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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최초로 승리를 획득하는 옥포 해전. 위의 지도는 이때 조선 수군이 이동하고, 싸우고, 승리한 지점의 위치를 시간 순서대로 표시한 것이다. 1차 진군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이후에도 조선 수군의 출전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최초로 승리를 획득하는 옥포 해전. 위의 지도는 이때 조선 수군이 이동하고, 싸우고, 승리한 지점의 위치를 시간 순서대로 표시한 것이다. 1차 진군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이후에도 조선 수군의 출전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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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옥포 앞바다에서 처음으로 이긴다. 1592년 5월 7일의 이 옥포 해전은 '최초의 승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거제도 옥포에는 '옥포 해전 기념 공원'도 세워져 있고, 공원 안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사당은 물론 현대에 세운 기념탑, 조각, 정자, 추모단 등 여러가지 볼 만한 것들도 많다.

옥포 해전을 하루에 한 번만 싸운 전투로 아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옥포에서 아침에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그날 오후는 물론 그 다음날에도 왜적을 추격하여 격파한다. 옥포 대첩은 흔히 아는 것보다 더 길고, 크고, 통쾌한 승전이었던 것이다(관련 기사 : 임진왜란 최초 승리 '옥포 대첩' 이렇게 전개됐다).

옥포 대첩비 (거제도 '옥포 대첩 기념 공원' 안)
 옥포 대첩비 (거제도 '옥포 대첩 기념 공원' 안)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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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옥포서 전투, 오후엔 합포에서 전투

5월 7일, 옥포에서 왜선들을 대파한 이순신은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앞바다로 전선들을 옮긴다. 이순신은 군사들을 시켜 나무와 물을 구하는 등 밤을 보낼 준비에 들어간다. 그때(오후 4시) 그리 멀지 않은 바다에 적의 큰 배 다섯 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척후의 보고가 들어온다.

아군은 급히 추격한다. 합포(경남 마산) 앞바다로 도주한 적은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망친다. 사도 첨사 김완, 방답 첨사 이순신, 광양 현감 어영담이 각각 큰 배를 한 척씩 깨뜨리고, 방답에서 귀양살이 중인 전 첨사 이응화도 작은 배 한 척을 격파한다. 군관 변존서, 송희립, 김효성, 이설도 힘을 합쳐 큰 배 한 척을 부순다. 적선 다섯 척을 남김없이 모두 깨뜨려 불태워버린 연합 수군은 남포(창원시 구산면 난포리) 앞바다로 내려와 진을 치고 밤을 보낸다.

다음날에는 적진포에서 왜적을 대파

다음날 8일 이른 아침, 진해 고리량(창원시 구산면 구복리 앞바다)에 왜적의 전함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아군은 즉시 출동하여 고리량 일원의 섬들을 수색한다. 적선을 발견하지 못한 아군은 돼지섬이라 불리는 저도를 지나 적진포까지 간다. 적선들이 새벽에 고리량에 있었다면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적진포 어귀에 13척의 크고 작은 일본 전선이 정박해 있다. 왜적들은 그곳에서도 노략질 중이었는데, 아군 전선의 규모를 보고는 겁을 먹고 산으로 도망친다. 이순신의 장계 <옥포 파왜병 장>에는 적진포 싸움의 전과가 장수 개인별로 보고되어 있다.

낙안 군수 신호, 순천 대장 유섭 : 큰 배 한 척
신호 예하의 급제 박영남, 보인 김봉수 : 큰 배 한 척
보성 군수 김득광 : 큰 배 한 척
방답 첨사 이순신 : 큰 배 한 척
녹도 만호 정운 : 큰 배 한 척
사도 첨사 김완 : 큰 배 한 척
군관 이봉수 : 큰 배 한 척
군관 송희립, 전 봉사 이설 : 큰 배 두 척
귀양살이 중이던 전 봉사 주몽룡 : 중간 배 한 척
군관 송한련 : 중간 배 한 척

옥포대첩 때 이순신과 함께 활약한 송희립이 제향되고 있는 고흥 서동사. 이곳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송희립의 형 송대립도 함께 모시고 있다.
 옥포대첩 때 이순신과 함께 활약한 송희립이 제향되고 있는 고흥 서동사. 이곳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송희립의 형 송대립도 함께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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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적을 격파한 후 수군들은 그제야 아침밥을 먹는다. 그때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향화인(向化人) 이신동(李信同)이 우리 수군을 발견하고는 어린 아이를 등에 입은 채 울부짖으면서 산에서 내려온다. 이순신은 협선을 보내어 이신동을 대장선으로 실어 온다. 이순신이 직접 그에게 일본군들의 소행에 대해 묻는다.

"네가 겪은 일을 말해보아라."

이신동이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채로 횡설수설을 하듯이 말한다.

"왜적들이 어제 적진포로 몰려 왔습니다. 적들은 민가에서 닥치는 대로 재물을 빼앗아서는 소와 말로 자기들 배에 옮겨 실었습니다. 그리고는 초저녁부터 소를 잡아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불렀습니다. 모두 우리나라 노래였습니다. 오늘 아침이 밝자 적들은 반은 남아서 배를 지키고, 다른 반은 뭍으로 올라와 고성 쪽으로 갔습니다. 소인의 늙은 어미와 처자식들은 적이 나타났을 때 그만 놀라서 숨을 곳을 잃었는데, 그 후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이순신은 그가 다시 포로로 끌려갈까 걱정한다.

"우리가 너를 지켜주겠다. 너는 배에 타고 따라 가자."

그러자 이신동이 대답한다.

"장군의 은혜를 어찌 갚겠습니까. 다만 노모와 처자를 찾아야 하니 따뜻하신 마음을 따를 수가 없을 뿐입니다."

이신동이 줄곧 울면서 배에서 내려 뭍으로 돌아간다. 이 광경을 보던 장졸들은 가슴에 한결같이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올라 당장 부산, 가덕, 천성 등지의 왜적들을 섬멸하러 가자고 외친다. 장졸들의 기세는 오히려 이순신이 말려야 할 만큼 드높았다.

정운을 제향하는 고흥 쌍충사의 사당. 이곳에는 임진왜란 이전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이대원도 함께 모시고 있다. 본래 이대원 사당이었는데 부산포 해전에서 정운이 순절하자 이순신이 조정에 청원하여 정운도 이 사당에 모셔졌다.
 정운을 제향하는 고흥 쌍충사의 사당. 이곳에는 임진왜란 이전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이대원도 함께 모시고 있다. 본래 이대원 사당이었는데 부산포 해전에서 정운이 순절하자 이순신이 조정에 청원하여 정운도 이 사당에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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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들이 머물러 있는 곳들은 모두 지형이 좁고 바닷물이 얕아 판옥선 같은 큰 배로 싸우기에는 매우 어려운 곳이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수군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전라 좌수영의 군사들과 전함만으로 적진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이순신은 원균과 더불어 좋은 계책을 내어 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마주 앉았다.

한양이 적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에 절망하는 우리 수군

그때 선조가 4월 30일 한양을 떠나 북서쪽으로 피란을 떠났고 한양은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공문이 온다. 놀랍고 분하고 원통한 느낌에 기분에 장졸들은 간장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고, 서로 붙잡고 우느라 군영 안이 온통 수라장이 된다. 더 이상 전술 회의를 여는 일은 불가능해졌고, 장수와 병사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전라 좌수군은 (좌수영을 출발한 지 엿새만인 5월 9일) 여수로 회항한다. 이순신은 장수들에게 적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도록 전함들을 더욱 잘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 배치하라고 엄중히 지시한 후 진(군대의 전투형 편성)을 파한다. 

경북 영천 동린각은 이순신과 김완을 함께 모신다. 김완은 옥포 해전 등에서 이순신을 도와 함께 많은 공을 세웠다.
 경북 영천 동린각은 이순신과 김완을 함께 모신다. 김완은 옥포 해전 등에서 이순신을 도와 함께 많은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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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 합포, 적진포 승리를 묶어 흔히 '옥포 대첩'이라고 한다. 세 전투에는 연속성이 있으므로 그렇게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옥포 해전 승리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옥포 해전의 전승이야말로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적을 능히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감을 갖게 해준 중요한 일전이었다. 양측의 수군 전력이 노출된 서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곧 조선 측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반면에 일본 측은 초전에 패전한 충격으로 인해 크게 전의가 손상되었음은 물론 그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그 후의 작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옥포 대첩 기념 공원 안에 있는 이순신 사당의 정면 모습. 내삼문과 사당 사이가 너무 좁아 정면에서는 건물 전체 사진이 찍히지 않는다.
 옥포 대첩 기념 공원 안에 있는 이순신 사당의 정면 모습. 내삼문과 사당 사이가 너무 좁아 정면에서는 건물 전체 사진이 찍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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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7년 전쟁사에서 조선군 최초의 승리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옥포 대첩! 과연 그 이름답게 경남 거제시 팔랑포 2길 87에는 기념관, 이순신 사당, 기념탑, 참배단, 옥포루 등 내용성과 구경거리를 두루 갖춘 '옥포 대첩 기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에서는 해마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을 전후하여 사흘 동안 성대한 '옥포 대첩 기념 제전'도 열린다.

꼭 가보자, 옥포 대첩 기념 공원!

공원을 찾으면 기념관이 가장 먼저 답사자를 맞이한다. 기념관의  작은 홍보물 <옥포 대첩 기념 공원>부터 읽어본다. 홍보물은 '옥포 대첩 개요', '옥포 대첩 의의', '성웅 이순신' 해설에 각각 한 면씩을 할애했다. 그 외 입장 요금(어른 1,000원, 청소년·군인 600원, 어린이 400원, 단체 약 20% 할인), 관람 시간(09:00~18:00), 정기 휴관 안내(매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 또는 연휴인 경우 그 다음날, 추석과 설날 당일), 전화(055-639-8240) 등을 싣고 있다.


태그:#옥포, #이순신, #합포,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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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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