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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전 풍경

지금의 현대식 건물(아래)을 짓기 전 연흥상회 풍경. 함석지붕과 나무문틀이 달린 건물과 마당에 받친 짐바자전거의 풍경이 정겹다.
 지금의 현대식 건물(아래)을 짓기 전 연흥상회 풍경. 함석지붕과 나무문틀이 달린 건물과 마당에 받친 짐바자전거의 풍경이 정겹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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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읍내 오일시장통, 마지막 싸전 '연흥쌀상회'. 가게문을 여니 40여년의 시간이 펼쳐진다. 큰 방 하나 넓이의 가게 안은 에어컨 바람 탓에 시원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사람 때문이 아니라 곡식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함이었다. 가게 안 왼편에는 나무책상 위로 브라운관 TV가 놓여져 있고 손때 묻은 장부 몇 권이 소박하게 쌓여 있다.

그 옆으로 수많은 곡식 자루들이 앉았다 일어섰을, 바퀴 달린 추저울이 흑백사진처럼 놓여 있다. 계량할 물건을 올려놓는 밑판은 검붉은색으로 반질반질하고 눈금이 새겨진 부분은 광약을 발라서 닦은 듯 녹쇠 속살이 드러나 있다.

대부분 공간은 곡식자루 차지다. 멥쌀, 찹쌀, 찰보리쌀, 겉보리, 콩, 녹두, 팥, 땅콩 등 알맞게 곡식을 담은 자루들이 뒷전에서는 누워 있고, 앞전에서는 나란히 서서 속을 내보이며 정갈하게 손님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가게 안 오른편 또 하나의 풍경. 담요 깔린 평상 위에 주인 연송정(76) 사장이 오래된 액자 속 그림처럼 앉아 있다. 연 사장의 손에는 연흥쌀상회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대추알만 한 나무 주판이 들려 있다. 저 주판을 통해 건너가고 들어온 돈은 얼마나 될까.

#. 정말 배고팠던 시절

연송정 사장.
 연송정 사장.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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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사장의 고향은 이북이다. 그의 억양에는 아직도 사투리가 남아 있다.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4살 때 어머니 잔등에 업혀 남하했다. 그 때만 해도 38선이 가로막히기 전으로 부산서 만주를 오가는 기차를 탔다.

연 사장 아버지가 5형제였는데 4형제가 고향 곡산을 떠나 강원도 영월군에서 7년 동안 머물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50년 2월 예산으로 와 정착했다. 연 사장 나이 11살이었다. 선친은 6살 때 영월에서 돌아가셨고 어린 시절은 궁핍했다.

장정이 되서도 늘 먹고 사는 일이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곡식장사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일 원 한 장 없으니 장사밑천이 있을 리도 없었다.

"배고픈 시절이었어. 이것저것 생각하다 쌀장사를 하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별다른 기술도 필요치 않고…. 처음엔 이장 저장 기웃거리다 짐바자전거를 한 대 장만했어. 그 자전거가 엊그제까지 뒷마당에 있었는데 고물장사 줘 버렸어. 30년 넘게 탄 건데…

곡식장사는 어떻게 했냐구? 별거 아녀. 새벽밥 져먹고 외장(시골장) 다니며 이것저것 잡곡들을 사와서 읍내장에 내다 팔았지. 짐바자전거에 저울하고 말통 싣고 나가면 홍성 금마 주변까지 돌아 다녔어. 갈 때는 빈 자전거지만 올 때는 곡식자루가 한짐 실렸는데…, 비를 만나면 애를 태우고…. 참 말도 못하게 고생했지. 그 때나 지금이나 곡식장사는 마진을 많이 남겨 먹을 수가 없어. 사람들이 곡식가격을 훤히 알고 있거든. 몸이 고되서 그렇지 품삯은 나오더라구.

그 땐 쌀이 참 귀했어. 쌀 가진 사람이 최고 행세할 때였으니까. 외장에 나가면 보리, 콩, 팥, 스슥(충청도에서 기장을 부르는 말) 등 전부 잡곡 일색이었지. 쌀 한가마니가 가마니 무게(3㎏)까지 93㎏였는데 3900원으로 기억이 나. 쌀 1말 가지면 일꾼 5명 품을 사던 때여. 지금이야 1말에 최고품이 1만8000원 밖에 더해?"

#. 쌀상회를 열다

인터뷰 도중 한 아주머니가 잡곡을 사러 오자 연 사장이 추저울에 신중하게 계량을 하고 있다. ⓒ
 인터뷰 도중 한 아주머니가 잡곡을 사러 오자 연 사장이 추저울에 신중하게 계량을 하고 있다. ⓒ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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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장을 돌며 장사를 하던 연씨가 지금 자리에 '연흥쌀상회'란 싸전을 열고 어엿한 사장이 된 건 1973년이다. 그 해에 허가(양곡소매업허가 제1-6호)를 받아서 간판을 달았으니 이 자리서 43년째다. 연씨 성을 따고 흥할 흥(興)자를 썼다. 그 땐 지금 가게 크기만 한 옴팡진 집이었는데 그래도 간판을 거니 외장에 갈 일도 줄었다.

간판을 걸자마자 서울로 올라가서 장만해 온 추저울이 아직도 연 사장과 함께 있다.

"저걸로(추저울) 정직하게만 달면 그 물건을 대한민국 어딜 가서 달아도 말썽이 없어 아주 정확하지."

물건도 오랜 세월을 곁에 두면 신용이 생기나 보다. 전자저울, 디지털저울 등 첨단저울이 다양하게 나왔어도 추저울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연 사장과 고락을 함께 했던 물건 중에 짐바자전거는 그렇게 고물장사 손으로 넘어갔고, 외장(시골장)을 돌 때 쓰던 말통과 됫박이 남았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추저울을 사기 전에 썼던 대저울은 계량현대화사업을 하면서 관청에서 걷어가 버렸다.

시장통에 자리를 잡았으니 시골에서 이고지고 오는 곡식을 사서 쌓아놓고 소매도 했지만, 물건이 쌓이면 서울에 있는 단골거래처로 실어 올리는 게 더 많았다.

사업을 하다보면 한 번쯤은 기회가 오는 법. 서울에 믿을만 한 거래처를 확보한 것이 연흥쌀상회가 크는데 발판이 됐다. 당시엔 읍내 역전을 털어 싸전이 50여군데나 됐다니 경쟁도 만만치 않았을터.

"서울 효자동 청와대 후문 쪽에 싸전을 크게 했던 이헌구씨라고 잊을 수가 없지. 10년이 넘도록 내 물건은 무조건 실어갔어. 돈 계산도 정확했고. 물론 내가 사놓은 곡식이 좋기도 했으니까. 그 분도 이득을 봤겠지. 그런데 오랫동안 거래를 하다보니까 깔린 돈(외상값)이 천만 원이 넘는거야. 큰 돈이었지.

불안한 마음에 '논을 사야겠는데 목돈이 필요해서 그렇다'고 하고 정리해 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얼마간 말미를 달라고 해서 기다리는데 돈이 준비됐으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그래. 저녁상을 잘 차려놓고 대접을 하는데 그 때 난생처음 복요리도 먹어 봤어. 그날 밤 거기서 자고 나니 아침에 가방 속에 외상값을 10원 한 장 빼지 않고 챙겨서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주는 거야.

깔린 돈을 정리했으니, 그 뒤로 자연스럽게 거래가 끊겼어. 지금 생각하면 참 후회가 돼. 그 분과 계속 거래를 하며 가게 규모를 더 키웠어야 했는데 말야. 특히 그날 용산터미널로 오며 차안에서 그 분이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어. 이 돈으로 시골가서 논을 사지 말고 자기하고 말죽거리에 땅을 사자구 하더군.

그 때 그 주변이 다 미나리꽝이었지. 그 얘기가 거짓말로 들렸어. 겁을 먹은 거지. 한마디로 배짱이 없었어. 그 때 그 땅 샀으면 강남 부자가 됐을 텐데, 사람은 타고난 대로 살기 마련인가봐. 허허."

#. 쌀 흔한 세상이라니

연 사장과 세월을 함께 한 나무주판과 됫박(왼쪽). 아직까지 종자개량이 되지 않은 나물콩을 한 줌 쥐어 보여 준다(가운데).
 연 사장과 세월을 함께 한 나무주판과 됫박(왼쪽). 아직까지 종자개량이 되지 않은 나물콩을 한 줌 쥐어 보여 준다(가운데).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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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에 대술 김진우 판사집안 처자와 결혼을 해 4남매를 뒀다. 절약해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가게터도 넓혔다. 2000년 12월 24일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 그 때도 기뻤지만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날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대기업에 취직해 자기 명함을 보여주며 용돈을 줬을 때라고 한다.

지금은 예산읍에서 쌀상회가 읍내 연흥쌀상회와 역전 쪽 신양상회와 태양상회 그렇게 3곳 밖에 남지 않았다. 4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많던 싸전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그래도 박기훈씨, 복은규씨, 김덕준씨…, 함께 싸전을 열었던 사람들과 예산천 양쪽으로 나무전이며 어물전 등 북적대며 장이 섰던 풍경이 지금도 연 사장 기억 속에 선명하다.

"오래 살으니 쌀로 돈을 사던, 쌀이 정말 귀했던 시절도 봤고 쌀이 이렇게 흔한 세상도 보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진 않았는데 요즘 쌀 한가마에 13만원 받기도 어려우니…. 쯧쯧. 앞으로도 몇 년간은 쌀이 더 흔할 것 같어. 하지만 계속 이렇게 흔할 수만은 없을 거여."

연흥쌀상회는 지금도 심심찮게 장사가 된다. 시골서 참깨며, 콩이며, 팥자루를 들고 팔러 오기도 하고 슈퍼로 가지 않고 쌀과 잡곡을 사러 오는 고객들도 꽤 있다. 곡식가격도 싸고 우선 물건이 믿을 만하다. 50년 가까이 한자리서 장사를 했으니 그 믿음이 오죽하겠나.

취급하는 곡식 종류도 종콩(백태, 메주콩), 방콩, 서리태, 강낭콩, 푸른 방콩, 유월콩, 땅콩, 녹두, 팥, 동부, 수수, 차조, 보리쌀, 쌀 등 가지가지다. 긴 세월 장사를 하는 동안 품종이 사라져 이젠 나오지 않는 잡곡도 있다.

"대추 방콩이라고 대추색깔나는 콩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어. 또 이팥이라고 라이타돌 만한데 젊은 사람들은 모를 거야. 죽을 쒀먹기도 하고 소가 지쳐서 병이 나면 하늘타리 뿌리를 같이 넣고 삶아 먹였지. 없어진 지 한참 됐어. 메조도 이 근방에서는 안 나온 지 한참 됐고..."

많은 잡곡들의 품종이 개량돼 옛 것과는 약간씩 모양새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 중에 나물콩 하나는 개량되지 않고 "옛날 그대로"라며 자루 속에서 꺼내 보여 준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연흥쌀상회에는 40여년 세월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다. 곡식을 팔러 오는 단골들이다. 40년도 훨씬 넘은 단골이 너댓분 있다는데 대술, 신양에 사는 70·80대 할머니들이 차비 한다면서 등에 지는 가방 속에 잡곡을 한두되씩 지고 나온단다.

#. 막내딸이 물려 받는댜

싸전 안은 중앙에서 가장자리까지 모두 곡식자루 차지다. 주인은 출입문 옆에 작은 평상을 하나 놨을 뿐이다.
 싸전 안은 중앙에서 가장자리까지 모두 곡식자루 차지다. 주인은 출입문 옆에 작은 평상을 하나 놨을 뿐이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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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상회 문을 열 거냐고 물으니 "내 대에서 끝날 줄 알았더니 예산 사는 막내딸이 이어 받겠다고 하대, 공무원하는 남편 퇴직하면 같이 하겠다는데 굳이 한다면 물려줘야지. 이 장사가 마진이 박해서 그렇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고 욕 먹을 일이 없어"라 한다.

평생을 바친 장사, 대를 이어갈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을 지탱하는 힘이 될 것 같다.

그것이 무슨 일이건 한우물을 파며 살아온 사람과 마주하면 삶의 지혜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 한가지 일을 통해 세상의 순리를 깨달은 사람이 풍기는 좋은 기운도 느껴진다. 연송정 사장이 그렇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싸전, #쌀상회, #추저울,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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