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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4. 3. 서울. 한국보육원 원생들이 해외로 입양되어 떠나기 직전에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NARA
'고아 수출대국' 불명예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이는 여성과 어린이들이다. 그 가운데도 어린이가 받았던 고통은 더욱 컸을 것이다. 젊은 남성들이 대부분 전쟁터로 불려 가면 여성들은 집안에서 그 몫까지 대신해야 했다. 요즘과 같이 기계화가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농사를 짓거나 땔감을 마련하는 등의 그 수고로움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연일 전투기에서 쏟아지는 폭탄과 무시로 펑펑 쏘아대는 포화 속에 부모들은 아이를 도저히 키울 수 없어 몰래 고아원 앞에다 버리기도 했다. 또는 부모가 전란으로 돌아가서 어쩔 수 없이 고아가 된 아이들도 부지기수였다.

폭탄·포탄·총알에 쫓기는, 생사의 기로에 놓인 전쟁터에서 어떤 어머니는 당신이 기르는 것보다 차라리 아이의 장래를 위해 해외입양이 되도록 파출소나 고아원 앞에 아이를 버리기도 했다. 내가 잘 아는 어느 독립지사 후손은 먹을 게 없어서 부모로부터 떨어져 고아원에서 자라기도 했다. 그 무렵 고아원에서는 이른 새벽에 포대기에 싸인, 버려진 아이를 거두는 일들은 매우 흔했다.

오래전 한 TV프로그램에서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로 해외에 입양된 이가 성인이 돼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찾는 사연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그가 영어로 한 말을 아나운서가 우리말로 번역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경찰서 앞에서 슬그머니 내 손을 놓고 사라졌어요."

그는 그 말을 하고서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흐느꼈다. 그새 20여 년이 지난 그즈음 그는 그때의 어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한다면서, 비록 자기를 버렸지만 너무나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한 방청객을 숙연케 했을 뿐더러 또한 많은 시청자들도 울렸을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 그런 일들이 매우 흔했다.
1950. 11. 2. 장소 미상. 길거리에 버려진 어린 아이들을 트럭에 실어 고아원으로 데려가고 있다. ⓒ NARA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

하지만 이와는 다른 어머니도 있었다. 내가 1971년 서울 오산중학교 1-12반 담임을 맡았을 때다. 그때 한 학생은 피부색이 달랐다. 어느 날 그 학생의 어머니가 찾아와 담임인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낳은 자식 차마 내 손으로 뗄 수 없어 입때까지(여태까지) 미련스럽게 주리끼고(곁에 두고) 있어요."

그 어머니는 당신이 낳은 아이를 차마 자신의 손으로 해외 입양시킬 수 없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줄곧 기른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그 어머니는 미군부대 언저리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 어머니의 거룩한 본능, 모성애에 감동했다.

교단 선배 한 분은 한국전쟁 전후로 철도국 보선소(철로 유지·보수 관련 부서)에 근무했다. 그런데 당시 철로 터널 안을 지나면 영아의 시신을 자주 발견했다는데, 그 사인에 의문을 제기했다.

아무튼 그 시절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고아원이 요즘 요양원처럼 흔했다. 도시에는 아침저녁 끼니때마다 거지 아이들이 깡통을 들고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서 "밥 좀 주세요"라고 대문을 두들겼다.
1951. 3. 1. 전주. 미군 부대에서 지내는 두 소년, 그 무렵에는 이들을 ‘하우스보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대부분 해외로 입양되었다. ⓒ NARA
그 많은 고아들 가운데 일부는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양육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들은 부대에서 미군들의 귀여움을 듬뿍받으며 자라다가 미국 등 해외로 입양돼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 대상이 되곤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 몇 위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아 수출대국'이라는 불명예도 안고 있었다. 한국전쟁 여파로 생겨난 고아 해외 입양 붐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이번 7회에서는 '전쟁과 어린이'라는 주제로 주로 고아원의 아이들 사진을 모아봤다. 이 사진들이 한국전쟁의 비망록으로, 겨레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으면 좋겠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포토샵을 하지 않고 스캔한 원본 그대로 게재합니다.)
1951. 3. 22. 부산의 한 고아원에서 여러 어린이들이 한 방에서 옹기종기 잠을 청하고 있다. ⓒ NARA
1950. 11. 3. 장소 미상. 고아원의 한 보모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 ⓒ NARA
장소 미상. 한 고아원 어린이들이 합동생일잔치에 앞서 애국가가 울리자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다. ⓒ NARA
b105 1956. 5. 18. 미국에 입양된 한국전쟁 고아들이 디즈니랜드 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NARA
1952. 8. 3. 경기 부평. 한 고아원 원생들이 구제품을 나눠줄 미군들이 오자 환영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 NARA
서울. 한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원생들이 외국 구호기관으로부터 보내온 구호품 선물을 받고 있다. ⓒ NARA
1950. 10. 29. 서울 거리의 어린이 거지들. ⓒ NARA
날짜 미상. 포항. 유엔군 병사가 고아원 원생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고 있다. ⓒ NARA
1951. 10. 26. 부산. 전쟁 중이지만 어린이의 티 없는 웃음. ⓒ NARA
1951. 11. 18. 장소 미상. 한 시골 초가집 양지바른 처마 밑의 두 소년. 어려운 가운데도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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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NAR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NAR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박도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시중 서점에서 품절되었던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5쇄가 막 출시됐습니다. 이 책은 원로작가 김원일, 문순태, 이호철, 전상국 선생의 한국전쟁 체험담과 제가 NARA에서 입수한 사진 100장면으로 '눈빛출판사'에서 정성껏 엮어 만든 책입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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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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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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