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아수라>의 포스터. 배우의 면면이 매우 화려하다.

영화 <아수라>의 포스터. 폭력의 미학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 CJ 엔터테인먼트


수년 전 영화 대학원 시절,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에 대해서 '폭력 미학'이라는 제목을 붙여 소논문을 쓴 적이 있다. 두 명의 남자 주인공들이 소대 하나는 족히 넘길 인원을 기관총 몇 개로 뭉개버리는 성당 라스트 신은 영화사에서 두고두고 회자하는 전설이 되었고, 아울러 1980년대에 오우삼이 만들었던 일련의 홍콩 누아르 영화들은 폭력과 '후까시'가 얼마나 아름다운 영화적 시(時)로 표현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인 텍스트 같은 작품들이었다.

홍콩 누아르 <첩혈쌍웅>과 <아수라>

 영화 <아수라>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영화 <아수라>는 근래 한국 영화 중에서도 보기 드문 수위의 폭력을 보여준다. ⓒ CJ 엔터테인먼트


<아수라>를 보고 나면 1980년대 오우삼 감독의 작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프닝 크레딧 부터 클로징까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일관성 있게 어두운 톤, 시대와 공간을 가늠하기 힘든 암울한 뒷골목들, 범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애당초 벗어나 버린 디스토피아 적인 캐릭터들. 등장인물들은 피 칠갑을 두른 만신창이에 몸에도 조롱과 냉소를 쏟아내고 그들의 마지막 대결은 대극장의 발레 공연처럼 우아하고 성스럽게 전시된다.

<아수라>는 1980년대 홍콩 누아르 장르의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 <베테랑>, 최근에 개봉한 <더 킹> 등의 계보를 잇는 이른바, '한국형 비리 장르 (악덕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절대 악에 맞서는 소시민의 이야기를 가진 영화)'의 스토리를 입혀 2016년에 재탄생한 새로울 것 없는 '복고풍 영화'다.

줄거리와 캐릭터의 뻔함을 누아르식 '추억의 장치'들이 메워주고 있으며 관객의 평이 극단으로 갈리는 것은 영화의 즐거움이 이러한 장치들을 얼마나 소환할 수 있으며 즐길 수 있는가에 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가상의 도시, 안남시의 악덕 시장 박성배(황정민 분) 그리고 그의 악행을 뒤처리하는 비리 형사 한도경(정우성 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박성배의 비리 질주를 응징하고자 하는 검찰 김차인 (곽도원 분)이 한도경을 미끼로 쓰기 위해 접근한다. 이 시점부터 서로서로 속이고 파괴하는 '아수라' 판이 열리고 연루된 모든 인물이 그들이 짜놓은 판에서 장렬히 전사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아수라는 홍콩 누아르 장르의 관습을 따르고는 있으나 그 표현의 수위나 방법이 극단을 추구하는 작품이다. 3초마다 육두문자를 들이붓는 대사에서부터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폭력과 살해 및 자해 장면까지 기존의 한국 영화들이 시도했던 관습들을 두세 배씩 응축하여 설정과 비주얼을 꾸린다.

예컨대, 유리컵을 씹어 뱉고, 커터칼로 머리를 찢고, 코를 산산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정면) 린치 장면 등은 최근 제작된 한국 영화들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수위의 폭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수라> 는 '극단성'으로만 남을 작품은 아니다. 장르의 관습과 그것의 극대화가 꽤 도식적으로, 영리하게 짜여진 영화적 장치안에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공간과 빛의 미학, 박성배와 한도경의 경우

 영화 <아수라>의 한 장면.

영화 <아수라>는 '빛'의 활용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 CJ 엔터테인먼트


이에 공헌하는 것엔 배우의 연기나 미장센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아수라>는 특히 공간과 빛을 구성하고 사용하는 데 있어서 탁월하다. 시종일관 어둡고 좁지만, <아수라>에서 보여주는 공간들은 등장인물에 맞게 도식적으로 활용되고 빛은 공간과 인물을 유기적으로 표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아수라>의 캐릭터들은 누구 하나 정상적인 면 하나 찾기 힘든 악인들이지만 각자가 가진 두려움, 욕망의 정도가 다르다. 그들에게 입혀지는 공간은 이들의 내면을 반영하고 그에 따라 기능한다.

정우성이 분하는 한도경의 경우, 비리를 일삼지만, 그의 악행은 병든 아내의 치료비를 벌기 위함이라는 나름의 명분이 있으며, 그는 어쩌다가 잘못 걸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억울한' 인물이다. 이를 반영하듯 그가 속한 공간은 창도, 빛도 없는 극도로 작고 폐쇄적인 공간이고 이 안에서조차 주로 모서리에 배치된다. 따라서 인물의 동선이 공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가령 한도경이 김차인에 의해 트럭(수사팀이 잠복용으로 쓰는 탑차)으로 불려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한도경은 시퀀스 내내 한 번 일어나 보지도 못한 채 트럭의 모서리에 '꼬불쳐' 진 채로 심문당한다. 동선이 공간의 지배를 받고 이는 연출적인 계산으로 보인다. 한도경의 모서리 배치는 재개발 구역 뒷골목 지하방(역시 비밀수사를 위한 위장 공간)에서도 보인다. 김차인에 의해 몰래 찍힌 섹스비디오로 협박당하는 이 장면에서 한도경은 좁아터진 지하방 안에서조차도 코너에 몰려 무릎을 꿇는 것으로 절박하게 표현된다.

반대로 박성배는 절대 권력을 가진 인물로 그가 소유하거나 차지하는 공간은 상대적으로 넓고 탁 트인 장소들이다. 가령 법원 중앙 복도, 재개발 사업 계획 발표장, 사격장 그리고 피날레가 펼쳐지는 장례식장까지. 특히 이 공간 안에서도 박성배는 계단 위에 서거나(법원 복도), 책상 위에 앉거나(사격장) 하는 배치로 상대 캐릭터들보다 높은 곳에 위치 한다. 따라서 그의 동선은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제재받지 않는 그의 권력이 공간과 배치로 표현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박성배의 공간은 인공적인 빛(스포트라이트나 무대 조명)으로 다른 캐릭터들보다 훨씬 밝게 부각된다. 어두운 후경이나 전경으로 한도경의 얼굴조차 가려버리는 라이팅 테크닉과는 대조되는 화법이다.

이 외에도 카메라가 차 안과 밖을 미끄러지듯 넘나드는 차량 추적신, 캐릭터들 모두가 한 무대에서 칼춤을 추는(?) 장례식 피날레 시퀀스 등은 <아수라>라는 작품이 기존 한국 영화의 작법에 도전하는 보석임을 증명하는 또 다른 굵직한 예들이다.

개연성 면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영화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영화가 뿜어내는 엄청난 기와 곳곳에 산재한 노련함이 적지 않은 단점들을 눈감게 한다. 홍콩 누아르가 판을 치던 1980~1990년대 이후로 이런 '과함의 미학'을 기다렸던 모두에게 선물 같은 작품이다. Viva Asura!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 블로그 잡지 <이리>(http://postyri.blogspot.kr/)에 실린 글을 수정·보완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수라 정우성 김성수 감독 홍콩 느와르 비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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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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