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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9일은 6.29선언 30주년을 맞는 날이다.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잡으니까 올해는 선언 이후 딱 한 세대가 흐른 셈이다.

6.29 선언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선언이 발표되자 당시 신문은 이를 그야말로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호외도 나왔다. 선언이 있고나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민주화의 열망이 실현돼서가 아니었다.

당시 다니던 학교 인근에 숙명여자대학교가 있었다. 1980년대는 학생운동이 잦았고, 그래서 대학가 인근에 최루가스가 자욱했다. 때론 불발된 최루탄이 주택가로 날아들곤 했다. 여자대학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중무장한 전투경찰과 검은색 시위진압차량이 등장했다. 어느 날은 최루가스가 너무 심해 수업이 불가능할 지경이었고, 그래서 학교는 학생들을 일찍 귀가시켰던 일도 종종 있었다.

6.29 선언 직전인 10일, 도심에서는 큰 집회가 있었다. 지금은 그 집회를 6.10항쟁이라고 부른다. 그때 학교에서는 3학년을 제외한 1, 2학년은 오전까지만 수업하고 일찍 귀가시켰다. 그때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는 아직도 귀에 선하다.

1987년 6월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웠다.
 1987년 6월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웠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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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대학 가면 데모하지 마라."

그랬으니 6.29 선언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선언이 있고나서 '데모'는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언제 최루가스가 날아들어 눈물 흘렸나 싶었을 정도였다.

때론 그때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6.29 선언 이전이나 이후나 우리나라의 정치적 민주화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대학 가서 데모하지 말라"는 말만 귀에 못이 박히게 했다. 그리고 오로지 대학 진학만이 지상 과제인양 학생들을 다그쳤고, 그래서 1학년 때부터 학교에 밤늦게까지 남아 '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대학생 형들이 데모라도 해야 집에 일찍 가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라디오 음악방송을 들으며 여유를 찾을 수 있었으니, 6.29 선언이 때론 원망스럽기도 했다.

6.29의 정치적 의미, 그리고 그 선언이 있기까지의 과정에 눈뜬 건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였다.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전공했지만 눈 뜸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원래 문학도를 꿈꿨는데 틀어져서 1~2년 동안은 전공에 도무지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러다 학교에서 만난 동기, 선배들과 공부 모임을 하면서 서서히 그 시절의 정치상황에 눈떠 나갔다.

사실 1980년대의 기억은 나쁘지 않다. 학창시절이었고 해서 오히려 그립다. 1980년대를 다룬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그 시절이 생각나 눈물이 핑 돌기도했다. 그러나 그 좋던 시절 이면에 1980년 광주가 있었고, 형제복지원이 있었고, 박종철-이한열 열사가 있었다. 그래서 그때를 돌이켜 보면 한편으로는 그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를 생각하며 몸서리 치곤 한다.

6.29 선언 30년, 다시 원점으로 

6월 29일 직선제 개헌 수용 선언을 발표하는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
 6월 29일 직선제 개헌 수용 선언을 발표하는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
ⓒ MBC 뉴스데스크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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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 하면 얼른 대통령 직선제가 떠오른다. 그러나 6.29 선언엔 지금 봐도 신선한 항목들이 보인다. 6.29 선언의 뼈대는 아래 8가지다.

1.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2.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3.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사범들의 석방
4.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5. 자유언론의 창달
6.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7.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8.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6.29 선언 뒤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하긴 했지만,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됐고 평화적으로 정권이 이양됐다. 김대중 사면복권도 이뤄졌다. 비록 김영삼과 단일화에 실패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3위에 그치며 위기를 맞았지만 말이다. 다음 해 치러진 총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평화민주당은 제1야당으로 우뚝섰다. 참으로 엄청난 진전이라고 본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고 본다. 우리 사회는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 9년을 거치면서 역사의 퇴행을 목격했다. 그리고 6.29 선언 30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사회는 언론의 자유와 기본인권을 다시금 고민하는 처지다.

민주주의를 해서 기쁘다, 과연 그랬을까?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의 6.29 선언이 있던 날 서울 북창동의 한 다방은 '오늘은 기쁜 날'이라는 환영 대자보를 유리창에 붙이고 손님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대접하고 있다.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의 6.29 선언이 있던 날 서울 북창동의 한 다방은 '오늘은 기쁜 날'이라는 환영 대자보를 유리창에 붙이고 손님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대접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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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저마다 답은 다르겠지만 근본적으로 '민주주의'가 각자의 삶 속에 스미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1987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학교에서는 그저 입시 공부만 강요했다. 그러나 몇몇 교사들은 조심스럽게 민주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학생들과 나누기도 했다. 특히 국어 교사가 기억에 남는다. 6.29 선언 다음 날 그 교사는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민주주의를 한다니 기쁘다."

그러면서 그동안 민주화 운동을 바라봤던 소회들을 과감히 풀어놨다. 그런데 대학입시 공부에 한창이던 고3 때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그 교사는 아들을 뒀는데 국내 최고 명문대학 법대에 진학시키겠다고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설마했다. 마침 그분의 부인이 TV에 출연해 자식을 명문대에 입학시킨 비결을 소개하며 가혹행위를 미화한 걸 봤다. 그분이나 부인은 아들을 명문대 법대에 진학시킨 걸 자식을 위한 최선의 선물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 사회라고 민주적이지는 않았다고 본다. 선배들이 동문회에서 후배들에게 술을 강권하거나, 다른 모욕적인 행위를 거리낌 없이 행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나 역시 한번은 동문끼리 농구 시합을 한다고 주말에 학교에 모여야 한다고 했다. 주말에 학교에 나오는 일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선배가 나오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몸은 심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급기야 85학번 선배가 제대로 뛰지 않는다고 내 가슴을 향해 농구공을 집어 던졌다.

맞는 순간 큰 충격이 느껴졌다. 장난삼아 던지는 게 아님을 직감했다. 아무리 선배라도 이건 아니겠다 싶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선배는 내게 와서 사과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바로 1년 윗선배가 오더니 선배한테 그러는게 아니라고 했다. 더욱 어이가 없어 더 이상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이번엔 84학번 선배가 나서서 '야 저 XX 다시는 아는 척 하지마'라고 했다.

이 선배들이 꼰대들이어서 그랬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민주화 운동시절의 무용담을 후배들에게 늘어놓기 바빴다. 그런 사람들이 후배 앞에서 '갑질'을 하는 모습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1987년 7월 16일, 6월 항쟁의 승리로 석방 직후 행진하고 있는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1987년 7월 16일, 6월 항쟁의 승리로 석방 직후 행진하고 있는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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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숱하게 겪었다. 직장은 더했다. 사실 직장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사각지대 아닐까? 사무직·생산직 할 것 없이 군대 조직을 방불케 하는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가진 나라는 한국말고는 없다고 생각한다.

1987년의 민주화는 제도적 민주화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제도상의 민주주의는 달성했을지 모르겠으나 각자 삶의 자리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산시키지는 못했다. 김대중-노무현 민주정권 10년을 지냈음에도 말이다. 생활의 민주화의 실패가 역사의 퇴행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유롭게 치러진 선거에서, 민주적으로 집권한 건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6.29 선언 30주년을 맞는 지금, 이제 생활의 민주화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민주주의는 선거해서 정치인을 뽑는 행위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의 출발점은 구성원 간의 상호 존중이라고 본다. 나이·성별·지역·성 정체성을 초월해서 구성원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이런 전제 없이 제도적 장치에만 골몰하면 언제고 우리는 또 다시 퇴행을 경험하고, 인권과 언론의 자유를 고민할 것이다.

1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해 ‘6월항쟁군’ 복장을 한 시민들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10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해 ‘6월항쟁군’ 복장을 한 시민들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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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6.29선언, #김대중,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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