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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兵僧將' 네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는 영규대사 비, 보석사로 들어가는 일주문 바로 안에 있다.
 '義兵僧將' 네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는 영규대사 비, 보석사로 들어가는 일주문 바로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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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02번지,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충남 문화재자료 23호)가 있는 곳이다. 영규 대사를 기려 1840년에 세워진 이 비석에 의병승장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빗돌 앞면에 '義兵僧將' 네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의병승장비는 보석사 일주문 바로 안에 있다. 일주문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이내 의병승장비가 나오고, 비석 오른쪽부터 줄곧 이어지는 우람한 나무들 사잇길을 계속 걸으면 천연기념물 365호 은행나무와 만난다. 보석사의 후문이자 샛문은 은행나무 오른쪽 도랑 위로 걸쳐진 나무다리 끝에 걸려 있다. 그러나 그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보석사 경내로 들어가려면 일주문 뒤에서 오른쪽으로 걸어 도랑을 건너야 한다. 길은 금세 보석사로 이어진다. 몇 걸음일까, 셀 것도 없이 '보석사' 세 글자가 새겨진 현판의 2층 누각은 곧장 얼굴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절은 '**산 **사' 식의 이름을 가졌는데, 이 누각은 그냥 '보석사' 세 글자만 달고 있어 특이하다.

보석사(寶石寺), 사찰명 자체도 특이하다. 886년(헌강왕 12) 무렵 조구대사가 절을 창건할 때 절 앞 금광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을 조성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절 이름 보석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전성기 경주 시내에는 서른다섯 채의 금을 입힌 집이 있었다'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뜻이다. 그중 한 채가 김유신의 집 재매정댁(경주시 교동 98-7)이었다.

영규대사 비각과, 그 오른쪽 뒤로 선정비들이 보이는 모습
 영규대사 비각과, 그 오른쪽 뒤로 선정비들이 보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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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조구대사가 보석사를 세운 886년은 삼국통일 이래 신라가 번성을 구가하던 마지막 무렵이었다. 886년은 신라가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 36대 혜공왕 재위 기간(765∼780)보다도 훨씬 늦은 49대 헌강왕(875∼886) 12년으로, 처용이 나타난 879년보다 7년 뒤이다.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이다. 나라가 어수선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법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부적을 대문과 방문 위에 붙여둠으로써 질병과 화재가 예방되기를 빌었던 것이다.

조구대사가 보석사 앞산에서 금을 캔 때는 대략 그 무렵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아주 아득한 옛날 일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석동리 주민들은 마을 입구에 세워둔 '우리 마을 도랑 살리기' 안내판의 첫 문장을 '물고기가 돌아오는 도랑, 행복한 석동2구 마을'이라 적을 수 있었다. 한창 채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광산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 물이 맑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 도랑 살리기' 안내판 옆에는 '이곳은 가재가 서식하는 곳입니다'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하나 더 서 있다. BOD(생화학적 산소 요구량) 농도 1급수에 해당하는 오염되지 않은 계류나 냇물에서만 사는 가재가 여기서도 살고 있고, 그래서 우리 마을은 2001년 1월 1일 환경부로부터 자연 생태 우수마을로 지정되었다는 내용이다. 금산군수가 세웠다.

보석사 의선각 / 영규 대사는 보석사 의선각(사진의 오른쪽 건물)에 머물면서 수도 생활을 하였다. 금산전투에서 조헌 의병장 등 의병과 의승군들이 전사할 때 중상을 입은 영규대사는 보석사 일주문 옆까지 간신히 돌아와 그곳에서 운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운명 장소로 믿어지는 자리에는 대사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보석사 의선각 / 영규 대사는 보석사 의선각(사진의 오른쪽 건물)에 머물면서 수도 생활을 하였다. 금산전투에서 조헌 의병장 등 의병과 의승군들이 전사할 때 중상을 입은 영규대사는 보석사 일주문 옆까지 간신히 돌아와 그곳에서 운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운명 장소로 믿어지는 자리에는 대사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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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두 안내판과 일주문 사이 우람한 고목숲 그늘 아래에 모여 담소를 즐기고 있던 마을 어르신들은 또 다른 자랑거리를 내놓는다. 영규 승병장 기념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일주문 쪽으로 손가락을 들어 '저기!' 하였는데, 그것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답변이었다. 그리고는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영규대사비, 우리가 지켰지!"
"암, 암! 우리 아니었으면 지금 예서 볼 수 없어."

전두환 정권 때 영규대사비를 금산 7백의총으로 옮겨가려 할 때 마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그것을 저지했다는 자랑이다.

"영규대사는 우리 마을 보석사에서 수도를 하신 분으로, 임진왜란 때 처음으로 승병을 일으키셨는데 왜 비석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럼! 우리 마을의 자부심을 빼앗길 수야 없지. 지금 돌이켜 보면, 서슬 시퍼런 전두환 정권 땐데 우리가 참 용감했어."

대부분의 사찰이 본당으로 들어가는 누각에 별도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두는 것과 달리 보석사 누각에는 '보석사' 현판이 걸려 있다.
 대부분의 사찰이 본당으로 들어가는 누각에 별도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두는 것과 달리 보석사 누각에는 '보석사'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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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 의병승장비 앞으로 간다. 비각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글을 읽는다.

'의병 승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과 함께 순절한 기허당 영규대사의 순절 사적비(史蹟碑)로서 1840년(헌종 6)에 보석사 입구에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 이는 우의정 조인영이며, 금산군수 조취영이 글씨를 썼고, 비는 비각 안에 있다. 비의 앞면에는 큰 글자로 '義兵僧將'이 새겨져 있으나 자획(字劃)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왼쪽 면에는 창건화주(創建化主) 낙봉대인(樂峯大仁) 등 건립 당시의 관계 인물의 이름을, 오른쪽 면에는 앞면의 '義兵僧將'을 창녕위 김병주가 썼음을 기록하였다. 1940년 일본 경찰이 비각을 헐고 자획을 훼손하여 땅에 묻었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약하면, 영규 대사는 승병장으로서 금산 전투에서 조헌 의병장과 함께 순절하였으며, 비석은 1840년에 세웠는데, 앞면에 새겨져 있는 '義兵僧將' 네 글자가 심하게 훼손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경찰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영규대사를 기려 1840년에 세워진 <의병승장비> 비각 옆에는 승장비의 한문 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동판에 새겨둔 기념비가 있다. 그러나 글자가 작아 일반인이 읽기는 조금 어렵다. 이 기사 본문에 번역문 전문을 게재한다. 독자들이 읽고, 또 전파함으로써 임진왜란 창의 정신을 북돋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규대사를 기려 1840년에 세워진 <의병승장비> 비각 옆에는 승장비의 한문 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동판에 새겨둔 기념비가 있다. 그러나 글자가 작아 일반인이 읽기는 조금 어렵다. 이 기사 본문에 번역문 전문을 게재한다. 독자들이 읽고, 또 전파함으로써 임진왜란 창의 정신을 북돋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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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 울타리 오른쪽에 내용이 자세한, 작은 기념비가 하나 더 세워져 있다. 하지만 동판에 새겨진 글자가 너무 자잘하여 '義兵僧將' 네 글자에 견주면 훨씬 읽기가 어렵다. 아니, 읽을 수가 없다. 그 탓에, 모두들 힐끗 눈길을 주고는 그냥 지나쳐버린다. 하지만 이 기념비는 그렇게 홀대해도 무방한 빗돌이 아니다.

이 기념비는 의병승장비의 비문을 현대문으로 옮겨 소개하고 있다. 한문인데다 마모가 되어버린 승장비의 비문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답사자들을 위해 배려를 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가랴! '靈圭大師(영규대사) 毅禪閣碑(의선각비)'라는 제목 아래 새겨져 있는 전문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글자를 크게 해서 한 자 한 자 읽어본다. 제목은 한자로 적어 놓았지만, 본래 비문의 한문을 옮긴 것인 만큼 본문은 한글로 되어 있어 그런 대로 읽을 만하다. 동판의 글을 옮겨 적으면서 나는 이 비명(碑銘, 비에 새겨진 글)이 널리 전파되기를 소망한다.

갑사에서 보는 영규대사 기적비. 건물은 표충원이다. 기적비의 글은 정인보가 썼다.
 갑사에서 보는 영규대사 기적비. 건물은 표충원이다. 기적비의 글은 정인보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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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의 성은 밀양 박씨요, 호는 기허당이다. 그는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불문에서 깊은 학문을 쌓았고, 공주 (갑사) 청련암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대사는 평소에 뛰어난 힘이 있었으며, 지팡이로 무술을 연마하기를 좋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피란길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대사는 통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사흘 동안 통곡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관가에 들어가서 의병장으로 나서기를 자청하였더니 공주목사 허욱은 그의 장한 의기에 감복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대사는 곧 승병 수 백을 모집하여 다른 방어장들과 함께 청주에 침입한 일본군과 싸웠다. 관군은 모두 패하여 달아나고 대사가 거느린 의병만이 적과 맞서 싸우는데 마침 의병장 조헌이 의병을 거느리고 달려오니 마침내 청주 서문에서 적군은 몰래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조헌이 금산에 들어온 적군을 진격하려 하므로 대사는 이를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대사는 '조공이 혼자서 죽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그대로 함께 따라나섰다. 금산읍에서 십 리쯤 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마침 비가 쏟아져서 우리 군대는 미처 진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대사는 '전쟁이란 준비 태세가 갖추어진 뒤에라야 후환이 없는 것이니 너무 서두르지 말고 먼저 태세를 정돈한 뒤에 싸우자'고 하였으나 조공은 '적의 병력은 우리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소. 나는 다만 군대들에게 충의의 정신을 고무하여 의기로 적의 기세를 꺾으려는 것뿐이오' 하고 하며 싸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에 적군이 습격해 왔는데 아군은 병력이 약할뿐더러 후속 부대가 이르지 않아 조공이 전사하고 전군이 모두 죽었다. 어떤 사람이 '적군이 이렇게 몰려드는데 왜 빨리 이곳을 떠나지 않느냐' 하였으나 도리어 대사는 그를 꾸짖으며 '이제는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살기를 도모하겠느냐' 하며 더욱 힘을 내어 싸우다가 또한 장렬하게 순절했다. 선조 25년(1592) 8월 13일이었다.

정부에서는 대사가 나랏일에 목숨을 바쳤으므로 불교 의식에 의한 화장법을 쓰지 않고 유교의 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지금 공주군 개류산에 대사의 무덤이 있다.

금산에 중용사가 있어 조공의 신위를 모시고 대사도 함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2백여 년 뒤 금상(헌종) 원년에 불교신도 대인大仁이 군의 진악산 서쪽 기슭에 따로 사당을 짓고 대사의 초상화를 모시고 명칭을 의선각(毅禪閣)이라 하고 대사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 사무를 주관한 이는 금산군수 조취영이요, 건물을 세운 이는 충청도관찰사 충주목사 조헌영이다. 비문은 헌종 6년(1840) 우의정 조인영이 지었고, 비를 세우는 데에 재정을 담당한 이는 낙봉대인(樂峯大仁) 춘담태연(春潭太演)이고, 도감(都監, 공사 책임자)은 춘파재첨(春坡載沾) 벽담쾌일(碧潭快一) 정능(正能) 두신(斗信)이요, 새긴 사람은 유필주 유대주 최광로이다.

1980년 문화재위원 임창순 역술(번역하여 적음) 장암 이곤순 씀'

영은사 / 공주 공산성 안에 있다.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신을 하기도 했던 이 절은 영규 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킨 임진왜란 유적이기도 하다. 일명 묘은사로 불리기도 하는 이 절에서 승병 훈련을 실시한 영규 대사는 7월 15일경에 청원 안심사로 옮겨갔다.
 영은사 / 공주 공산성 안에 있다.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신을 하기도 했던 이 절은 영규 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킨 임진왜란 유적이기도 하다. 일명 묘은사로 불리기도 하는 이 절에서 승병 훈련을 실시한 영규 대사는 7월 15일경에 청원 안심사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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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대사는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했다. 황인규의 논문 <기허 영규와 의승의 청주성, 금산성 전투>에 따르면, 영규대사는 갑사, 금산 보석사, 해남 낙가사 등지에서 수도 생활을 했고, 담양 서봉사, 공주성 영은사, 청주 안심사, 옥천 가산사, 문경 혜국사 등지에서 승병을 훈련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승병을 일으킨 영규대사는 갑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주성 영은사에서 승군들을 훈련한 후 7월 15일경에 청원 안심사로 이동했다. 8월 1일부터 시작된 청주성 탈환 전투를 위해서였다. 청주성 전투 승전에 대해서는 갑사의 누리집과 <선조실록> 1592년 9월 11일자 기사가 간결하게 설명을 해준다.

갑사 누리집과 <선조실록>의 영규대사 청주성 탈환 기사

갑사 누리집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해 여름에 왜구가 청주 지방까지 이르러 청주가 점거당하자 영규대사는 승려 700명을 엄격히 선발하여 승군을 일으켰다. 청주 지방의 승려 300명도 참여하여 영규대사의 1000명 승군은 홀로 싸웠다. 8월에 영규대사의 승군이 청주를 쳐들어가자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왜병과 싸워 청주를 되찾았다.

선조실록 : "충청도는 적의 요새가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적들이 청주를 차지한 지가 이미 넉 달이 넘었습니다. (중략) 중 영규가 의로움을 분발하여 스스로 중들을 많이 모아 성 밑으로 진격하였는데 제일 먼저 돌입하여 마침내는 청주성을 공략하였습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천 명의 중들이 돌진, 군사들이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큰 무공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와 재기도 심상치 않으니 우선 상을 주고 환속하게 하소서" 하고 비변사가 아뢰었다.


안심사 / 충북 청주시 안심사는 영규 대사가 청주성 전투를 시작하기 전 군사들과 머물렀던 사찰이다. 사진은 석탄일을 앞두고 괘불을 거는 등 행사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다.
 안심사 / 충북 청주시 안심사는 영규 대사가 청주성 전투를 시작하기 전 군사들과 머물렀던 사찰이다. 사진은 석탄일을 앞두고 괘불을 거는 등 행사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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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 보석사 경내로 들어선 후 가장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문화재자료 29호인 의선각이다. 의선각은 영규대사가 수도 생활을 한 절집이다. 그 외 유형문화재 143호인 대웅전은 보석사가 자랑하는 주요 문화유산이다.

대웅전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절집은 영규대사의 호 기허당을 집 이름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아니지만, 다시 한번 유심히 쳐다보게 된다. 기허당에서 몇 발 더 나아가면 천연기념물 365호 은행나무로 가는 샛문에 닿는다. 하지만 이 글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돌아나와 다시 의병승장비에서 오른쪽으로 숲길을 걷는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1천 년을 넘긴 것으로 추정되는 고목이자 거목이다. 은행나무는 아마도 영규대사가 의선각에서 수도에 정진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왜적들과 싸우기 위해 칼을 들고 나서는 장면도 목격하였을 것이다.

나는 잠시 후, 영규대사를 뵐 수는 없어도 은행나무와는 만나게 될 것이다. 어쩐지, 슬프다.

보석사 옆을 흐르는 산골 물길 옆에는 수령이 1천 년을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호)가 있다. 아마도 이 은행나무는 영규 대사가 보석사에 머물면서 수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보석사 옆을 흐르는 산골 물길 옆에는 수령이 1천 년을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호)가 있다. 아마도 이 은행나무는 영규 대사가 보석사에 머물면서 수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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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영규, #보석사,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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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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