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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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이어진 기사.
죽도록 맞으며 물고문까지 당했지만, 자유를 향한 소년 임용남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의 마지막 탈출은 몇 달 뒤인 1966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바다에 물이 빠지는 시기와 수심이 얕은 곳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탈출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 탈출은 그에게 수영을 가르쳐 준 친구와 함께 했다. 소년 임용남이 수영대회에서 6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둘 때 1등을 한 친구다. 탈출에 성공한 뒤 둘은 헤어졌다. 친구는 고향 군산으로 갔고, 소년 임용남은 무작정 서울 동대문 쪽으로 향했다. 서울로 간 이유는 두 번이나 붙잡힌 수원에서 되도록 멀리 가고 싶어서다.
선감학원을 탈출한 소년 임용남은, 엄마를 찾아 헤매던 12살짜리 코흘리개가 더는 아니었다. 만 16세, 우리 나이로 17살 정도가 됐으니 제법 청년티가 나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는데, 외모보다 더 많이 변한 건 그의 내면이었다.
"그때부터 어쩐 일인지 눈물이 나지를 않았어요.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증오로 변해서, 만나게 되면 복수해야겠다고 작심하는, 정말 독한 사람으로 변한 거예요. 물론 엄마를 찾을 마음도 없어졌고요. 선감도에서 겪은 그 모진 일이 저를 그렇게 만든 거죠." 탈출해서 자유를 찾기는 했지만, 서울에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신분이 불분명해 취직할 수도 없었고 신분 증명이 필요 없는 허드렛일을 하려 해도 배운 기술이 없어 여의치 않았다. 그가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거지가 되어 한뎃잠을 자며 밥 얻으러 다니는 것이었는데, 다시 그 생활을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깡패를 하든지 소매치기를 하든지 선택해야 했어요. 집도 절도 없는 고아들이 쉽게 빠지는 유혹이죠. 저는 사람 두들겨 패는 깡패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소매치기를 시작하게 됐는데, 제가 배짱이 좋고 손기술도 있었나 봐요." 소매치기 몇 년만에 임용남은 그 계통에서는 꽤 알아주는 '꾼'이 되었다. 집념이 강하고 타고난 손기술이 좋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연습 덕분이기도 하다. 면도칼로 신사복 찢는 연습만 수천 번을 했다.
그에게는 독종이라는 소문도 따라다녔다. 선감학원에서 당한 지독한 고통이 그의 눈물을 말린 탓이다. 소매치기하다 형사에게 붙잡혀 다리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고도, 머리에 칼을 맞아 생살이 떨어지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음 한번 내지 않을 정도로 그는 독했다.
뒷골목 소매치기 인생이 목사로 변신하기까지
소매치기 인생 5년 차로 접어든 어느 날 그의 인생을 뿌리부터 뒤바꿔줄 사건이 벌어졌다.
"3대째 깡패를 하는 집안 아들이었어요. 할아버지, 아버지도 깡패인 거죠. 나이는 저보다 4~5살 많았고요. 영화 보러 혼자 극장에 갔다가 그 패거리를 만났어요. 저를 극장 뒤편으로 끌고 가더니 '돈 좀 나눠쓰자'고. 싫다고 했더니 주먹이 날아왔어요. 당시 저는 다리에 칼을 하나 차고 다녔어요. 제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찌르겠다는 각오로 살 때였거든요. 그 칼로 그놈을 찔렀어요." 이 일로 임용남은 경찰과 깡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경찰에 붙잡혔다. 그를 면회 온 깡패들은 '창자에 구멍이 3개나 났으니, 나오면 우리가 죽인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야 그 깡패를 3번이나 찔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경찰서에서 임용남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옛 동료를 만난 것이다. 그를 통해 임용남은 그가 살던 곳이 경기도 양평이었다는 사실, 어머니가 떠나고 난 뒤에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 등 자기 일가의 내력을 알게 된다. 또한, 자기를 버린 어머니도 그의 도움으로 만나게 된다.
"1년 6개월 형을 마치고 나와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저는 어머니가 저를 만나면 무조건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죽이려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하다 말고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해야 하는데 그 용서라는 게 참 어렵고도 어려운 것이었어요." 그러나 용남씨는 결국 어머니를 용서했다. 신앙의 도움이 컸는데, 그 튼실한 신앙의 싹은 감옥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성탄절이었는데 어떤 목사가 신자들을 데리고 와서 노래를 하는 거예요. 귀 기울여 들어봤더니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이 말 듣고는 코웃음을 쳤어요. 생각해 보세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제가 신이 있다고 믿었겠어요? 그래서 속으로 '주려면 수천만 원을 주지 고작 9원이 뭐야!' 이런 식으로 조롱했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마음이 끌리는 거예요. 믿으면 정말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고요. 그래서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지요."23살에 감옥에서 나온 용남씨는 어둠의 세계와 완전히 발을 끊었다. 그 대신 미친 듯이 성경을 공부해 우여곡절 끝에 신학대학에 들어가 전도사가 되었다. 여의도 대규모 기독교 집회에서 만난 부인과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었고 예쁜 딸도 얻었다. 38살 무렵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제 딸을 목숨 걸고 사랑하게 해 주세요"
딸을 얻고 난 뒤에 용남씨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딸을 제발 목숨 걸고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어린 시절 학대를 받고 자란 자신이 행여나 자기 딸에게 그것을 돌려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도가 통했는지 딸을 정말 애지중지 키웠어요. 기도대로 목숨 걸고 사랑한 것이죠. 제 인생을 통틀어 참 잘한 일을 꼽으라면 바로 이거예요. 딸을 사랑한 것. 받은 대로 돌려준다고 제 딸도 자기 딸한테 아주 잘합니다. 저한테는 손녀딸이죠." 임용남 목사가 성장기에 겪은 일은 사실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죽지 않고 살아서 지난 일을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틱'했다. 그의 인생 여정은 긴 독재의 터널을 지나온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선감학원은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 세워져 1982년까지 존재했다. 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게 다 박정희 독재 정권 때 일어난 일이예요. 군사 쿠데타 이후에 가장 많이 끌려갔으니까요. 국가 폭력인 거예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국가가,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선감학원에서 죽은 아이들이 묻힌 공동묘지(산감묘역)에 와서 사과를 해야 합니다. 박정희, 육영수, 박근혜 모두 비극적인데 너무 많은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 그럴 수 있어요. 선감학원도 그렇고 뻑 하면 남산으로 끌고 가서 죄 없는 사람 죽인 것도 그렇고. 성경에 보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하나님한테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게 나와요. 그 소리 듣고 하나님이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한테) 벌을 주었을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