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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동아시아 바다의 패권은 한 국가가 독점하진 않았다. 17세기~19세기 후반까진 중국 해적이 동아시아 해역을 지배했다.
  • 임진왜란 이후 왜구가 약해졌다. 19세기엔 장보자 등의 중국 해적들이 활개쳤다.
  • '어사 박문수'는 중국의 불법조업을 심각하게 인식했는데, 영조에게 비선을 건조하는 등 대비책을 제안했다.
  • 근데... 영조는 국고 잔액을 이유로 들어 이를 거절했다. 두 번씩이나. 결국 조선 어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며 살았다.
동해에서는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만들려 하고, 서해에선 중국이 한국 어업수역을 자기 것처럼 쓰고 있다.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 문제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세기 전이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다. 그 전만 해도 중국 어선들이 조직적으로 한반도 서해의 어족자원을 침탈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있을 수가 없었다. 감히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동아시아 바다 주도권의 변천사

유명한 중국 해적인 장보자(1786~1822년)의 상상화.
 유명한 중국 해적인 장보자(1786~1822년)의 상상화.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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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언급된 것처럼 전성기의 백제가 중국 양자강 유역(상하이 근처)을 자주 침략한 사실이나, 9세기에 장보고가 당나라-신라-일본의 삼각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한 사실이나, 14세기 중반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상하이 앞바다의 한민족 해적들 때문에 고심한 사실 등에서 증명되듯이, 14세기 중반 이전만 해도 동아시아 해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민족은 한민족이었다.

그러다가 14세기 중반 이후로는 대마도 및 일본 해적 즉 왜구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때부터는 일본 옷 입은 사람들이 동아시아 바다를 활개 치고 다녔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왜구는 있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한 것은 그 이후였다.

왜구가 약해진 것은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 후반이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운동이 전개되면서, 왜구의 상당부분이 정규 군사력으로 편입됐다. 이것은 16세기 후반에 왜구 활동이 격감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다. 그렇게 정규군으로 편입된 전직 왜구들을 한 자리에 모은 장(場)이 바로 1592년 임진왜란이었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16세기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이 동아시아 바다에서 힘을 자랑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자연히, 한반도 근해까지 와서 불법조업을 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한민족이나 왜구 해적선한테 붙들려 돈을 뜯기고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감히, 조직적으로 서해에 출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17세기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바다를 주름잡던 왜구들이 감퇴하면서 일종의 권력공백 상태가 생기고 이 틈을 타서 중국 해적들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9세기 전반까지는 정성공·정일·장보자 같은 중국 해적이 동아시아 해역을 지배했다. 서양 군함이 이곳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까지는 그랬다.

이렇게 중국 해적이 기승을 부리면서 함께 나타난 현상이 중국 어선의 조선 근해 불법조업이었다. 음력으로 숙종 29년 9월 21일 자(양력 1703년 10월 31일 자) <숙종실록>에 따르면, 그런 현상이 극심해진 것은 1690년대 후반이었다.

중국 어선들은 서해 연해에서 물고기만 잡아간 게 아니었다. 조선 수군이 안 보이면 해안에 정박해서 마을을 침략하기도 하고, 사람과 가축한테 해를 끼치기도 했다. 중국 어민들이 해적으로 돌변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황당선에 대처하는 조선의 자세는 '황당'했다

연해에서 불법행위를 일삼는 그런 중국 어선들을 조선 정부는 '황당선'이라고 불렀다. 거칠 황(荒), 당나라 당(唐)을 써서 그렇게 불렀다. 당선(唐船)은 중국 선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황당선은 그런 중국 선박 중에서도 불법행위를 일삼는 선박들이었다. 

황당선에 대한 조선 정부의 해법은 상당히 무기력했다. 황당선이 나타나면 노잣돈과 식량을 주어 돌려보내고, 단속과 처벌은 중국 정부에 부탁했다. 청나라와 동맹을 맺고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미국 선박을 대하듯이 그렇게 청나라 선박을 대해야 했다. 그래서 청나라 정부에 단속과 처벌을 떠넘겼던 것이다. 조선 정부의 해법은 이 정도로 황당했다.   

청나라 정부는 말로는 걱정 말라고 했지만, 자국 연해에서 생기는 일도 아닌데 열성적으로 단속할 리가 없었다. 조선 정부가 부탁을 하면, 그때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흐르면, 중국 어선의 조선 침탈이 다시 극심해지곤 했다. 나중에는 참다못한 조선 정부가 군함을 동원해 중국 어선을 추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중국 어선이 워낙에 빨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히 여름만 되면 조선 연해에 눌러 살았다. 물고기도 잡아가고 연해 지방에 해도 끼쳤다. 조선인들의 밥상에 올라와야 할 어류는 그로 인해 청나라 사람들의 밥상에 올라가고, 조선 어민들의 생활고는 그 때문에 더욱 더 심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불법조업에 화난 박문수... 영조에게 집요하게 직언하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칠장사에서 찍은 박문수길 안내판.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칠장사에서 찍은 박문수길 안내판.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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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실에 분개한 사람 중 하나가 그 유명한 박문수(1691~1756)다. 어사 박문수가 바로 그였다. 암행어사 박문수라고 안 하고 어사 박문수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그가 암행어사를 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박문수가 어사로 활동한 기간은 1년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암행하는 어사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어사였다.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 특사 같은 것이었다. 지방에 가서 지방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지휘하면서 왕명을 관철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박문수는 주로 중앙에서 활동하는 관료였다. 영조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 시대의 재정 문제를 진두지휘한 유능한 관료였다. 그는 왕실의 이익은 물론 백성의 이익도 함께 생각하는, 좋은 재정 전문가였다. 흉년이 들어 경기불황이 되면 백성들에 대한 식량 지원을 주도함으로써 서민 경제를 살리는 데도 앞장섰다.

거기다가 성격이 강직해서 영조한테 직설도 많이 했다. 박문수가 사신이 돼 청나라로 떠나는 날, 영조가 배웅을 해주면서 "과인이 믿는 것은 하늘뿐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박문수는 "군주가 자기 책임도 안 돌아보고 하늘만 거론하십니까?"라면서 "백성을 먼저 살피는 게 급선무입니다"라고 쏘아붙였다.

박문수 초상. 대한민국 보물 제1189-1호다.
 박문수 초상. 대한민국 보물 제1189-1호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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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담이 오가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박문수는 직설파였다. 그럴 때마다 영조는 "박문수가 아니면 누가 나한테 그렇겠나?" 하면서 웃어넘겼다. 이런 박문수를 두고 백성들의 칭찬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암행어사 박문수 신화'라는 엉뚱한 이야기가 창작된 것이다. 그가 훌륭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암행어사 경력은 분명히 없었다.

박문수는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 문제를 특히 심각하게 인식하는 관료였다. 48세 때인 1738년에는 병조판서 직을 사퇴하는 기회에 이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시키면서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재직할 당시인 1744년에는 훨씬 더 강도 높게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이때는 비선(飛船)이라는 쾌속선을 만들어 중국 어선을 추격하자고 영조에게 건의했다. 일반적인 전함으로는 쫓을 수 없으니 중국 어선에 맞는 쾌속선을 별도로 건조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런데 황해도 수영(水營)에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박문수는 영조 임금에게 400냥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TV 사극에서는 돈 1000냥이 우습게 오고가지만, 조선 후기에 노비 1명이 평균 5~20냥에 거래된 점을 감안하면 400냥은 상당한 거액이었다.

박문수의 건의를 받은 영조는 신하의 뜻이 가상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선 바다를 보호하자는 그 뜻이 고마웠다. 하지만 돈 400냥을 지원해달라고 하는 부분은 거슬렸다. 아무리 박문수이지만, 거액을 달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때 영조가 내뱉은 발언이 영조 20년 2월 27일 자(1744년 4월 9일 자) <영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무기 문제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전함을 만들었는데,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돈 400냥을 못 만들어서 이런 청을 한다는 말인가?"

영조의 거절... 백성들은 공포에 떨며 살아야 했다

영조.
 영조.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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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전함 13척으로도 일을 해냈는데 박문수는 그걸 못하느냐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핀잔을 하면서 영조는 박문수에게 "스스로 돈을 만들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것은 박문수한테 꼭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박문수의 요청을 그냥 거절할 수 없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박문수가 돈을 만들건 못 만들건 그것은 관심 밖이었다. 영조한테 달라고만 안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 형조참판 이주진이 '황해 수영에는 은근히 돈이 많습니다'라며 영조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사이좋은 박문수와 영조를 이참에 갈라놓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영조는 이주진에 대해서도 짜증을 냈다. 그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박문수의 요청은 들어주지 않았다.

박문수는 강직했다.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임금한테서 그런 반응이 나오자, 1개월 뒤에 또다시 동일한 건의를 했다. 임금이 짜증을 냈는데도 똑같은 건의를 했던 것이다. 박문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자 영조 역시 또다시 짜증을 내면서 상소문을 도로 돌려보냈다. 다시 한 번 퇴짜를 놓은 것이다. 

쾌속선을 만들어 중국 어선을 서해에서 몰아내자는 박문수의 건의는 그렇게 묵살됐다. 청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국고 잔액만 중시하는 조선 정부의 태도로 인해, 조선 어민과 연해 주민들은 해적선을 방불케 하는 청나라 어선들의 횡포 속에서 공포를 느끼며 살아야 했다.


태그:#중국 어선, #불법 조업, #박문수, #영조, #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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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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