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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10. 22. 서울, 전쟁으로 학교 교실이 잿더미가 되자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불탄 교실 터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책보로 모래를 나르다

교사였던 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검색할 때 학교 관련 자료에 한 번 더 눈길이 갔다. 더욱이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 그 시절 초등학교 학생들의 생활 사진은 내 경험과 일치했다.

한국전쟁 당시 내 고향 구미는 다부동 전투 지역 배후지로 폭격이 매우 심했다. 건물 대부분은 그때 전란으로 불타버렸다. 구미초등학교(전 구미국민학교) 교실 역시 전파 또는 반파됐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긴급히 보수했으나 1학년과 2학년 저학년 학생들은 급조된 초가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다.

곧이어 교실을 새로 지었는데 당시에는 불도저나 트럭과 같은 장비가 매우 귀했다. 게다가 정부 예산은 턱없이 부족한 터라 학생들도 교실을 짓는 데 앞장섰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시냇가에 가 책을 싸서 들고 다니던 보자기에 모래를 담아 학교 운동장으로 날랐다. 마치 일개미 행렬처럼 말이다. 그 모래에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시멘트를 섞어 교실을 새로 지었다.

그때는 의무교육이라고 했지만, '월사금'(일종의 육성회비)을 일률적으로 거뒀다. 그러자 월사금을 낼 형편마저 되지 않는 집 아이들은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내 친구 가운데는 월사금을 마련하고자 한밤중에 지게를 지고 금오산에 올라간 이도 있었다. 몰래 소나무를 베어낸 뒤 몇 날 며칠을 말렸다. 친구는 소나무 둥치를 도끼로 쪼개 장작을 만든 다음 그걸 내다 팔아 월사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닌 것이다.

겨울철 교실 난로 땔감은 학생들 몫이었다.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장작을 한두 개씩 지참하고 등교했다. 이따금 미군이 트럭에 분유를 싣고 오면 학교는 그걸 아이들에게 나눠주거나 가마솥에 끓여 주기도 했다. 학생들은 그 분유를 집에 가져가 쪄서 먹기도 하고, 끓인 분유 한 캔을 얻어 마셨다. 물론 분유를 마시고 복통을 일으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시절은 모두 이렇게 어렵게 학교에 다녔다.
1952. 7. 동구 밖 밭에다가 임시로 천막을 친 초등학교의 애국 조회시간. ⓒ NARA
뜨거운 교육열

20세기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교육열의 역사는 깊다. 한국전쟁 직후 교육열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1권 '전쟁 중의 뜨거운 교육열' 중 일부를 통해 가늠해보자.

"한국인들은 학력이 그 어떤 재산보다도 안전하다는 것을 전쟁 중에 뼈저리게 체험했다. 다른 건 (전쟁으로) 파괴되고 약탈당할 수 있지만, 학력은 사라지지 않는 재산이었다. 1950년대의 교육열은 '교육 기적' 또는 '교육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뜨거웠다.

그 교육열은 38선을 넘어온 피란민들에 의해 더욱 뜨거웠다. 그들에게는 자녀 교육 이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 있었겠는가. 월남한 북한 주민들의 자녀교육열은 남한 주민들의 자녀교육열을 자극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6.25 전쟁 중에도 2부제, 3부제 수업은 물론, 한 학급에 100명 이상 수용하는 것도 불사해 가면서 교육은 계속 이루어졌다. 1951. 4. 23. <뉴욕 타임스>의 한 구절이다.
1954. 3. 9. 경기도 문산. 한 중학교의 초가 교실 ⓒ NARA
'어떤 초등학교는 교외 어떤 산 위에서, 그 전 일본 신사(神社)에서, 개천 자리에서, 그리고 한 중학교는 산골짜기에서 각각 수업을 받고 있다. 남한의 어디를 가든지, 정거장에서, 약탈당한 건물 안에서, 천막 속에서, 그리고 묘지 부근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교과서 있는 학생은 일부로, 교과서가 없는 학생은 없는 대로, 지리·수학·영어·미술 그리고 공민 등의 교과를 배우고자 교실로 몰려들고 있다. 여학생들은 닭을 치고, 계란을 팔아서 학교를 돕는다. (경북) 안동에서는 학생들이 흙벽돌로 교사(校舍) 세 채를 건축하였다.' - <뉴욕 타임스> 보도

서울의 학교들은 전쟁 중 피란지에서 학교 문을 열었다. 서울대와 연희대(연세대)는 부산에서, 고려대는 대구에서 임시학교를 설치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1권 263~266 발췌 요약정리.

이번 기사에서는 '전란 속의 학교 교육'이라는 주제로 NARA의 사진들을 골라 봤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포토샵을 하지 않고 스캔한 원본 그대로 게재합니다.)
1951. 부산. 초등학교 어린이 대표가 교과서 용지를 원조해준 미국 관계기관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오른쪽 끝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장관). ⓒ NARA
1950 부산. 초등학교 학생들이 국제적십자사로부터 초콜릿 등 선물을 받고 있다. ⓒ NARA
1951. 미국의 원조로 만든 초등학교 교과서들. ⓒ NARA
1954. 3. 9. 경기도 문산. 한 중학교 임시 천막 교실 내부 ⓒ NARA
1950. 11. 1. 원산, 한 초등학교 학생들과 담임선생님 ⓒ NARA
1950. 11. 1. 전쟁 중이지만 원산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다. ⓒ NARA
1954. 5. 13. 어느 초등학교의 수업시간. ⓒ NARA
1950. 10. 서울. 은평. 교실이 불타버린 빈 터에서 수업을 받는 어린이들. ⓒ NARA
1953. 6. 5. 서울.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이 모자라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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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NAR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NAR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박도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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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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