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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촛불민심을 대변할 '시민의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이 나왔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주로 절차와 대표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는데, 일각에서는 차라리 정당을 만들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정치권을 믿을 수 없다는 게 '시민의회'가 제안된 이유인 만큼, 촛불민심을 대변하는 데 직접 정당을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왜일까?

어쩌면 그건 지금 한국사회는 정치혐오가 만연한 곳이기 때문일 수 있다. 언론은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주요 통로가 되고 있고, 정치인들은 이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런 언론에 '영합'해 막말을 쏟아냄으로써 유명해지는 쪽을 택하고 있다. 즉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정당을 만든다는 건 부담스러운 선택지였을 가능성이 크단 얘기다. 게다가 지금 선거제도에서 의회에 기반이 없는 신생 정당이 주목을 받고 자리를 잡기란 극히 어려운 일 아닌가.

<새로운 정치 실험 아이슬란드를 구하라>
 <새로운 정치 실험 아이슬란드를 구하라>
ⓒ 새로운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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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새로운 정치 실험 아이슬란드를 구하라>는 비록 다른 나라 사례이긴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북돋워줄 수 있을 만한 책이다. 이 책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도탄에 빠진 아이슬란드에서 '최고당'이라는 신생 정당을 만들어 새로운 정치를 주도했던 코미디언 욘 그나르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10년, 최고당은 아이슬란드 대도시 레이캬비크 시의원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선거결과 최고당은 득표율 기준 제1당이 됐고 사회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시장 자리를 꿰찼다. 물론 욘 그나르가 처음 정당을 만들고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언론이나 기존 유력 정당들은 이런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최고당을 깔보았고 욘 그나르를 광대 취급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에서 먼저 주목할 점은 욘 그나르와 최고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재밌는 건 그게 미국 대통령 당선자 트럼프의 승리 요인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점이다.

기존 정치 세력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이라는 진단 아래 최고당은 인터넷 유세에 집중했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대대적으로 해서 주목을 받았다. 물론 근본적인 차이점은 있다.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막말을 일삼았던 반면, 욘 그나르와 최고당은 '우스갯소리'를 쏟아내면서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자신들의 윤리강령을 지켰다.

하지만 유세 과정에서 나온 이런 차별화 전략만으로 욘 그나르와 최고당의 성취를 설명하는 건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욘 그나르와 친구들이 국가 위기 상황에 대해 정당을 창당하는 방식으로 반응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전까지 무정부주의자를 자칭하면서도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해 수동적이었던 욘 그나르는 최고당을 통해 처음 정치에 참여했고, 최고당 활동을 통해 성장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배운 것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인상적인 것 몇 가지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그는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으며 민주주의 운명은 국민의 참여와 관심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과학을 과학자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듯이 민주주의도 정치인들에게만 맡겨 놓아서는 안 되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에 다양한 사람들을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데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심리가 있으며 이는 현대 민주주의가 직면한 문제라고 꼬집는다.

또한 그는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직접 정당과 공약을 만들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기 전에 모든 걸 속속들이 알 필요가 없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하여 최고당 정책이 예로 제시되는데, 그는 이것이 다른 정당들이 내건 정책 중 가장 훌륭한 부분을 모아서 조합한 것이라며, 북유럽 복지국가에서 이미 증명된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설명도 잊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정치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욘 그나르가 사실 회의론자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세상에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거나, 계급 없는 사회와 평화를 갈망하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욘 그나르는 그 꿈에 모든 시간과 힘을 바칠 준비가 돼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대목을 읽으며 바로 이런 점이 그와 최고당이 소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던 저력이라고 믿게 됐다.

한편 욘 그나르는 임기를 마치고 재선을 포기했다. 최고당의 승리는 깜짝 파티처럼 제도권에 충격을 주었고, 깜짝 파티는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새로운 정치 실험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이 책은 아이슬란드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 곳곳에 묻어나는 유머도 가독성을 높인다. 아이슬란드를 알고 싶다면 수영장으로 가야 한다거나, 아이슬란드가 핀란드에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가 사우나에서 완전히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일을 자연스러워하는 데 있다거나, 인구가 적어서 누가 자전거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최소한 일간지 헤드라인감은 된다는 이야기 등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아이슬란드의 일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또 이 나라에선 언제든 집 정원이 용암류 아래 묻혀 버리거나 6월 눈 폭풍이 몰아칠 수 있지만 아이슬란드인들은 이에 순응하며 사는 법을 알아냈다고. 저자가 이를 '자연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생각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는 말로 설명하는 대목은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바야흐로 난세다. 지금 한국사회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돌출된 이후 대규모 '촛불'이 이어지고 있고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이 날로 커져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경우와 입장에 차이는 있겠으나 욘 그나르는 난세의 아이슬란드에서 이를 헤쳐 나가려면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는 진보적인 사회로 가는 열쇠이다. 나는 직접민주주의를 믿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디지털 직접민주주의를 믿는다. 그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리더이며 그러기만 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라는 오해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욘 그나르와 최고당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이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더 없이 시의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새로운 정치 실험 아이슬란드를 구하라>
욘 그나르 지음. 김영옥 옮김. 새로운발견 펴냄.



새로운 정치 실험 아이슬란드를 구하라

욘 그나르 지음, 김영옥 옮김, 새로운발견(2016)


태그:#아이슬란드, #욘그나르, #최고당, #새로운정치실험아이슬란드를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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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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