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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볕에 반짝이는 고추
 가을 햇볕에 반짝이는 고추
ⓒ 유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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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몰고 온 비구름이 물러가고 가을 햇살이 맑다. 추석 전날 전기건조기에 넣었던 고추를 일주일 만에 꺼내서 가을 햇볕 아래 펼쳐 놓는다. 건고추 50근, 개수로 따지면 3만개나 되는 선홍빛 고추가 햇볕을 받아 반짝인다.

태양초로 말릴 수 없는 여러 사정으로 전기건조기를 쓴다. 얼치기 생태주의자이긴 하지만 전기까지 써서 고추를 말리는 마음이 편한 건 아니다. 가능한 자연의 도움으로만 농사를 지으려는 유기농 농부이니 더욱 그렇다.

태양초를 만들려면 일손이 많이 들고 하늘이 도와야 한다. 태양초를 만들려면 날씨가 맑은 조건에서 보름 정도 하루에 몇 차례씩 고추를 뒤집어 주어야 하는데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여러 번 뒤집어 주지 않으면 고추 색이 하얗게 변하는 희나리가 많이 생긴다. 또 물기가 많은 상태에서 비가 하루나 이틀 오거나 습도가 높으면 곰팡이가 피어 모두 버려야 한다. 고추 농사 초기 고집을 피우다가 2백 근을 모두 버린 경험도 있다.

가을 햇살을 맞으며 아이들이 고추를 뒤집고 있다
▲ 고추 뒤집는 어린이들 가을 햇살을 맞으며 아이들이 고추를 뒤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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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재작년까지는 습기 많은 날을 대비하여 고추건조용 전기장판을 깔고 태양초를 만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처럼 며칠씩 비가 오고 구름이 끼면 태양초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완전 태양초는 비가 오지 않고 건조한 가을에나 가능하다.

난 날씨가 오락가락하면 80% 이상 건조기에서 말리고 마지막으로 햇볕에 널어 말린다. 이 정도 말리면 비가 며칠 오더라도 고추에 곰팡이가 필 일은 없다. 조금 덜 마른 고추는 이틀 정도 햇볕에 널어놓으면 잘 마른다.

천천히 마른 고추는 속이 투명하게 비쳐 씨앗이 보인다. 동맥에서 갓 나온 선홍빛 핏빛이다. 고온에서 쪄서 말린 고추는 몸을 돌고 심장으로 흘러가는 탁한 붉은색이 난다. 향도 다르다. 태양초나 저온으로 오래 말리는 고추는 달큼한 향내가 난다.

쳥양고추 50근을 말리려면 고추를 3만개나 따야 한다.
▲ 고추 따는 어머니 쳥양고추 50근을 말리려면 고추를 3만개나 따야 한다.
ⓒ 유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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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를 널고 나서 지난 주말부터 따서 후숙한 고추를 또 한가득 건조기에 넣는다. 비 예보가 한동안 없으니 이번에는 닷새 정도 건조기에서 말리고 사나흘 햇볕에 널어도 좋겠다.

고추 농사, 참 여러 농사 중에서 가장 고된 농사다. 2월에 온상에서 파종해서 90일을 키워 5월에 밭에 내고, 지주대 세우고, 줄 치고, 유기농 천연 농약 치고 (올해는 날이 뜨겁고 건조해서 두 번으로 끝났다), 서너 번 고랑 풀 깎고, 뙤약볕 아래서 쪼그리고 앉아 고추 따고, 사흘에서 보름 정도 말리고, 좋은 것만 골라 고춧가루 빻기까지.

고추는 달큼한 향내를 풍기지만, 농민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가격폭락에 따라 정부비축물량을 농협을 통해 긴급수매했다.
▲ 지난해 11월 고추 긴급 수매 가격폭락에 따라 정부비축물량을 농협을 통해 긴급수매했다.
ⓒ 유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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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춧값이 너무 형편없어서 고추 농사 그만 짓겠다는 농민들이 많다. 농민들은 '한근에 만 원은 넘어야 힘들어도 농사를 짓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건고추 값이 만 원을 밑돈지가 여러 해이고 올해는 산지 상인들이 7~8천 원에도 가져가지 않는다. 이웃 농민은 요즘 산지 상인 구경도 못한다며 한숨을 쉰다.

지난해에도 고추가격이 너무 좋지 않아서 정부에서 지난해 11월 농협을 통해 긴급 수매를 했다. 600그램 한 근당 5800원이었다. 고추재배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였지만 판로가 없으니 창고에 쌓아놓았던 고추를 농협에 냈다. 올해 고추 가격 폭락 원인은 중국산 수입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 비축 건고추 물량이 워낙 많은 것도 요인이라고 농협 관계자는 말한다.

투명하게 잘 마른 건고추가 가을햇볕을 받아 반짝인다
▲ 선홍빛 건고추 투명하게 잘 마른 건고추가 가을햇볕을 받아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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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올해 건고추 가격을 올리지 못했다. 관행 고추가격이 폭락하는 상황에서 물가 때문에 생산비와 생계비 올라간다고 고춧값을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값을 내리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유기농이든 관행이든 모두 한배에 탄 침몰 직전의 농민들이다.

한 해 애써서 농사지어 가을 햇볕 받으며 발갛게 마르는 고추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마음이 푸근해지고 가을 하늘처럼 마음이 맑아진다. 하지만 우리네 신음하는 농민들 처지를 보고 있자면 태풍에 몰려오는 비구름처럼 마음이 잔뜩 찌푸려진다. 우리의 주곡인 쌀 가격이 생산비에 한참 못미치는 12~13만 원대로 떨어진 데 이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양념 채소인 고추마저 이 지경이니 언제나 우리네 농사꾼들이 시름을 걷고 어깨를 활짝 펼까?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덧붙이는 글 | 유문철 시민기자는 충북 단양에서 아홉해째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고 녹색당 농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본 기사는 유문철 시민기자의 블로그 <단양한결농원의 유기농사 이야기>와 페이스북 (필명 유기농민)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유기농 고추, #단양한결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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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단양한결농원 농민이자 한결이를 키우고 있는 아이 아빠입니다. 농사와 아이 키우기를 늘 한결같이 하고 있어요. 시골 작은학교와 시골마을 살리기, 생명농업, 생태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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