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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12일 오후 6시 52분]

'새천년 한국을 이끌 차세대 100인'(2001년 <문화일보>), '한국의 미래를 열어 갈 100인'(2004년 <한겨레신문>), '한국을 움직이는 101인'(2005년 <서울신문>), '개신교분야 차세대 리더 10인'(2008년 <시사저널>)에 모두 이름을 올린 이는 바로 김해성 목사(지구촌사랑나눔센터 이사장)다. 김 목사에게는 '이방인들의 든든한 해결사', '이주노동자의 대부'라는 수식어가 늘 붙어 다녔다.

그런데 언론과 이주노동자 등으로부터 그렇게 추앙받던 김 목사가 교회 집사를 성추행하고, 여직원과 성관계를 가진 뒤 억대의 돈을 줬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성추문에 휩싸였다(관련 기사 : '이주노동자의 대부' 김해성 목사 성추문 의혹).

김 목사가 진보성향 한신대를 택한 이유

지구촌사랑나눔 대표 김해성 목사(자료사진).
 지구촌사랑나눔 대표 김해성 목사(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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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는 1961년 전북 익산군 춘포면 인수리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3대를 이어 내려온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다. 김 목사의 부모는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지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드린 끝에 첫 아들을 낳았고(김거성 목사), 이어 김 목사와 딸 둘을 더 얻었다.

부모의 기도 덕이었는지, 형제는 어렸을 때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고 이 꿈은 이루어졌다. 김 목사의 형은 한때 국제투명성기구 이사, 국가청렴위원회 위원으로 반부패 활동을 벌였던 김거성 목사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2년 양계장을 하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김 목사는 서울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등교 첫날 책과 도시락을 보자기에 둘둘 만 책보를 들고 등교했던 김 목사는 서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됐다. 더 큰 시련은 며칠 후 찾아왔다. 국어책을 읽던 김 목사의 사투리를 반 아이들이 흉내 내면서 교실은 아수라장이 됐고, 주눅이 든 김 목사가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담임교사는 반장을 시켜 여러 차례 그의 뺨을 때리게 했다.

단지 시골에서 올라와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하고 뺨까지 맞았던 기억은 어린 김 목사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당시의 경험이 훗날 따돌림과 차별에 시달리는 다문화가정,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대안학교 '지구촌학교'를 설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대동중학교를 거쳐 충암고등학교를 졸업한 김 목사는 1979년 한국신학대학교(현 한신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목사를 장래 희망으로 삼았던 터라 과를 선택하는 데는 갈등의 여지가 없었지만, 김 목사는 자신의 신앙배경이었던 성결교단의 신학과가 아니라 기독교장로회가 세운 한신대를 선택했다.

여기에는 연세대 신학과에 다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형과 한신대 재학 중 위수령 위반 사건으로 구속됐다 석방된 외삼촌의 영향이 컸다. 형과 외삼촌 모두 김 목사가 진로를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친구 유동운의 죽음 그리고 이해학 목사와의 만남

김해성 목사. 사진은 지난 2013년 제20회 한신상 수상 직후 5.18 항쟁 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신학과 친구인 유동운 열사의 추모비에 찾아간 모습.
 김해성 목사. 사진은 지난 2013년 제20회 한신상 수상 직후 5.18 항쟁 당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신학과 친구인 유동운 열사의 추모비에 찾아간 모습.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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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가 소속된 기독교장로회는 김재준·문익환 목사, 안병무 박사 같은 진보적 목회자와 지식인들이 활동한 진보적 신학 및 신앙공동체로서 복음의 자유, 신앙양심의 자유, 자주·자립 정신 둥을 목표로 활동해온 교단이다. 사회개혁, 민주화, 인권, 민중생존권, 통일운동 등에 크게 기여해왔다고 평가받고 있다.

1960~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한신대는 김 목사가 입학한 이듬해인 1980년과 1981년 두 해 동안 신학과 신입생 선발중지처분을 받는 등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한신대 신학과 79학번은 모두 50명. 이 중에서 성결교 출신은 김 목사 외에 1명이 더 있었다. 그가 바로 전남 광주 출신의 유동운이었다. 김 목사가 성결교 특유의 보수적이고 원칙적인 신앙을 고수했던 반면, 유동운은 이미 고교 시절부터 긴급조치 위반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렸을 만큼 사회 참여적 기질이 뚜렷했다.

성격과 가치관이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은 절친한 관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 목사는 이를 "가장 가까우면서도 결코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과 같은 관계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유동운은 김 목사에게 평생의 부채로 남게 되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전남도청을 지키고 있던 유동운이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던 것. 계엄확대와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경찰의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던 김 목사에게 친구 유동운의 죽음은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개신교 목사들의 조찬기도회는 김 목사에게 신앙에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한국 교회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고 목사가 되겠다는 마음도 사라졌다.

한동안 흔들리며 방황하던 김 목사가 다시 희망을 품게 된 것은 1980년 11월 성남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한신대 출신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수십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새벽기도를 놓치지 않았던 이 목사를 그는 혼돈 속에 있던 자신에게 '참 길'을 알게 해준 인생의 은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담임 목사와 교육전도사로 처음 맺은 인연은 지금까지 36년째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 팔뚝 아래가 잘린 필리핀 노동자를 만나다 

대학졸업 후 김 목사는 본격적으로 주민교회를 중심으로 성남 지역 사역에 매달렸다. 성남 지역의 특성상 교회 업무뿐 아니라 철거민, 노점상,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김 목사는 눈코 뜰 새 없었다. 1984년 주민교회의 결의에 따라 김 목사는 카메라 렌즈를 생산하는 공장에 취업했다.

현실의 노동은 매우 힘들었다. 주야 2교대 근무를 하면서 교회일과 지역 일을 같이하니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특히 야간작업은 피를 말리는 고통이었다. 이런 생활을 1년쯤 하다가 해고당했다. 이력서에 대학 졸업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됐다.

부당해고를 구제받기 위해 찾아갔던 노동부 근로감독관에게 김 목사는 "너 같은 새끼는 해고당해도 싸다"라는 말을 들었다. 공장에 노조가 설립되고 3년 동안의 투쟁을 통해 노동부로부터 복직명령을 받아냈지만, 끝내 복직하지는 못했다.

1986년 5월 1일 노동절에 개척교회인 산자교회를 설립했다. 교회 이름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성경 구절에서 따왔다. 이 시절 김 목사는 성남지역에서 '매 맞는 목사'로 통했다. 각종 시국집회나 시위의 맨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가 경찰과 충돌이 생길 때면 가장 먼저 폭행을 당했던 까닭이다.

그런 이유로 10여 차례나 병원에 입원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성남에 유세온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향해 "광주 학살 책임지고 노태우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가 경호원들에게 폭행당해 턱뼈에 심한 상처를 입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이른바 '3D 업종'을 중심으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사회에 대거 유입됐다. 성남지역에도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났고, 성남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김 목사에게도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을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지만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데다 짧은 외국어 실력 때문에" 그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이런 김 목사가 이주노동자 운동에 천착하게 된 것은 1992년 12월 한 필리핀 출신 노동자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성남지역에서 인권운동을 함께 하고 있던 이재명 변호사(현 성남시장)의 소개로 김 목사를 찾아온 필리핀 출신 불법체류자는 산업재해로 오른쪽 팔뚝 아래가 절단돼 있었다.

5인 이하의 영세사업장에는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않았던 당시 보상금은 고사하고 병원치료비조차 갚지 못했던 필리핀 출신 노동자의 딱한 사연이 김 목사의 마음을 움직였다.

치료비와 보상금을 못 주겠다고 버티던 사업주는 형사 출신의 보험대리점 사장을 내세워 김 목사를 협박하려 했는데, 마침 이 보험대리점 사장은 과거 정보과 형사시설 주민교회를 담당했던 사람으로 김 목사와도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김 목사와 싸워서는 못 이긴다"는 전직 형사의 충고에 사업주는 두 손을 들고 순순히 치료비와 보상금을 내놨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김 목사를 찾아오는 이주노동자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주로 임금 체불과 산업재해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출범을 주도하다

성추문 휩싸인 김해성 목사가 담임 목사로 있는 중국동포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모습(사진). 김 목사는11일 교회 예배서 공개사과가 예상됐으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추문 휩싸인 김해성 목사가 담임 목사로 있는 중국동포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모습(사진). 김 목사는11일 교회 예배서 공개사과가 예상됐으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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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상담소를 찾는 이주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상담의 주 대상은 자연스럽게 한국인 노동자에서 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들로 바뀌게 됐다. 결국 1994년 4월, 주민교회 지하 한켠을 빌려서 '성남 외국인노동자의집 / 중국동포의집'을 열었다.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을 상담하면서 김 목사는 법과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처지가 나아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김 목사의 주도로 1995년 7월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아래 외노협)가 만들어졌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외노협은 외국인 노동자 보호법 제정을 목표로 서명운동과 캠페인을 펼쳤다. 이듬해 6월 김 목사는 성남외국인노동자의 집 골목을 막고 불법체류자 단속을 벌이던 출입국사무소 직원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이유(특수 공무집행 방해)로 구속됐다.

김 목사 구속직후 이주노동자 50여 명이 서울 명동성당 입구에서 37일 동안 김 목사의 석방과 외국인노동자보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김 목사의 노력은 2003년 7월 국회를 통과한 '외국인 노동자 고용 등에 관한 법률' 등으로 결실을 맺었다.

2000년 4월, 김 목사는 성남을 떠나 중국동포들이 밀집한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사)지구촌사랑나눔'을 설립했다. 이후 서울 외국인노동자의 집과 중국동포의 집을 확장하기에 이르렀고, 세계선교신학대학도 열었다.

한국어, 중국어, 인도네시아어, 영어 등 4개의 신학과가 개설됐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해 인권상담을 주로 담당했지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인간적인 도움만 준 결과는 전적인 실패였다"라는 김 목사의 인식이 신학대학 설립의 배경이 됐다.

2001년 8월, 국가인권위는 크레파스 등에서 사용하는 '살색'이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한다는 김 목사의 청원을 받아들여, 한국기술표준원에 '살색'이란 색 이름을 바꿀 것을 권고했고, 2002년 11월 살색은 '연주황'으로 바뀌었다.

2004년 당시 초등학생이던 김 목사의 두 딸과 조카들이 이를 쉬운 한글로 바꿔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 최종적으로는 '살구색'이 표준으로 사용되게 됐다. 이 일은 201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선정한  '대한민국 10대 차별 시정사건'에 포함됐다.

2002년 경기도 안산과 광주, 2003년 경기도 양주에 외국인노동자의 집과 중국동포의 집을 각각 개소했다. 2004년에는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외국인노동자전용약국, 외국인노동자전용한의원을 잇따라 개설해 의료 서비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도왔다.

2008년 8월, 10개 지역 센터와 52개 사업을 분리시킨 김 목사는 서울 외국인노동자의집·중국동포의집,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광주외국인노동자의집·중국동포의집과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위탁사업에 전력해왔다. 특히 2011년 국내 최초의 초등교육과정 대안학교인 지구촌학교를 설립해 현재 교장을 맡고 있다.

2003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 '제1회 인권공적상'을, 2007년 10월에는 '국민훈장 석류장', 2008년에는 스리랑카 정부가 수여하는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2010년 '포스코 청암봉사상', 2013년에는 '한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언론이 어떤 얘기에 열광하는지 아는 천부적 감각을 지녔다"

주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김 목사 특유의 친화력과 저돌적인 추진력이 이 같은 성과를 이루어 낸 토대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에 와있는 이주노동자들을 훈련시켜 자국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이주민선교를 주창하는 김 목사의 방식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 목사와 함께 여러 해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을 해온 한 활동가는 "이주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20년이 넘도록 투쟁해 온 김 목사의 공적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종교우월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활동가는 특히 "김 목사가 사회의 이목을 끌만한 이벤트성 홍보를 통해 사업을 확장해왔다"며 이렇게 비판했다.

"몇 년 전 이주민 무료급식소에 한 중국 동포가 불을 질렀다. 여러 사람이 다치고, 방화를 저질렀던 사람도 4층에서 떨어져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결국 죽었다. 김 목사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방화범을 용서하고 이 사람 아들, 딸을 양육하겠다고 했는데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그런데 비슷한 일들이 많았다. 연쇄 방화를 저질렀던 다문화 소년 형제를 입양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고아가 된 다문화 가정 3남매도 자신의 자식처럼 돌보겠다고 했다. 이런 일들을 모두 쇼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김 목사는 언론이 어떤 이야기에 열광하는지를 아는 천부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의 한 관계자는 "험악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이주민 사역인데, 김 목사는 그 이주민 사역 초창기 때 굉장히 헌신적이었다"라며 "그런데 유명세를 타면서 후원금을 끌어오고,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김 목사는 명예욕에 사로잡혔고, 외형적 사역만 남았다"라며 "외롭고 힘든 사람들 위한 사역이 아니라 사역을 위한 사역,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사역만 남았다"라고 지적했다.

중국동포교회의 한 신도도 "김 목사는 목회보다는 자신의 명성을 드러내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인다"라며 "목회자라기보다는 사회사업가다"라고 꼬집었다. 심지어 이 신도는 "김 목사는 성도들을 앵벌이로 써먹고 있다"라며 "'앵벌이'가 많을수록 후원금도 많이 들어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태그:#김해성,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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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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