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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파더> 속 한 장면. 박근형은 왕년의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광 역을 맡았다. 기광은 공장 통근버스를 운전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독거노인이다.
 <그랜드 파더> 속 한 장면. 박근형은 왕년의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광 역을 맡았다. 기광은 공장 통근버스를 운전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독거노인이다.
ⓒ 디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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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당의 한 단체는 매주 토요일마다 동네에 있는 어렵고 힘든 집 열네 곳에 반찬을 만들어 배달하고 있습니다. 보통 아침 10시에 시작하는데 배달이 끝나면 거의 오후 1시가 다 됩니다. 나는 2012년에 가입해서 토요 반찬 봉사만이 아니라 격주로 있는 정기회합에 참석하고 회합 때에 주어지는 조별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반찬 봉사에서 내가 맡은 일은 설거지하는 것과 여자 회원들이 만든 반찬을 그릇에 골고루 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이 다 끝나면 가방에 담아서 각 집으로 배달하는 것입니다. 회원들이 정성 들여 만들어 놓은 반찬을 각 집으로 배달하면서 나도 다른 회원들처럼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반찬을 만들 때에 회원들이 나에게 활동하면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을 들려줄 때에, 회합하는 날 가정방문하면서 그 대상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나 혹은 직접 눈으로 본 어려운 상황 등을 발표할 때에 가슴 아팠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이제는 나도 직접 다른 회원들과 각 집으로 배달하고 조별 활동을 해보니 그 이전보다 더 그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게 됐고, 우리가 사는 동네의 많은 이웃이 정말로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쉬운 소리하던 영수씨, 나는 그가 불편했다

그동안 활동을 한 대상자가 주위에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대상자가 영수(가명)씨입니다. 아마 그는 평생 내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환갑을 갓 넘겼는데 담배를 꽤 피우고 무슨 병인지 발과 다리가 시커멓고 조금은 짓무른 그는 가족 없이 혼자서 조그만 빌라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 가면 입구에 손수레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용돈을 벌기 위해서 종이 상자나 병 등을 수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거동하기가 불편해서 일을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반찬을 배달하러 집에 가면 고개를 90도 가깝게 숙이면서 무척 고마워해 오히려 우리가 몸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쌀을 갖다 줄 때도, 겨울에 춥지 않게 입으라고 두툼한 바지를 갖다 줄 때도, 난방비와 전기세 등을 가끔 줄 때도 그의 고마워하는 태도는 한결같았습니다.

어느 날 회장님과 같이 방문하게 됐는데, 그는 머리가 요즈음 계속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회장님은 나 보고 잠시만 대화를 나누라고 한 뒤 밖으로 나갔습니다. 속으로 왜 그럴까 궁금해 하면서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며 회장님이 들어왔습니다. 알고 봤더니 약국에 가서 조그만 곽에 든 두통약을 몇 통 사 갖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 주머니에도 돈은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수씨는 약 상자를 내미는 회장님께 더욱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했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는 영수씨 집에 배달 가는 걸 속으로 꺼렸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안 그런데 내가 반찬을 배달하고 나서 인사하고 뒤돌아 나올 때에 그는 꼭 머리 뒤통수를 긁적거리면서 아쉬운 소리 한 가지를 했기 때문입니다. 쌀이 다 떨어지게 됐으니 쌀도 주면 안 되겠느냐, 추운데 난방비를 미리 앞당겨서 주면 안 되겠느냐, 가까운 친척이 죽었는데 다만 만 원이라도 부조하게 돈 좀 꿔주면 안 되겠느냐 등의 말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좋게 봉사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 순간 짜증이 나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그에게 순간을 모면하려고 여러 사정을 대며 돌려서 말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집에 주말마다 활동하던 어느 날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날은 서울에 일이 있어서 반찬을 그릇에 담는 것까지만 하고 성당에서 일찍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 대신에 다른 회원이 배달을 갔는데, 지난주에 갖다 준 반찬이 그 집 앞에 그대로 있더란 것이었습니다. 반찬을 배달하는 집 대부분이 대상자가 집에 있지만 가끔은 집을 비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전화가 있는 대상자는 전화를 걸어 반찬을 문 앞에 놓고 간다고 하고, 전화가 없는 경우에는 그냥 문 앞에 놓고 가는데, 그는 전화가 없었습니다.

그 소식은 내가 서울에서 어느 행사에 참석하고 있을 때 회장님이 보낸 긴 문자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회원은 회장님께 연락하고,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경찰을 불러 문을 열어 들어갔더니 영수씨는 숨이 끊어진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물건을 뒤적이던 끝에 그동안 관계를 끊고 지냈던 자녀들의 연락처가 있어서 연락했다는 거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집에 갈 때마다 아쉬운 소리를 꼭 하는 그를 마음속으로 수없이 탓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참다운 하느님의 봉사를 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회한이 밀물처럼 내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영수씨의 장례는 우여곡절 끝에 치러졌습니다. 회장님을 비롯한 우리 회원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자녀들과 연락이 되어 가까운 장례식장에 그의 시신을 모셨습니다. 그 다음 날 밤에 회장님을 비롯한 회원들이 모두 장례식장을 찾아 많은 사연을 남긴 그에게 예를 갖춰 조문했습니다. 장성한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가 있음에도 완전히 가족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살아온 그의 불쌍한 삶을 생각하며 우리 회원들은 그가 저승에서나마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영수씨를 어떻게 대했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에게 다시 한 번 신앙인의 참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랑입니다. 회장님이 누누이 회합 때에 얘기한 것처럼 예수님의 시선으로 내가 영수씨를 바라봤더라면 그렇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뉘우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쉬운 소리를 영수씨가 여러 차례 한 것은 그만큼 살아가기가 절박하다는 의미인데, 나는 정성껏 만든 반찬을 그에게 매주 배달하고 틈틈이 이것저것을 갖다 주기까지 하는데 진짜로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귀찮아하고 짜증을 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는 알았을 겁니다. 아무리 내가 가면을 쓰고 겉으로 웃는 낯으로 상황을 설명하더라도 진짜는 그렇게 요청하는 자신을 무척 싫어하고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그동안 그에게 보여줬던 나의 언행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안 그러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랑을 가득 담은 연민의 눈빛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인간의 눈으로만 영수씨를 바라본 결과 다시는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태그:#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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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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