날두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이며 레알의 유럽 제패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2013-2014 시즌 레알이 열 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하는 과정에서 호날두는 무려 17골을 성공시키는 괴물같은 득점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약팀에게 득점을 몰아 넣는다는 항간의 조롱은 이제 호날두를 빗겨갔다. 호날두는 2012-2013 시즌부터 지난 시즌까지 다섯 시즌 연속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자리를 차지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득점력 부분에서는 라이벌 메시를 앞서갔다.

놀라운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골을 양산해내는 호날두에게 흐르는 시간은 적이었다. 하지만 호날두는 그마저도 극복하고 있다. 전보다 드리블의 빈도를 줄이는 대신 패널티 박스 근처 움직임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켰다. 지단 감독의 보호 아래에서 중요한 경기에서 본인의 역량을 쏟아냈다. 과거보다 호날두의 득점 숫자는 줄었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골을 터뜨리는 빈도는 늘어났다. 지난 시즌 호날두는 클럽의 시즌 농사를 결정짓는 마지막 10경기에서만 16골을 성공시켰다.

호날두는 최근 레알에서 보낸 여덟 시즌 동안 406골을 터뜨리며 득점에 관한 모든 기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같은 기간 동안 3번의 발롱도르를 차지했고, 올해 발롱도르 수상도 거의 확정적이다. 라울의 공백을 전혀 느낄 수 없게 만든 호날두의 존재는 레알 팬들에게는 축복이었다.

호날두는 여전히 건재하지만 라울이 그랬던 것처럼 호날두도 스페인 무대에서 퇴장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다행인 점은 이스코, 마르코 아센시오라는 젊은 재능들이 이미 팀에 존재하고 있고, 장차 세계 축구를 이끌 킬리안 음바페도 레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레알 마드리드 7번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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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7번 레몽 코파 라울 곤잘레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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