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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함께 사는 엄마가 없다. 외할아버지 호적에 실려 함께 살아갈 뿐이다. 고1 때 자퇴를 한 나는 할아버지의 24시간 편의점 일을 한다. 몇 달 전 신지구에 개업한 편의점이다.

할아버지는 몇 달 전만 해도 배달도 해야 하는 농심마트를 했다. 구지구에서였다. 배달을 도맡았던 내게 유일한 즐거움은 한쪽 발이 짧아 절뚝거리는 수지를 스쿠터에 태우고 한밤중 도시를 달리는 것. 그런데 그런 수지가 어느 날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지고 만다.

마음 나눌 친구 하나 없는 내게,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자퇴한 의기소침한 내게, 세상과 사람들에게 아무런 생각이 없던 내게 변화가 일어난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을 알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문을 보게 된 것.

문을 보게 되면서 이제까지 당연한 듯, 그리고 아무런 생각 없이 대하던 사람들에게 눈이 머물게 된다. 무심코 보던 사람들을 자세히 보게 되면서 사람들의 표정이나 한마디 인사나 말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얼마 전까지 전혀 몰랐던 그들이 사라진 편의점 너머 거리(세상)까지 바라보는 일이 많아진다.

<편의점 가는 기분> 책표지.
 <편의점 가는 기분> 책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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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이런 흐름의 책 <편의점 가는 기분>(창비 펴냄)은 성장소설이다. 화자인 '나'가 자신도 모르게 겪은 이별을 계기로 성숙해지는 과정을 들려준다. 이제까지 당연한 듯 무심코 대했던 것들을 우연한 계기로 특별하게 보게 되고, 관심 둔만큼 보고 느끼고, 보고 느낀 것만큼으로 소통하고 나누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들려준다.

나는 소설 속의 '구지구'와 '신지구'의 경계쯤 되는 곳에서 십칠 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공부방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몇 번이나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 써지지 않았다. 쓰려고 하면 할수록 이야기는 흩어졌다. 이야기가 시작된 건, 내가 한 인물의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그와 나의 경계가 사라진 후였다.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소년이 품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은 새로운 지역이 개발되고 오래된 마을이 변해 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내 인물은 나의 의도를 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 감춰져 있던 힘을 발견해 낸 것 같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청소년 대상 성장소설이다. 주인공 소년은 열여섯 살 미혼모 아이로 태어나는 순간 버려지다시피 자란 남다른 출생 사연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낳은 열여섯 살에 머물러 있는 철부지 엄마는 걸핏하면 나타나 돈을 뜯어 사라지기 일쑤다.

삐뚤어지기 십상인 처지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불우한 처지를 탓하거나 응석부리지 않는다. 도리어 남의 처지를 염려한다. 청소년 개입 범죄 소식은 특히 더 우울하다. 어른들의 부실한 삶, 그 결과란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불우한 청소년들을 향한 응원 또는 멘토란 생각도 든다.

저마다 절실하고 지난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은 한겨울밤 편의점에 들러 허기를 해결하고 추워진 몸을 녹인다. 나도, 다른 사람들도 어느 날부터 매일 스치듯 대하던 사람들의 사정에 귀 기울이게 되고 안부를 걱정한다. 그래서 뭉클하고 따뜻한 소설이다. 한겨울 편의점 호빵처럼 따뜻한 소설이란 표현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소설 배경이 구지구와 신지구 경계, 하필 골목 구멍가게들을 밀어내고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전역 곳곳에 들어선 프랜차이즈 편의점이라는 것, 소설 속 배경과 비슷한 곳에서 오랫동안 공부방을 이끌며 그동안 여러 작품들을 통해 변두리 지역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과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주로 이야기해 온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읽으면 따뜻한 소설로만 읽히지 않는다.

사람들이 거의 떠났음에도 철거마저 멈춰버려 더욱 스산하고 황폐하게 느껴지는 구지구, 짓다 말아 10년 넘게 부직포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막연히 공포스럽고 흉측한 커다란 건물, 급조된 싸구려 원룸촌으로 덮인 신지구의 살벌하고 자본에 지배당한 도시 분위기, 그와 같은 곳에서 정착하지도 떠나가지도 못한 채 서성이듯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사연과 어쩔 수 없는 일상을 워낙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았던 구지구를 구질구질하다고만 생각했던 소년은 구지구에서 함께 살았던 수지와 사람들의 온기를 그리워한다. 작가는 소년을 통해 199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되어온 도시화와 재개발, 그 폐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장사가 꽤 잘 되는데도 손에 쥐는 것이 없어 24시간 편의점을 접고 다시 옛날에 하던 마트를 하겠다는 외할아버지의 뼈 아픈 한숨도, 프랜차이즈 창업으로 모든 것을 잃은 꼬마 수지네의 사연도, 복학하지 못하고 배를 타러 떠나는 대학생 훅의 사연도 남다르게 읽힌다.

한겨울 가난한 도시의 변두리 편의점에 의지하듯 찾아드는 화자인 나 혼자 '훅'이라고 부르는 정체불명의 젊은 남자. 엄마와 추운 겨울밤을 떠돌며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음식에 의지해 사는 열한 살 꼬마. 동거중인 남녀 고등학생, 떠도는 고양이들 밥을 주러 매일 추운 밤거리를 떠도는 캣맘. 그들은 어떤 사연을 들려줄까?

-밤에 편의점을 지키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그거였다. 가난은 구지구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어디에나 있다.

-"맞아요. 이 방식의 삶이 망한다는 건, 다른 방식의 삶이 시작된다는 뜻일지도 몰라요. 세상의 다른 문이 열리는 거예요."

-"어떤 일에 노련해진다는 건 그 일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 일에 생활이 달렸다는 거고, 그만큼 무게를 짊어졌다는 뜻일 거야. ...그런데 편의점 알바에 노련해진다는 거, 그건 슬픈 일이다. 잠깐 하려고 시작한 일이 오 년, 십 년 계속되면 슬픈 거지..."

남다른 의미와 생각을 하게 하는 표현들이라 밑줄 그은 부분들이다. 이런 부분들 때문에 더욱 놓지 못하고 읽은 소설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편의점 가는 기분>(박영란) | 창비 | 2016-10-12 | 정가 10,000원



편의점 가는 기분

박영란 지음, 창비(2016)


태그:#편의점 , #재개발지역, #성장소설(청소년소설), #박영란(작가), #창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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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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