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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7. 29. 소도 사람도 힘든 피란길. ⓒ NARA
NARA의 한국전쟁 사진들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NARA) 수장고 내부는 온통 자료상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자료상자들 가운데는 한국 관련 자료도 무척 많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분류기호나 상자 번호를 모르면 '남대문에서 김 서방 찾기'처럼 헤맬 수밖에 없다. 다행히 재미동포 박유종 선생을 비롯한 주태상·이선옥 등 자원봉사자들이 그런 절차를 매끄럽게 처리해줘서 나는 사진자료를 검색하고, 스캔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사진 자료 대부분은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전과를 자랑하거나 당시 가난한 한국인을 도와주는 그런 사진들이었다. 나의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을 위해서는 그런 장면 입수도 다소 필요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 복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사진 이미지는 전쟁의 참상과 전란 속에서 신음했고, 고통받았던 백성들의 적나라한 모습일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눈빛이 사진 뒷면까지 뚫을 정도로 자료상자 속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검색했다. 대체로 한 상자에는 200~300매 정도의 사진이 갈무리돼 있었다. 그 가운데 내 눈에 드는, 한국전쟁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에 적합한 사진은 고작 한두 컷에 그칠 때도 있었다.

2004년 2월 11일 검색한 RG 186 상자에서는 포화(砲火)에 쫓기는 피란민들과 그들이 다리 아래 움집에서 피란봇짐을 쌓아두고 임시 거처하는 등의 사진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사진을 보자 그 장면이 너무나 익숙하고 기억에 뚜렷했다. 그래서 그 이미지 속에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또는 잘 아는 이웃사람들의 얼굴이 나오지 않을까 더욱 뚫어지게 살펴보곤 했다.
1950. 8. 24. 낙동강 유역의 피란민 행렬로 가재도구를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피란하고 있다. ⓒ NARA
지워지지 않은 기억들

나는 그 사진 이미지를 보자 한국전쟁 당시의 일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새록새록 떠올랐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나는 여섯살 난 소년이었다. 그새 60여 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기억들은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그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산에서 살았고, 나와 바로 밑 여동생(박하도)은 구미 할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아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외아들이 신접살림이 난데다가 손자손녀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나자 위로 두 남매는 당신들이 대신 길러주고자 슬하에 둔 모양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인민군은 쓰나미처럼 남으로 밀고 내려왔다. 1950년 7월 하순에는 인민군이 경상도 진주, 김천, 상주, 함창, 영덕에 이르는 선까지 남하했다. 그들은 8월 15일 내로 부산까지 밀어붙인다고 장담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는 개전 초부터 백성들에게 전황을 사실대로 알려주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고관들은 자기들만 몰래 도망가기 바빴다. 꼭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 같았고, 2014년 세월호 선장 꼴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반 백성들의  피란 행렬은 인민군의 진주 직전이거나, 아니면 인민군이 진주한 다음에야 매우 화급하게 쫓기듯 살던 집을 뛰어나오곤 했다.

당시 서울시민 대부분은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믿고,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접근한 줄도 모른 채 지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한강다리가 끊어지자 서울시민들은 꼼짝달싹하지 못한 채 인공치하 90여 일을 보냈다. 9.28 유엔군 수복 후 인공치하 서울시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부역혐의로 군경이나 우익 청년단원에게 미아리 등지로 끌려가 처형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1950. 10. 서울 수복 후 군경이나 우익 청년단원들이 인민군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고 있다. ⓒ NARA/이도영
그 무렵 우리 가족은 구미면(현 구미시) 원평동 오거리 장터 마을에서 살았다. 7월 하순 어느 날, 북으로부터 피란민의 행렬이 꾸역꾸역 쏟아져 내려왔다. 구미 북쪽인 아포 쪽에서 '쿵쿵' 쏘아대는 인민군의 대포 소리, '따다다' 총소리와 탱크의 캐더필러 구르는 소리, 그리고 포탄이 터지면서 나는 진동과 폭발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그제야 우리 마을사람들은 매캐한 화약 냄새를 맡으면서 허겁지겁 피란봇짐을 쌌다.

첫째, 둘째 고모 댁도 우리 집과 같은 장터 마을에 살았다. 그런데 우리 집에만 소가 있었다. 그래서 세 가구의 피란 짐을 모두 우리 집 소달구지에 실었다. 그때 나와 동갑인 우리 집 암소는 전란으로 끓인 쇠죽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네 가구 피란봇짐을 모두 실은 달구지를 끌고 다닌다고 엄청 고생했다.

우리 집은 선산경찰서(당시 구미 소재)와 100여 미터 거리로 바로 앞집 건넌방에는 신혼 순경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 순경은 전 날 출근한 뒤 집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군대를 따라 허겁지겁 남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홀로 남은 부인은 피란봇짐을 이고 징징 울면서 우리 집으로 와서 통사정하기에 할머니는 불쌍하다고 받아줬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 피란행렬은 모두 네 가구로 식솔이 열다섯이었다.

이미 남쪽으로 가는 모든 열차는 끊긴 데다가, 남으로 가는 신작로조차도 피란민과 우마차로 가득 찼다. 그래서 우리 집 피란 일행은 금오산 오른 편 골짜기인 선기동 윗마을인 덤바우로 갔다. 하지만 북쪽에서 워낙 많은 피란민들이 한꺼번에 갑자기 구미 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몰려들자 덤바우 마을은 먼저 온 피란민들이 이미 빈 방들을 죄다 차지하고 있었다.
1950. 7. 29. 안동. 안동군민들이 가재도구를 달구지에 싣거나 남부여대로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똥구멍을 후벼 파다

우리 집 피란민 일행은 하는 수 없이 금오산 오른편 선기동 냇가에다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열다섯 식구 가운데 아이들은 절반이었고, 내 또래가 셋이었다. 어른들은 난생처음 당하는 피란생활로 힘들었을 테지만 우리 조무래기들은 피란이 뭔지도 모른 채, 마치 소풍을 나온 듯 시냇가에서 피라미를 잡거나 밭의 감자를 캐내 구워 먹는 등 낮 시간을 마냥 즐겁게 보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꼭 아이 울음소리 같은 늑대 울음소리에 무서워 벌벌 떨었다. 실제로 그 당시에는 늑대들이 산야에 득시글거려 어른들은 아이들을 한가운데 몰아 자게 한 뒤 사방으로 돌아누워 잤다. 그래도 불안하여 할아버지나 고모부는 행여 아이들이 늑대에게 물려갈까 봐 모닥불을 피우며 밤을 샜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의 피란민 가운데는 어린아이를 늑대에게 잃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밭에 감자가 떨어지자 메뚜기나 방아깨비를 잡아 냇가에서 구워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허기를 메울 수 없자 고종형과 누나를 따라 덕뱅이 마을로 가서 감나무에서 떨어진 풋감을 잔뜩 주워 먹었다. 아이들이 풋감을 많이 먹은 다음 날은 변비로 똥이 나오지 않아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면 어른들은 꼬챙이로 똥구멍을 후벼 팠다. 그때는 똥구멍이 너무 아파 풋감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또 배가 고파오면 뒷일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감나무 아래에 떨어진 풋감들을 잽싸게 주워 먹었다.
1950. 8. 24. 낙동강 유역. 피란길에 한 어머니가 뙤약볕을 가리며 잠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 NARA
복실이

할아버지나 고모부는 아이들 보호 못지않게 미혼인 고모나 사촌 누나의 보호에 무척 신경을 썼다. 군인들에게 끌려가 능욕을 당할 염려 때문이었다. 고모나 사촌 누나는 피란 내도록 허름한 몸뻬(왜바지) 차림에 수건을 써서 나이든 여자로 위장케 했다.

이따금 밤이면 전지를 켜 들고 총을 멘, 2인 1조의 잿빛 캡모자를 쓴 두 청년이 피란민 임시 거처로 찾아왔다. 그 순간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전지불로 사람의 얼굴을 일일이 비추며 혹 국군이나 경찰이 숨어있는지 살폈다. 어느 하룻밤 그들이 시냇가 우리 가족 임시 거처로 접근하자 피란길에 같이 따라나선 둘째 고모네 복실이가 그들에게 마구 짖었다. 그러자 캡모자를 쓴 청년이 복실이에게 소리쳤다.

"이 쌍놈의 개새끼! 날래 꺼디디 못해!"

그러면서 그 청년은 어깨에 메고 온 소총으로 사격자세를 취하면서 개에게 위협했다. 그래도 복실이는 물러나지 않고 더욱 거세게 물듯이 덤비면서 마구 짖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복실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깨갱!"

그 순간 복실이는 비명과 함께 금세 어둠 속에 사라졌다. 날이 샌 뒤 그 언저리를 살펴보니까 자갈터 마을로 복실이의 핏자국 방울방울 보였다. 그 핏자국은 점차 작아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고종형과 누나는 "복실아!"라고 외치며 핏자국 방향의 마을인 자갈 터와 수점마을 등을 한나절 찾아 헤맸지만 끝내 복실이의 행적은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 날 한밤중에 복실이가 절름절름 절뚝거리면서 임시 거처로 찾아와 낑낑거렸다. 우리 집안 피란민 일행 모두는 복실이를 번갈아 안아주면서 반겼다. 그의 뒷다리는 총알이 스쳐간 듯 그새 피로 엉겨 있었다. 둘째 고모는 홑이불을 찢어서 복실이의 뒷다리 상처를 동여매며 말했다.

"아이고, 기특해라 우리 복실이. 이래 상처가 심한 데도 절뚝이며 주인을 찾아왔구나."

복실은 계속 낑낑거리며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었다. 우리 집 소도 낮이면 할아버지와 고모부가 번갈아 가며 금오산 기슭 숲에다가 숨겼다. 군인들에게 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전쟁으로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도 무척 힘들었던 피란생활이었다.

(* 이번 회는 1950년 한국전쟁 초기의 피란 장면 사진으로 구성해봤습니다.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포토샵을 하지 않고 스캔한 원본 그대로 게재합니다.)
1950. 8. 11. 당시 피란민들의 임시 거처였던 길가의 움막. ⓒ NARA
1950. 8. 23. 경남 함안. 한 아낙네가 피란봇짐을 머리에 이고, 아이는 업고, 또 한 아이는 앞에 세우고 피란 열차표를 사기 위하여 역 광장까지 늘어선 줄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 NARA
1950. 8. 24. 낙동강 유역.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진 남부여대의 피란민 행렬. ⓒ NARA
1950. 9. 13. 마산. 낙도로 떠나는 LST 함정에 타고자 몰려든 피란민들. ⓒ NARA
1951. 9. 11. 국군의 통제 아래 주민들이 피란하고 있다. ⓒ NARA
1951. 8. 20. 마곡리. 한 소년이 소를 몰고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1950. 7. 29. 경북 영덕. 한 가족이 포화에 쫓기며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1950. 8. 8. 당시 피란민들의 최상의 보금자리였던 다리 아래 움집.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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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워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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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NARA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NARA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NARA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NARA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NARA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박도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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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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