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의 한 장면. 지금까지 나왔던 무수한 '예술가' 영화와, 이 작품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의 한 장면. 지금까지 나왔던 무수한 '예술가' 영화와, 이 작품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 (주)티캐스트


화가라는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영화들은 대개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아니, 그렇게 분류할 수 있다. 우선 명작의 탄생 비화가 궁금하다. 그럼 화가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둘러보는 게 먼저다. 그러다 보면, 주변 가족과 연인(이나 뮤즈), 친구(와 소울 메이트)들이 두둥실 떠오른다. 이를 위해 특정 시기를 조명하기도 하고, 전체 인생 여정을 따라 잡기도 한다.

이 모두는 예술가의 고뇌로 수렴되기 마련이다. 숱한 화가와 예술가의 삶을 그린 영화들이 이렇게 범주화된다. 그러 패턴이 존재하건만, 관객들은 궁금하고 또 궁금한가 보다. 그 예술가들의 창작 혼이 어디로부터 연유하는지, 또 그들 각자의 사정은 어땠는지 말이다.

그렇게 화가를, 예술가의 생애를 조명한 주목할 만한 '예술'영화들이 한 해에만 어림잡아 서너 편은 꼭 소개된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작품들은 한국 관객들이 유달리 좋아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실화'(!)아닌가.   

인상주의 미술의 거장 폴 세잔과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대명사 에밀 졸라의 발자취와 우정을 그린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에 이어 또 한 편의 예술가가 세밑 극장가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2일 개봉, 주말 관객 1만을 돌파하며 26일까지 1만3617명을 동원한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아래 <에곤 쉴레>)가 바로 그 작품이다.

매년 연말, 대형 미술 전시가 북새통을 이루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에곤 쉴레>의 흥행 역시 스크린으로 에곤 쉴레의 작품을 감상하려는 예술영화 관객들이 극장을 찾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19세 이상 관람가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에곤 쉴레>는 크리스마스 당일 34%라는 높은 좌석점유율을 기록했고, 26일까지 영화진흥위원회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에곤 쉴레>는 이른바 '예술가 영화'의 패턴에서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 

에곤 쉴레와 그의 네 여인들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에 등장하는 에곤 쉴레의 '죽음과 소녀'.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에 등장하는 에곤 쉴레의 '죽음과 소녀'. ⓒ (주)티캐스트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의 한 장면. 그림 '죽음과 소녀'와 포즈가 같다.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의 한 장면. 그림 '죽음과 소녀'와 포즈가 같다. ⓒ (주)티캐스트


가난과는 거리가 멀 정도로 유복했다. 대신 매독에 걸린 아버지는 광기에 사로잡혔고, 어머니는 남매에게 지독히도 무관심했다. 두 살부터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정식 미술 교육은 받지 않았다. 그래도 빈 예술 아카데미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그러나 태생적인 자유분방함이 아카데믹하고 보수적인 학풍과 맞을 리 만무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구스타프 클림트도 질투했던, '죽음과 소녀' 등의 작품으로 우리에게도 친근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에곤 쉴레는 '천재'였다.

이 천재의 죽음의 목전에서부터 짧았던 전성기를 되짚는 <에곤 쉴레>를 연출한 디터 베르너 감독은 아마도 에곤 쉴레의 먼 후배쯤 될 듯싶다. 역시 오스트리아인으로서 먼저 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후 연극과 드라마, 영화 연출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만큼, 에곤 쉴레의 영감을 자극한 실제 오스트리아 빈을 비롯해 체코, 이탈리아, 룩셈브루크 등 유럽의 풍광을 유려하게 담아냈다. 또 영화 말미, 에곤 쉴레가 속한 '빈 분리파'가 전시회에 등장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실제 작품이기도 하다. <에곤 쉴레>는 그런 '메이드 인 오스트리아', '메이드 인 유럽'의 흥취가 물씬 배어난다.  

이 베르너 감독이 영화화의 모태로 삼은 작품은 <죽음과 소녀–에곤 쉴레와 여자들>이다. 5년간의 조사를 거친 작가 힐데 베르거는 에곤 쉴레와 뮤즈들의 관계가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천착했다. 에곤 쉴레가 미성년자 납치 및 추행 혐의로 고소된 사건이나 그의  마지막 뮤즈였던 에디트 하름스에 관한 영화 속 내용 역시 이 원작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 점에서, '에곤 쉴레의 여자들'이란 원작의 부제는 영화의 부제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에곤 쉴레의 강렬했던 청춘을 조명하는 <에곤 쉴레> 또한 그의 예술 세계를 풀어 가는 실마리로 그를 사랑했고, 그에게 영감을 줬던 네 여인과의 순간을 이야기의 주요 얼개로 배치했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만나는 에곤 쉴레의 작품과 그의 생애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의 공식 포스터. 그가 여성과 만나고 헤어졌던 과정을 그렸다.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의 공식 포스터. 그가 여성과 만나고 헤어졌던 과정을 그렸다. ⓒ (주)티캐스트


유일하게 정을 나눈 혈육이자 남매를 넘어선 교감과 애정 관계로 그려진 동생 게르티 쉴레, 역시 유일하게 에곤 쉴레의 작품 속에 이름을 남긴 댄서 모아 만두, '영혼의 반쪽'이라 할 만한 모델 발리 노이질,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부인 에디트 하름스. <에곤 쉴레>의 이야기 구조는 이 네 여성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는 것으로 채워진다.

여성을 작품의 전면에 내세웠고, 사랑하는 여인들을 꾸준히 모델로 삼았던 에곤 쉴레였기에,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일견 적절한 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중심을 차지하는 인물은 클림트를 통해 소개 받은 발리 노이질이다. 에곤 쉴레가 발리 노이질과의 사랑과 이별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죽음과 소녀>는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게 등장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발리 노이질은 모델뿐만 아니라 에곤 쉴레의 정신적, 일상적 지지자이자 동반자였고, 미성년자 납치 및 추행 혐의로 재판에 구금됐을 때나 군에 복무하게 됐을 때도 그의 곁을 지키며 헌신했다. 베르너 감독은 <죽음과 소녀>와 같은 구도의 장면을 그대로 찍었을 만큼, 둘의 관계를 영화의 중심 축에 가져다 놓는다.  

그리하여 발리 노이질과의 관계와 파국이야말로 <에곤 쉴레>에서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한 젊은 예술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으로 기능한다. 한편으론, 발리 노이질과 여타 여성들과의 관계는 결국 무엇이 에곤 쉴레를 고뇌하게 만들었고, 또 어떻게 범인들과는 다른 길을 갔는가를 드러내는 반사판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물론 관계와 사랑이 전부는 아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가 배경인 <에곤 쉴레>는 그가 겪는 음란함에 대한 시시비비나 군 징병을 통해 당대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나 제1차 세계대전한창이던 유럽의 역사적인 맥락이 어떻게 예술가에게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거시적인 시각까지 제공해 준다. 

그리고, 에곤 쉴레의 작품들. 에곤 쉴레는 1918년 10월 31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약 300여 점의 유화와 2000여 점이 넘는 데생과 수채화를 남겼다. <에곤 쉴레>는 그의 미완성적인 <가족>을 필두로, 발렌 노이질을 모델로 한 <발리의 초상>, <검정 스타킹을 신은 발리 노이질> 등이 등장하고, <무용수 모아>, <소도시> 등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을 고루 포착해 미술 애호가들의 구미를 자극시킨다.

에곤 쉴레가 드로잉을 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그리는 장면도 빠지지 않는다. 여기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팬이라면, 그림 교환 장면에서 등장하는 <검은 머리 소녀>나 <죽음의 삶>이 스크린으로 비칠 때 무척이나 반가울 듯 하다.

결론적으로, 여타 예술가의 초상을 그린 작품마냥 <에곤 쉴레>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작이나 문제작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범인들의 시각에서 예술가의 예술혼의 어떤 양상을 훔쳐보는 경험은 분명 흥미진진한 일이다. <에곤 쉴레>가 그리는 뜨거운 청춘과 시대를 앞서간 작품 세계, 다소 비극적인 죽음의 궤적 역시 이 범주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미술애호가라면, 에곤 쉴레의 팬이라면, 극장에서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알현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작품도, 영화의 주제도 결국은 젊은 예술가의 예술혼과 사랑으로 귀결된다. 보편적인 예술가의 이야기로 읽어도 무방하다. 오스트리아로부터 날아 온 <에곤 쉴레>는 그렇게 충분히 '클래식'하다.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의 한 장면. 낯선 화가의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의 한 장면. 낯선 화가의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 (주)티캐스트



에곤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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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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