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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벌부 구매자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에 따라 푸거가가 미리 정한 면벌부 가격은 왕과 대주교 및 주교는 25굴덴이었고, 백작은 10굴덴, 사업가는 3 내지 6굴덴, 길드 조합원은 1굴덴, 서민은 0.5굴덴, 빈민들에게는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푸거가는 자신들의 몫을 챙기고 나서 대주교와 수익을 나누었다. 대주교의 수익 중 2분의 1은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한 자금으로 로마로 보내졌다. 역사가들은 그 일부만 성당 건축에 사용되고 나머지는 교황이 유흥비로 탕진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182쪽)

장수한의 <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300년 전성기를 구가한 페루치가에 이어 교황 레오 10세를 배출한 1440년의 메디치가 이후에 등장한 푸거가(Fugger family)에 관한 설명이죠.

장수한의 <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장수한의 <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
ⓒ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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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부터 남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진출한 신흥 사업 가계(家系)였죠. 그 가계가 메디치가보다 다섯 배 이상 재산을 많이 모은 게 '면벌부 판매' 곧 '면죄부 판매'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종교세력과 정치세력을 등에 업은 사업수완이었죠.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성당에 95개 논제(Martin Luther's Ninety-five Theses)를 내붙인 것도 그 면벌부 판매가 핵심이었죠. 물론 교황의 사죄권과 평신도의 성찬금지 등 다양한 연결 고리들도 맞물려 있었죠.

그 논제 때문에 루터는 1521년 1월 27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5세가 주관한 '보름스 제국회의'에 불려나가야 했죠.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약 700km가 넘고, 체코의 얀 후스처럼 화형 당할지도 모른다며 주변 동료들이 말렸는데도, 그는 극구 맞서 나갔죠.

그렇게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돈을 주고 산 면벌부(免罰符)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논쟁하기 위함이었죠. 그만큼 교황의 교권보다도 '성서의 진리'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함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논리와 용맹만으로는 결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었죠.

당대에 그를 지지하고 보호해 준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해, 칼 슈타트와 멜란히톤 교수, 그리고 전투용 도끼를 들고 루터의 뒤를 따른 200여 명의 학생들이 동행해줬기 때문이죠. 그만큼 당대의 사회 지도층이 '깨어 있는 지성'이었고, 여론도 루터를 두텁게 지지해준 까닭이었죠.

그때의 종교개혁을 통해 태동된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 곧 개신교의 모습을 보면서, 적잖은 회의감이 밀려드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온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그런데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나 한국교회연합에서는 '시국선언'보다도 '대통령의 개헌'에만 방점을 찍고 있죠. 이런 시국 상황에서는 루터와 같이 용기 있는 목회자들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의 토대 위에 세워진 한국개신교가 더욱더 바르게 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책은 여태껏 알지 못했던 가톨릭교회의 독신제 규정에 관한 배경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직자의 독신을 권유케 된 게 305∼306년 경 스페인 그라나다(Granada)에서 열린 엘비라 공의회(Synod of Elvira)를 통해서였는데, 본격적인 독신제는 4세기 말 다마수스(Damasus)에 이어 시리키우스(Siricius) 교황 때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죠. 하지만 5세기까지도 성직자의 결혼 생활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고 하죠.

하지만 1139년 인토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가 소집한 제2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모든 성직자의 독신제를 의무규정으로 제도화했다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성직자의 세속적 힘이 강화되면서 교회 재산이 사유화되고, 그것이 세습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 1세(Pelagius I)는 자녀가 있는 경우 교회재산이 유산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재산 목록까지 제출토록 했다고 하죠. 그러나 독신제 규정이 더 엄격하게 적용된 것은 수도원을 둘러싼 지위와 부의 세습 문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함에 있었다고 합니다.

가톨릭교회가 그런 아픔의 과정들을 통해 그토록 부의 세습을 제도적으로 막고자 했다면, 그래서 오늘날까지 시행하고 있다면, 그로부터 촉발된 오늘날의 개신교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옳은 일일까요?

오늘날 개신교의 문제 중 하나가 목회자의 은퇴문제입니다. 은퇴 후 막대한 은퇴 비용이 들어가는 교회가 있고, 그것을 사유화하기도 하고, 교회를 자식이나 사위에게 대물림 하기도 하죠. 큰 교회는 그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작은 교회는 후임자가 그 모든 비용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구조 속에 있죠.

그렇기에 대형교회든 소형교회든, 자급이 넉넉하든 자급이 부족한 목회자든, 한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라면 정권이나 교권의 나팔수나 시녀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목회 본연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은퇴 이후에는 원로목사 제도를 없애고 '은퇴 후 공동생활'을 통한 자급자족의 토대를 마련해 나가는 게 제도적으로 시급한 일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개신교의 부의 세습문제는 천년을 더 이어갈 수도 있겠죠. 그만큼 개신교는 가톨릭의 성직자 독신제가 태동된 배경을 깊이 이해하고,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 책은 종교개혁 현장 스무 곳을 방문하여, 그 당대의 역사와 사건들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현재의 변천사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유명한 관광지도 있겠지만,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종교개혁의 다양한 국면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가 본받아야 할 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치 않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그 당대의 어두운 역사 현장(dark tourism)을 통해 밝은 혜안을 얻고, 미래의 교회상을 올곧게 추구해 나가면 좋겠죠.


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 - 열흘간의 다크 투어리즘

장수한 지음, 한울(한울아카데미)(2016)


태그:#장수한 , #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 #다크 투어리즘, #개신교의 세습문제, #가톨릭의 독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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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기억력보다 흐릿한 잉크가 오래 남는 법이죠. 일상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려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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