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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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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살구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살구꽃이 피면 생각나는 제 고향의 TV문학관입니다. 거짓말 같은 실화지요. -

고향집 장독대 옆 커다란 돌멩이 위에는 정화수를 떠놓은 사기대접이 항상 놓여있었다. 그리고 돌멩이의 군데군데 할머니의 한 맺힌 눈물 같은 촛농 흐른 자국이 선명했다. 산꿩이 알을 품는 계절이 오면 장독대의 살구나무에도 꽃이 지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평소 헤픈 웃음 때문에 할머니께 '소갈딱지 없는 년'이라는 타박을 받아오던 금숙이 누나는 이때부터 아예 우리 집 장독대의 살구나무 밑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금숙이 누나에게는 필연적으로 신 살구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릿하고도 슬픈 사연이 있었으니.

유년 시절, 멀리 성당의 스러진 종탑에서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울리자 어둠을 짊어진 군용트럭 한 대가 뜬금없이 나타나 누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른들 말로는 누나의 아버지가 돈 많은 홀아비 영감님에게 딸을 팔아넘겼다고 했다. 워낙에 곰살맞게 대해주던 누나가 시집을 가니 서운하기도 했지만 돈 많은 영감님한테 시집을 간다니 뭔지는 모르지만 어린 마음에도 좋았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군용트럭을 한참이나 따라가다가 숨이 턱에 차서 신작로 한복판에 주저앉고 말았는데 군용트럭 꽁무니에서 나오는 휘발유 냄새가 그렇게 상큼할 수가 없었다.

군용트럭 위에서 명주저고리 고름을 입에 물고 시집을 갔던지 팔려갔던지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았던 누나가 두어 칸 초가집 탱자나무 심어져 있는 돌담 위에 구렁이 똬리를 틀고 오수를 즐기던 어느 날 내 앞에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

시절과 연이 분명히 맞아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감님께서 골골 앓더니 숟가락을 내던지며 숨쉬기를 그만두더란다. 그 집 자손들 참으로 인정머리 없고 모질기도 하지, 아버지가 죽고 나니 누나 같은 사람은 이제 그만 필요 없다며 얼룩빼기 황소가 끄는 달구지에 쌀 몇 가마 실려서 보내왔다. 그리고는 누나에게 황소도 달구지도 돌려보낼 것 없이 자기네 집 근처는 얼씬도 말라며 신신당부하더란다.

이렇게 소박 아닌 소박을 맞고 돌아온 누나가 기죽지 않고 생글거리며 누에 먹일 뽕이파리 따고 봄나물 뜯으며 살구가 익어갈 즈음, 시디신 살구를 한 움큼씩 따서 먹는데 살구를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배가 남산만큼 불렀다.

다음 해 봄, 누나네 집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더니 들것에 실려나가는 뭐가 있었다. 그 뒤로 누나는 아무나 보고 해설픈 웃음을 흘리며 살구꽃이 떨어지기만 하면 우리 집 장독대 와서 살다시피 했는데 살구나무 아래서 온종일 놀다가 해질녘에 돌아가고는 했다.

세월은 흐르고 농사짓기 싫다며 야반도주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유학을 왔고 방학 때면 어김없이 고향의 할머니 품에 가서 안겼는데 그럴 적마다 누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런 누나가 엊그저께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작년 벌초 때 내 뒤를 따라다니며 연신 잔기침을 토해내던 누나, 여명이 얼마 안 남은 줄 짐작했지만 가슴 한복판이 울렁거리며 느끼는 토악질은 왜일까? 언젠가 누나의 말이 이랬다.

"내가 소박맞던 날, 달구지 끌고 왔던 얼룩빼기 황소 팔아서 산 일곱 마지기 논으로 다들 잘 먹고 잘 살았지.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라겠냐?"

술 한 잔에 회한을 담아 슬픈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누나.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세상을 똑바로 보려 하지만 뿌옇게만 보이는 세상이 누나의 말대로 다 부질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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