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가무단의 어린이들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한 고려인 마을 어린이들.

▲ 민속가무단의 어린이들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한 고려인 마을 어린이들. ⓒ 김영태


타인의 가슴 아픈 기억의 서사는 한 편의 예술 작품으로 재구성될 때 비로소 그 상처가 우리 가슴에 각인이 된다. 그것이 잊힌 역사라 할지라도 객관화된 장치를 통과할 때 비로소 그 진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통해 함께 울어주는 것만도 치유를 통한 공동체의 회복과 재생의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인'들의 아픈 역사와 삶을 다룬 연극 <나의 고향 연해주, 타슈켄트, 광주>가 지난 9월 2일에서 3일까지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총 4회에 걸쳐 상연되었다. 이번 연극은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된 후 힘들게 살아오다 소련이 해체된 후에 조국으로 돌아와 정착하고 싶어 하는 그들 선조의 고난과 그 후손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역사를 무대로 옮기다

추방 당하는 고려인들 소련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쫒겨가는 고려인들

▲ 추방 당하는 고려인들 소련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쫒겨가는 고려인들 ⓒ 김영태


연극은 이런 고려인들의 역사적 수난을 배경으로 현재 광주에 정착해 고려인상담소 센터장으로 일하는 고려인 3세 율리아(최효주 분)와 그녀의 할머니 김복례(윤미란 분)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고향의 정체성을 잃은 채 어느 곳에서나 주변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려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려인 수난사의 상징적인 인물은 포석 조명희(김수원 분) 작가와 그의 제자인 강태수(황민형 분) 시인이다. 조명희는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발전시켰으며 소련 망명 후 한인촌의 교사로 한인을 위한 문학 건설에 힘쓰다가 스탈린의 탄압정책으로 일본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으며 강태수 시인은 사범대학 구내 벽보에 불온한 시를 붙였다는 이유로 북극 원시림에 22년 동안 격리되었다.

복례의 행복했던 시절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는 젊은 시절의 복례(윤미란 분)

▲ 복례의 행복했던 시절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는 젊은 시절의 복례(윤미란 분) ⓒ 박영진


율리아의 할머니 김복례는 그런 과정에서 억울하게 남편과 자식을 잃었다. 타슈켄트(우즈베크의 수도)에서 며느리이자 율리아의 엄마인 올가(박유정 분)와 함께 살고 있다. 우즈베크 사람과의 결혼에도 실패한 손녀가 생계를 위해 어린 증손녀를 두고 한국으로 가겠다고 하자 '힘들 때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며 말린다. 하지만 율리아는 한국행을 결행한다. 율리아는 가족을 위해 머나먼 땅에 와서 갖은 수모와 어려움을 겪지만, 타슈켄트에 남은 가족과 함께 살아갈 날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버틴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 농민 열세 가구가 한겨울 밤 두만강을 건너서 연해주(沿海州), '물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우수리강(烏蘇里江) 유역에 정착한 것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흔히 러시아어로 '카레이스키'라 불리지만 그들은 스스로 '고려사람'이라 부른다는 '고려인'은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사는 한국인 교포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는 조명희 연해주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있는 조명희(김수원 분)

▲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는 조명희 연해주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있는 조명희(김수원 분) ⓒ 박영진


연해주는 옛 발해의 일부 영토였으며, 1914년 대한 광복군 정부가 활동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대부분 이주민은 농민들이었지만 일부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당시 한인들은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들은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버려졌고 이 과정에서 1만여 명이 도중에 숨졌지만, 그들은 황무지를 개척하고 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 외에 여러 독립국으로 분리되면서 고려인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가 확산되었다. 그들은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서 다시 유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중 조국의 땅, 광주시 광산구 월곡동에 형성된 것이 고려인 마을이다. 마을의 대표이자 극 중 '율리야'의 모델이 된 실재 인물 신조야씨는 현재 고려인종합지원센터를 맡아 한국어를 전혀 구사할 수 없는 고려인 동포들의 통역과 취업알선 등 정착지원을 돕고 있는데 증언과 자료수집 등 연극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

열차 속에서 죽은 아이를 뺏기지 않으려는 모습 강제로 추방되어 열차 안에서 가족의 죽음을 맞아하는 고려인들

▲ 열차 속에서 죽은 아이를 뺏기지 않으려는 모습 강제로 추방되어 열차 안에서 가족의 죽음을 맞아하는 고려인들 ⓒ 김영태


이번 연극의 제작을 주도했던 나모문화네트워크의 윤경미 단장은, 이 연극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자 했던 점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가족입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 가족은 서로 외면해서도 안 되며, 포기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려인들을 동포로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보듬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심장 없이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공연을 보신 분들이 심장이 다시 뛰어 이웃의 아픔을 바라봐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작했습니다. 그럴 때 가장 궁극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민족의 숙제를 풀어가는 또 하나의 길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갈등하는 복례 가족 복례는 가족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나 결국 남편과 자식을 잃게 된다.

▲ 갈등하는 복례 가족 복례는 가족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나 결국 남편과 자식을 잃게 된다. ⓒ 박영진


1999년부터 창작 뮤지컬, 연극을 중심으로 광주지역의 역사적 인물들을 발굴하여 무대에 올려온 나모문화네트워크는 광주를 가장 광주답게 했던 분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일을 해왔다. 사회운동가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오방 최흥종, 나환자촌을 중심으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사랑하고 보살핀 독일계 미국인 간호사 엘리자베스 쉐핑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연극은 고난과 저항의 역사를 그리되 그것의 재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가족과 민족이라는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야 할 미래의 희망을 그려냈다. 주연 배우들의 호연과 현대적 안무, 무대 공간 구성에 고려인 마을 민속가무단 어린이들의 춤도 곁들여져 극의 사실감과 완성도를 높였다.

광주문화재단의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으로 제작이 된 이번 연극은 역사적인 아픔을 겪은 광주 사람들과 조상의 땅에 정착하여 살기를 소망하는 고려인들이 함께 참여하여 만들었다. 언젠가는 고려인 스스로 그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나의 고향 연해주 타슈켄트 광주 윤경미 나모네트워크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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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리뷰어. 2013년 계간 <문학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명왕성 소녀>(2023), <물 위의 현>(2015), 캘리그래피에세이 <캘리그래피 논어>(2018), <캘리그래피 노자와 장자>, <사랑으로 왔으니 사랑으로 흘러가라>(2016)를 펴냈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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