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내 영화들은 보통 영화 개봉 일주일 전에 언론 시사회를 가진다. 그보다 조금 더 일찍 언론 시사회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지난 28일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박열>은 개봉 2주 전인 지난 13일에 언론 시사회를 가졌다. 그리고 여러 일반 시사회를 개최하며 영화를 일찍 본 관객들의 입소문을 기대한다. 이게 개봉을 앞둔 영화들의 통상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박열>과 같은 날 개봉한 <리얼>(2016)은 개봉을 고작 이틀 앞둔 지난 26일에 언론시사회를 가졌다. 개봉 때까지 '엠바고(뉴스의 보도를 일정 시간 미루는 것)'를 요구하는 할리우드 직배사 영화들은 종종 그렇게 언론 시사회를 열기도 하지만, 한국 영화들은 늦어도 개봉 전주 금요일에는 언론 시사회를 통해 선공개를 한다. 하지만 <리얼>은 관행을 깨고 개봉주 월요일에 되어서야 언론 시사회를 열었고, 이후 엄청난 혹평 세례에 시달리게 된다.

 영화 <리얼> 한 장면

영화 <리얼> 한 장면 ⓒ 코브픽쳐스


애초 <리얼>을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요즘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즉, 유명 배우들을 앞세워 조폭, 카지노, 성적 매력 있는 여성으로 점철된 남자들의 질퍽한 세계를 다루는 그저 그런 '알탕 영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리얼>을 끝까지 보고 나니, <리얼>이 그냥 평범한 '알탕 영화'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래도 김수현의 '허세'로 관객몰이는 성공했을 것이다.

누가 봐도 폭력, 섹스, 마약 등 '조폭 누아르' 색채가 분명한 <리얼>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성공한 조폭 출신 사업가 장태영(김수현 분)은 자아 분열증을 앓고 있다. 그는 정신과 의사 최진기(이성민 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의 인격을 죽이고자 한다. 이와 같은 설정은 오프닝에서 장태영과 최진기의 대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친절히 설명된다. 여기서 관객들은 기존의 알탕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갈 것 같은 <리얼>만의 차별성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부터 진행되는 장면에서는 장태영이 또 다른 장태영과 대립하는 것 외에는 최근 한국 남초 영화에서 줄기차게 등장했던, 익숙한 그림과 문제점들이 이어진다. 조직 폭력배 보스인 장태영은 초호화 카지노를 운영하고 있고, 장태영이 운영하는 카지노를 노리는 암흑가의 대부 조원근(성동일 분)이 나타나 장태영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궁지에 몰린 장태영은 자신을 닮은 의문의 투자자인 또 다른 장태영의 손을 잡고 조원근을 몰아내고자 한다. 장태영의 여자친구 송유화(최진리 분)는 남자들에게 성적 매력과 보호본능을 어필하는 것 외에 특별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 철저히 남초 영화 흥행 공식을 따르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앓고 있는 자아분열은 양념일 뿐이다.

자아분열이 문제가 아니다

'자아분열' 자체는 한국 관객들에게 마냥 어렵고 낯설게만 다가오는 소재는 아니다. 167만 관객을 동원한 <23 아이덴티티>(2016)는 <리얼>보다 자아 분열증을 심도있게 다룬 영화이지만, 관객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러니까 <리얼>이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자아분열'이라는 어려운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가 아니다. 자아분열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과 그 주변을 다루는 방식이다. 두 개의 인격으로 나눠진 장태영의 자아분열 현상까지는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온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스크린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장태영의 망상(혹은 환각)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뿐더러,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리얼>의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영화 <리얼> 한 장면

영화 <리얼> 한 장면 ⓒ 코브픽쳐스


어떻게 보면 <리얼>은 관객들에게 '이해'를 구하고자 만든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애초 이 영화의 시작은 '컬트(탈주류 영화)'였는지 모른다. 실제 <리얼>에는 컬트 영화가 되고자 했던 흔적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두고 '컬트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원래 <리얼> 연출과 각본을 맡았던 이정섭 감독의 하차 이후 현장을 지휘했던 이사랑 감독은 지난 26일 있었던 기자간담회에서 "약간 이상하게 느껴지면서도, 특별하게 다가오는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연출의 변을 밝혔다.

감독의 의도에도 불구, <리얼>은 정말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특별한 영화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한국 상업 영화에서 '자아분열' 소재를 다룬 작품은 흔하지는 않기에 그것만으로도 도전적인 행보로 바라볼 여지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컬트로 평가하기에는 형식, 구조적인 면에서 별반 새롭거나 특별하게 다가오는 구석은 없다. 요즘 영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선호되는 알렉사 XT라는 최고급 카메라를 활용한 화려한 비주얼이 인상적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불필요한 장면들이 눈에 띄고 이미지 과잉으로 치닫게 된다.

자아 분열 혹은 환각 증세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 대신 한류스타 김수현을 위시한 볼거리에만 치중하다 보니 정작 영화 캐릭터나 내용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하고 오락가락 이어지는 장면들 속에 영화는 완전히 길을 잃게 된다. 도대체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엉망진창 흘러가는 영화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김수현?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맡은 바 역할을 해내는 성동일, 이성민, 이경영, 조우진의 훌륭한 연기력? 오직 관객들의 눈요기 용도로 전락한 설리의 연기투혼? "진짜는 무엇이고, 어떻게 진짜를 만들어낼까요?"하는 감독의 진지한 물음에 참담한 웃음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영화. 부디 컬트를 빙자한 망작은 <리얼>이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영화 <리얼> 포스터

영화 <리얼> 포스터 ⓒ 코브픽쳐스



리얼 김수현 이사랑 감독 망작 영화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