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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념물 26호인 '이덕남 장군 묘'는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85에 있다. 도로변에 붙어 있기 때문에 찾기에, 또 답사하기에 아주 쉽다.
 경기도 기념물 26호인 '이덕남 장군 묘'는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85에 있다. 도로변에 붙어 있기 때문에 찾기에, 또 답사하기에 아주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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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념물 26호인 '이덕남 장군 묘'는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85에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이 문화재에 대해 아래와 같이 해설한다.

'안성에서 태어난 이덕남은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으며 20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훈련원 부정 등의 자리에 올라 무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안성에서 외삼촌 홍자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북진하는 왜적을 여러 차례 격퇴하였다. 그 뒤 용인·죽산·양지에 진을 구축하는 동시에 서운산성에 토성을 쌓아 경기·충청 지방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찌르다 전사하였다.

숙종 44년(1718) 묘소에서 1km떨어진 장군의 생가에 정문(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 세워지고 병조참의 벼슬이 내려졌다. 부인과의 합장묘로 봉분은 2개이며 묘비 이외의 일체의 석물이 없었으나, 1975년 석물과 묘비를 다시 세웠다. 원래의 묘비는 약 80m 앞쪽으로 옮겨졌으며, 영조 때의 학자인 윤봉구가 글을 짓고, 홍봉조가 글씨를 쓴 것이다.'

진양사(이덕남 장군 묘역의 사당)
 진양사(이덕남 장군 묘역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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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에 세워져 있는 현지 안내판의 설명도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문과 비슷하다. 현지 안내판의 설명은 '임진왜란 당시 안성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친 이덕남(?∼1592) 장군의 묘'로 시작되어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로 끝난다.

역사유적 현장에서는 안내판 꼼꼼하게 읽어야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문을 소개한 것은 답사를 떠나기 전에 관련 배경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이어서 현지 안내판의 글 전문을 옮겨 적는 것은 역사여행에서 현지 안내판을 꼼꼼하게 읽는 일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이덕남 장군의 자는 윤보, 본관은 (경북) 영천이며, 참봉 이수인 선생의 아들로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외숙인 홍자수 선생 댁에서 성장하였다. 20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임명되고, 이어 훈련원 부정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홍자수와 함께 농기구를 녹여 무기를 만들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다.

의병 3000여 명을 거느리고 안성과 진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서운산성에 성루를 구축하여 외종제인 홍계남 장군은 좌성, 이덕남 장군은 우성을 맡아 지켰다. 그 후 기호(경기도), 호서(충청도) 지방 의병과 합세하여 좌찬영에서 왜적을 격퇴시켰으나, 죽주산성에서 왜적의 기습을 받아 홍자수 선생과 함께 전사하니 목촌(미양면 구수리)에 안장됐다. 이때 제문은 곽재우 의병장이 지었다. 이덕남은 선무원종공신에 추서되었고, 숙종 44년(1718) 「忠臣之門(충신지문)」이란 정문이 건립되었으며,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이하 생략).'

이덕남 장군 묘 전역 (사진 왼쪽이 사당인 진양사, 가운데가 정려비, 오른쪽이 부부의 묘)
 이덕남 장군 묘 전역 (사진 왼쪽이 사당인 진양사, 가운데가 정려비, 오른쪽이 부부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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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은 이덕남이 홍계남의 외사촌 형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군이 결성될 때 혈연, 학연, 지연이 주요 노둣돌 역할을 한 일반 사례와 일치한다. 홍계남이 군수를 역임한 경북 영천의 예를 하나만 든다면, 권응수가 창의할 때 함께 의병군으로 가담한 권응평, 권응전, 권응생은 그의 동생들이고, 권건과 권윤은 조카들이고, 권응심은 사촌동생이고, 김몽구는 종매부였다.

부자, 형제, 친척, 동문들끼리 의병 부대를 결성했다

안내판은 홍계남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실제로 홍계남을 기려 세워진 고루비(古壘碑, 옛 진지 터를 나타내는 비석)가 이덕남 묘소에서 불과 300m 남쪽에 있다. 살아생전 두 사람은 외사촌 형제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만 다른 세상에 간 뒤에도 나란히 유적을 남겨 변함없는 친근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덕남 장군 묘소에서 300m가량 떨어진 지점의 얕은 언덕은 홍계남 장군이 성루를 쌓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역사 유적이다. 그곳에 세워져 있는 비를 '홍계남 장군 고루비'라 한다.
 이덕남 장군 묘소에서 300m가량 떨어진 지점의 얕은 언덕은 홍계남 장군이 성루를 쌓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역사 유적이다. 그곳에 세워져 있는 비를 '홍계남 장군 고루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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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남 장군 묘에서 서운면 소재지를 향해 300m가량 남진하면 얕은 고개가 나온다. 홍계남은 이곳 니말고개 오른쪽 야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왜군과 싸웠다. 지금 니말고개에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경기도 유형문화재 71호인 '홍계남 장군 고루비'가 의연히 서서 답사자를 맞아준다. 안내판을 읽어봤다.

'이 비는 조선 영조 21년(1745) 안성 주민들이 임진왜란 때 명장 홍계남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중략) 장군은 어릴 때부터 용감했으며,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하였고,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 안성에서 부친 홍자수와 집안의 네 형과 같이 의병을 모아 엽돈령에 머물고 있는 왜적 7명의 목을 베어 막대기에 매달아 적을 퇴각시켰다.

장군은 그 뒤 이곳 목촌 땅에 성루를 쌓고 임전 태세를 갖추는 한편, 죽산·양지·용인 등지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을 기습하여 적의 기세를 꺾었다. 장군이 다른 곳에서 싸우는 동안 부친이 전사하자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부친의 시체를 찾아왔다. 조정에서는 장군의 공을 가상히 여겨 수원판관 겸 기호(경기와 충청) 양도 조방장에 제수하였다. 그 후 선조가 그의 충절을 기려 마을에 정문을 세우고 판돈녕부사(종1품)에 추증하였다.'

홍계남 장군 전승지인 엽돈령은 안성시 청용면과 충북 진천군 백곡면을 잇는 고개이다. 이곳은 현재 한자어로 개명되어 흔히 엽전치로 표기되고 있지만 청용리에 엽돈골, 갈월리에 엽돈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사진은 엽돈령 정상에서 갈월리 서수원 쪽으로 내려 본 풍경이다. 서수원이라는 지명은 김유신 때부터 이곳에 군대가 주둔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라의 서(西)쪽 국경 지대의 군대(戌)가 주둔하는 곳(院)이라 하여 서술원(西戌院)이라 불렀는데 뒷날 발음하기 좋게 수서원으로 바뀌었다.
 홍계남 장군 전승지인 엽돈령은 안성시 청용면과 충북 진천군 백곡면을 잇는 고개이다. 이곳은 현재 한자어로 개명되어 흔히 엽전치로 표기되고 있지만 청용리에 엽돈골, 갈월리에 엽돈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사진은 엽돈령 정상에서 갈월리 서수원 쪽으로 내려 본 풍경이다. 서수원이라는 지명은 김유신 때부터 이곳에 군대가 주둔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라의 서(西)쪽 국경 지대의 군대(戌)가 주둔하는 곳(院)이라 하여 서술원(西戌院)이라 불렀는데 뒷날 발음하기 좋게 수서원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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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의 설명이 임진왜란 초기에만 머물러 있다. 알고 보니 홍계남 역시 아버지 홍자수, 외사촌 이덕남처럼 임진왜란이 끝나기 전에 생애를 마감했다. 아버지와 외사촌 이덕남이 왜적과 싸우던 중 1592년에 전사한 데 비해 홍계남은 병으로 1597년에 타계한 점이 다를 뿐이다. 그는 이승을 떠날 때 겨우 34세였다. 

홍계남 장군의 임진왜란 당시 활동 전모를 살펴보니

그렇다 하더라도 안내판의 설명은 홍계남의 1592년도 활동만 말하고 있다. 그가 1597년 타계할 때까지 이루어낸 업적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찾아봤다.

'홍계남은 1590년(선조 23)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의 군관으로 선발되어 황윤길·김성일 일행을 따라 일본에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관직으로는 경기도조방장, 충청·경상도의 조방장, 수원판관·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인근의 여러 고을로 전전하며 전공을 세워 첨지(僉知)로 승진됐다.

그가 다른 진에 연락 차 본진을 떠난 사이, 아버지가 왜군을 공격하다 전사했다. 홍계남은 돌아와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의병진의 선두에 서서 높은 곳에 성을 쌓고 적정을 정탐하면서 도처에서 유격전도 펼쳤다.

이듬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전라·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하여 이빈·선거이·송대빈 등과 함께 운봉·남원·진주·구례·경주 등지로 전전하며 전공을 세웠다. 그 뒤 1596년에는 이몽학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홍계남 고루비
 홍계남 고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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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남(洪季男, 1564∼1597)이 임진왜란 직전에 걸쳐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온다. 황윤길과 김성일을 각각 정사와 부사로 한 1590년의 통신사 파견은 전쟁을 앞둔 조선의 정치 상황을 돌아보게 해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의 조선 정치 상황

임진왜란 발발 직전의 조선 정치 상황을 상징하는 사건은 이른바 '정여립의 난'이다. '이른바'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직도 정여립이 과연 반란을 일으키려 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까닭이다. 1589년 10월, 정여립과 대동계가 한강물이 꽁꽁 언 때를 이용해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로 진격하기로 했다는 고발이 조정에 접수되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그 후 3년 동안이나 처벌이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1,00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류성룡 <운암잡록>).

임진왜란 직전 3년 동안 선조와 조정은 성을 쌓거나 군사 훈련을 시키는 등 구체적으로 전쟁에 대비하는 사업을 펼치지 않았다. 그들은 '정여립의 난'에 매달려 여념이 없었다. 조선 조정이 전쟁 대비는 제대로 하지 않고, 임금과 실력자들이 정여립의 난을 둘러싼 권력 다툼에 몰두해 있는 동안 차근차근 침략을 준비해온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홍계남의 아버지 홍자수와 외사촌 이덕남은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지만 마침내 전사했고, 홍계남 본인도 많은 공을 세웠지만 결국 34세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홍계남 고루비가 비각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홍계남 고루비가 비각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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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비는 안성시에서 진천군으로 넘어가는 엽돈령과  더불어 홍계남 전적지 중 가장 찾기 쉬운 곳이다. 27세에 통신사의 군관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아버지 홍자수, 외사촌 이덕남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그 두 사람을 왜적에게 잃는 고통을 겪었고, 본인도 전란의 어려움 끝에 병이 들어 34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홍계남의 생애를 돌이켜보는 일은 후대인의 마음에 짙은 슬픔을 드리운다.

그가 비록 '고언백(高彦伯)· 홍계남이 없으면 경성(서울)의 인심이 의지할 데가 없다(<선조실록>, 1592년 11월 3일)'라는 평가를 얻은 당대의 명장이었지만, 조정이 전쟁을 사전에 막았거나, 제대로 대비를 했더라면 좀 더 편안하게, 더욱 큰 인물로 나라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 아닌가!

전쟁만큼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것은 없다

고루비 앞에서 '전쟁과 가난만큼 사람을 근본적이고 비인간적으로 소외시키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휴전 중인 분단 조국을 살면서 임진왜란 청년 영웅 홍계남의 불우(不遇, 시대를 잘못 만남)를 슬퍼하는 것이다.


태그:#홍계남, #이덕남, #엽돈령, #권응수, #고언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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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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