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화기소대장이 되다

세월이 흐르면 변하지 않는 게 없다. 소대장 부임 6개월이 지나자 육군 제3사관학교에서 새로 임관한 소위 2명과 육군사관학교 출신 소위 1명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우리 중대로 전입해 왔다.

그러자 3소대장 안 소위는 대대 정보참모로, 화기소대 박한진 소위는 연대 인사참모로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내가 가장 선임으로 2소대장에서 화기소대장으로 보직 변경 명령이 났다. 원래 화기소대장은 중대 내 가장 선임이 맡는 자리였다.

그 시절 전우였던 박한진 소위(1970).
 그 시절 전우였던 박한진 소위(1970).
ⓒ 박도

관련사진보기

화기소대 박한진 소위가 연대로 떠나기 전날 밤 내 BOQ로 찾아와 이별주를 함께 나눴다.

그는 사나이답지 않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석별을 아쉬워했다. 그와 나는 비록 출신은 달랐지만(간보와 학훈단), 그런 출신 연고에 얽매이지 않고, 그동안 매우 친밀하게 5개월 남짓 동고동락했다.

특히 북한산 진관사 들머리 부대에서 근무할 때는 두 개 소대가 자주 배구시합을 했다. 그때 막걸리 한 말씩을 상품으로 걸었다.

그런데 우리 2소대가 2 : 1 비율로 화기소대를 이겼기에 그는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그때마다 자기 주머니 돈을 털어 막걸리를 샀다.

그의 눈물에 나도 공명하며 밤늦도록 두 사나이가 전우애를 다졌다.

편지 한 통

내가 화기소대장을 맡은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내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발신지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어느 시골이었는데 발신인은 도시 알 수 없는 여성의 이름이었다.

"존경하는 소대장님께

…오빠가 입대하기 전에는 세 식구가 단란하게 살았는데 지난 가을에 오빠가 입대한 후, 어머니는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두 달 전부터 병석에 누워 계십니다. 병석에서 매일같이 오빠만 부르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생각다 못해 소대장님께 하소연을 드립니다.

소대장님, 제 오빠를 잠시 동안만이라도 집에 보내주실 수 없는지요? 어쩌면 어머니가 오빠를 부르시다가 돌아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대장님! 어머니의 소원을, 이 소녀의 애원을 꼭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오빠가 오실 날을 저희 모녀는 학수고대하겠습니다.…."

나는 편지를 다 읽고서는 마음이 찡했다. 편지의 주인공은 우리 소대 한(韓) 이병의 여동생이라고 했다. 한 이병은 논산훈련소에서 101 보충대를 거쳐 한 달 전에 우리 중대로 전입해 온 신병이었다.

그는 아주 순박하게 생긴 녀석으로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입대했다. 한 이병을 불러 집안 사정을 물었더니 편지 내용과 일치했다. 나는 그 편지를 들고서 곧장 중대장실로 갔다. 중대장은 내가 건네준 편지를 읽는 둥 마는 둥 시큰둥했다.

대대장에게 건의하다

그 시절 한강 하류 근무지에서 기자(1969. 12.)
 그 시절 한강 하류 근무지에서 기자(1969. 12.)
ⓒ 박도

관련사진보기

"중대장님, 한 이병 특별휴가 좀 보내주십시오."
"안 돼요. 관보가 아닌 이상 보낼 수 없어요. 그런 편지 한 장으로 병사들 휴가 보내다가는 부대가 텅 빌 거요. 그냥 묵살해 버려요."
"그냥 뒀다가 탈영하면 어쩝니까?"
"그건 본인의 책임이오."

내 건의를 무 자르는 듯한 중대장이 야속했다. 나는 대도시 출신의 학벌 좋은 닳아진 녀석이라면 몰라도 시골 출신으로 약간 어벙해 보이는 한 이병의 경우는 그 모든 걸 진실로 믿었다.

나는 중대장에게 몇 차례 더 간청을 했지만 끝내 묵살되었다.

"박 소위는 인정에 약하단 말이야. 그게 당신의 큰 흠이오."

그 후 열흘 만에 그 소녀로부터 또 편지가 날아왔다. 종전의 내용보다 더 긴박했다. 나는 다시 그 편지를 들고 다시 중대장을 찾았지만 저번보다 더 듣기 싫은 핀잔만 들었다.

그 무렵 우리 중대 뒷산 심학산 OP(관측소)에 국방부장관이 시찰 올 예정이었다. 대대장은 장관이 온다는 예정일 이틀 전부터 아예 우리 중대로 출근하여 장관을 맞을 준비를 진두지휘했다.

그때 나는 선임 소대장으로 지시 사항을 착오없이 처리했다. 그러자 대대장이 나의 노고를 극구 치하하기에 바로 그 틈을 이용해서 한 이병 휴가 문제를 건의했다.

"그래? 그 자식 휴가 준비시켜 내일 대대 행정실로 바로 보내."
"공격! 감사합니다."

나는 마치 내가 휴기를 가는 듯이 좋았다.

그들의 연극에 속다

이튿날 한 이병은 소대원들의 부러움 속에 휴가 차림으로 대대로 갔고, 다음날 명령지를 보니 보름간의 특별휴가를 떠났다.

그가 부대를 떠난 지 며칠 후 어느 날 밤이었다. 소대 내무반장 김무웅 하사가 내 방으로 와서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낯익은 글씨였다. 발신인이 바로 그 한 아무개 여인이었다.

"어쩐지 낌새가 이상하기도 했고, 혹시 그 사이 한 이병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나 하는 염려로 편지를 뜯어보았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가 한 이병 앞으로 온 편지를 나에게 주었다.

"본인 허락없이 편지를 뜯어보는 것은 위법인데…."
"글쎄, 저도 뜯지 않으려다가 한 이병이 이미 휴가도 간 터이고…."

김 하사는 말꼬리를 흐렸다.

"사랑하는 OO씨

…왜 안 오세요. 자기가 시킨 대로 소대장 앞으로 두 차례나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로 안 되나요? 자기가 휴가 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려주세요.…."

나는 그 편지를 더 이상 읽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한 이병, 너 귀대만 해 봐라. 내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영창? 아니 영창보다 더 큰 벌을 줄 테다. 나는 그를 우직스럽게 봤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철저하게 우롱 당한 셈이었다.

그의 귀대 일이었다. 아침부터 그에게 벌 줄 궁리만 했다. 온종일 분노가 삭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은 해가 지도록 귀대를 하지 않았다. 밤 9시, 10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불안해졌다. 내 귀는 온통 출입문에 쏠렸다. 11시, 그래도 인기척이 없었다.

제발 귀대만 해 다오

그날 야간 근무를 나가지 않은 소대원들은 모두 취침시켰다. 나는 내무반 옆 내 방으로 가서 램프를 켜둔 채 그때까지 근무복장 그대로 책상에 앉아 문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밤 11시 30분, 그때까지도 인기척이 없었다. 갑자기 초조해졌다. 이 자식, 미귀(未歸)하는 게 아냐? 그때부터는 그에 대한 분노가 불안감으로 바꿨다.

'내 벌 안 줄 테니 제발 오늘 내로 귀대만 해다오.' 그때부터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그새 중대 행정반에서 몇 차례 연락이 왔다. 대대 상황실에서도 한 이병 귀대 확인 전화가 왔다. 두 곳 모두 돌아오는 대로 즉시 보고하라고 했다.

새벽 12시 10분전, 그제야 인기척이 났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내무반장 김 하사와 전령도 그때까지 취침하지 않고 초조히 기다렸나 보다. 내무반장은 그에게 빨리 소대장실로 가서 귀대 신고하라고 일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들어 와!"
"공격!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그는 경례가 끝나자마자 바지 주머니에서 청자 담배 한 갑을 꺼내 얼른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걸 그를 향해 집어던지며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 순간 나는 이성을 찾았다. 내가 양보하자. 내가 참자.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런 연극을 꾸몄을까? 아무튼 그의 편지를 내가 엿본 것은 위법이 아닌가.

그 방법이 나빴지만, 뜨거운 사랑 앞에는 부모도 조국도 없다고 한다. 그 뜨거운 청춘남녀의 불 같은 사랑으로 인류의 종족이 보전되고, 또한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키지 않는가! 지금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귀대했을 것이다. 그의 꿈같은 휴가 여운을 이 밤에만은 깨뜨리지 말자.

"가서 자!"
"공격!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EE-8 전화기를 돌려 곧장 중대와 대대 상황실로 한 이병의 귀대 보고를 하고 중대장 숙소로 전화를 돌렸다.

"공격! 중대장님, 한 이병 방금 돌아왔습니다."
"그 자식, 촌놈이 보통 아니야. 귀대하는 날 밤 12시 직전에 들어온 걸 보니까. 어때, 박 소위! 그 자식한테 속은 거 아냐?"

"아... 아닙니다. 중대장님."
"알았어요. 자, 그만 잡시다."

"네. 공격!"

미 메릴랜드 주 출신의 John W. Simms 상병이 한국전쟁에 참전코자 출발에 앞서 아내와 이별의 키스를 하고 있다(1950.).
 미 메릴랜드 주 출신의 John W. Simms 상병이 한국전쟁에 참전코자 출발에 앞서 아내와 이별의 키스를 하고 있다(1950.).
ⓒ NARA

관련사진보기


졸병 놈이 겁도 없이

내 방 밖에서 내무반장 김 하사의 화난 음성이 들렸다.

"새까만 졸병 놈의 새끼가 겁도 없이…."

김 하사가 한 이병을 단단히 벌 줄 모양이었다.

"김 하사! 그만둬."
"네. 알았습니다."

며칠 후 야간 경계 근무 순찰 중에 그의 초소를 찾았다.

"한 이병, 휴가 중 재미 많이 봤나?"
"네, 덕분에…."

그는 더 이상 말없이 히죽 웃으며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둑에는 봄바람이 몹시 찼다.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이 기자의 최신기사"아무에게도 악을 갚지 말라"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