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영화 포스터

▲ <터널> 영화 포스터 ⓒ 어나더썬데이,하이스토리,비에이 엔터테인먼트


영화 <터널>의 원작인 소재원 작가의 소설 <터널>은 '느닷없이' 시작한다. 무너진 터널 속에서 주인공이 정신을 차리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재난을 다루는 작품의 익숙한 틀을 거부한다. 온갖 군상들을 하나의 상황에 던진 후에 본성을 관찰하는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터널>에선 구조를 기다리는 이가 한 명이다. 재난을 극복하는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물이 바깥에서 알려준 생존수칙을 지키며 버티는 과정을 관찰한다. 터널 안에선 계속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터널 바깥의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변한다.

이런 변화에 대해 문학평론가 박진영은 소설에 실린 '터널론'에서 "작가의 시선은 보다 공정하다. 그는 최악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문제는 옳고 그름을 정당화하거나, 어느 한 편의 정의를 판결하는 데 있지 않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경을 또 다른 기회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라고 해석한다. <터널>은 부정부패가 만연한 시스템과 익명의 여론이라는 얼굴 없는 권력자들을 향해 작가가 표출한 슬픔과 분노의 응어리였다.

영화 <터널>은 <끝까지 간다>(2014)를 연출했던 김성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터널>의 연출을 맡은 계기에 대해 "아무 잘못 없는 평범한 사람이 사회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재난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요즘 현실에서 영화 같은 일이 너무 많이 발생한다. 그러한 사회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러한 이야기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 상황 자체가 할 이야기와 보여줄 것들이 많았다"라고 말한다.

<터널> 영화의 한 장면

▲ <터널> 영화의 한 장면 ⓒ 어나더썬데이,하이스토리,비에이 엔터테인먼트


<터널>은 여름 시즌에 나온 대형 영화답게 재난의 스펙터클과 리얼리티를 갖고 있다. 정수(하정우 분)가 차를 타고 가다가 터널이 무너지는 장면이나 구조를 위해 터널에 진입했던 구조본부 대장 대경(오달수 분)이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리는 장면은 재난의 규모와 생생함을 보여준다. 정수가 갇힌 터널은 실제로 무너진 것처럼 관객에게 극한의 불안과 폐소공포를 안겨준다.

소설에서 영화로 바뀌면서 상당한 첨삭이 이뤄졌다. 남편, 아내, 전문가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구도는 영화에서도 정수, 아내 세현(배두나 분), 대경으로 이어진다. 매몰된 상황에서 긴 시간을 홀로 지내는 소설 속 정수는 아내와 딸을 향한 사랑, 자기 삶의 반성, 절망적인 상황이 안기는 분노를 끊임없이 오간다. 엔딩은 한없이 슬프고 어둡기만 했다.

영화 속 정수는 결이 다르다. 터널에 갇힌 사람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데 있어 미리 계획한 연기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배우 하정우는 상황을 마주하며 즉흥적으로 감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배우 하정우가 날 것의 감정을 추가하며 영화의 정수는 소설의 정수와 다른 인물로 태어난다.

<터널> 영화의 한 장면

▲ <터널> 영화의 한 장면 ⓒ 어나더썬데이,하이스토리,비에이 엔터테인먼트


낙천적인 면과 유머가 가미된 영화의 정수에겐 무인도에 표류한 <캐스트 어웨이>(2000)의 척 놀랜드(톰 행크스 분)와 화성에서 포기를 모른 채 분투하는 <마션>(2015)의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 분)의 모습이 스친다. 개와 사료를 나눠 먹으면서 생존 의지를 불태우는 정수는 하정우만이 가능해 보인다.

대경도 마찬가지다. 냉정하고 이성적이던 소설의 '전문가'는 배우 오달수의 따뜻함과 순박함을 만나면서 새로이 창조된다. "도롱뇽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 안에 갇힌 사람은 사람이다. 자꾸 까먹는 것 같은데 사람이라고요"란 대경의 대사가 주는 강한 호소력은 오롯이 오달수가 만들었다. 하정우와 오달수가 불어 넣은 숨결은 소설과 달라진 엔딩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소설의 장소를 영화로 옮긴 공간 '터널'은 경제 성장을 앞세운 한국 사회가 배태했던 부패한 시스템과 안전불감증이 실체화된 얼굴이다. 여기에 각색에서 덧붙인 설정은 '터널'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소설의 정수가 원자력 발전소의 직원이었는데 영화에서 자동차 회사 세일즈맨으로 바뀐 점은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다.

<터널> 영화의 한 장면

▲ <터널> 영화의 한 장면 ⓒ 어나더썬데이,하이스토리,비에이 엔터테인먼트


IMF 외환위기와 자영업, 부동산 시장의 침체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으로 편입하려는 욕망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하늘로 치솟은 아파트값, 산업의 위용을 드러내는 대형 마트와 함께 큰 자동차는 중산층의 척도로 기능한다. 계약을 따내고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정수와 극 중에 나오는 취업 준비를 하는 여성 앞을 가로막은 '터널'은 현실의 거대한 성벽처럼 위용을 뽐낸다. 그들이 성벽에 부딪히며 벌이는 생존 투쟁은 마치 현실의 처절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터널>의 '터널'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 현실의 어두운 공간으로 의미를 확장한다.

일상에서 여러 사고를 마주하며 한국 사회는 더는 재난을 낯선 풍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숱한 재난을 겪은 뒤에도 부패한 시스템은 무너지지 않았고, 처벌은 언제나 솜방망이로 끝맺었다. 언론은 차갑게 진실을 외면했고, 대중은 남의 일이라며 망각의 강을 건넜다. 어느 순간 가해자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피해자와 다른 피해자가 싸우는 현실이 반복되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터널>은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영화는 붕괴한 성수대교, 무너진 삼풍백화점, 불타버린 대구 지하철, 바닷속으로 사라진 세월호 등 대한민국의 깊은 슬픔을 욕망의 심연인 '터널'에 투사하며 가만히 멈춘 사람들에게 그대로 있지 말고 '기억'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태도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터널>의 가치는 충분하다.

터널 김성훈 하정우 배두나 오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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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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