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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김영란법의 언론인 적용 여부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도 부패와 청탁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론이 왜 크게 일어났는지 자성하는 언론을 찾기 어렵습니다. 많은 언론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언론 윤리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도 여기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영란법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있어야 언론이 바뀔 수 있을까요. <오마이뉴스>는 언론의 자성을 기대하며 언론의 민낯을 공개합니다. - 기자말

'빨아주는 기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띄워주는 기사를 뜻합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쓰는 말입니다. 다소 저속해 보이는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기레기'라는 단어가 널리 퍼진 것도, 이러한 기사들 때문이겠죠.

기업 광고가 수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언론은 경제 권력에 취약합니다. <오마이뉴스>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겠지요.

이런 상황 탓에 언론계에는 기업 띄워주는 기사를 써야하는 기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라고 이런 기사를 쓰고 싶겠습니까. 아마 다들 스스로 부끄럽다고 느낄 겁니다. 기자들은 자존심이 셉니다. 많은 기자들은 정치·경제 권력을 감시하는 기자가 되겠다는 초심을 잊지 않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 생각은 얼마 전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한 언론사 A기자와 통화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중견기자인 그의 말이 아직도 뇌리에 울립니다.

"기업들 돈으로 해외출장 다녀왔는데, 비판 기사 쓰라고?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기레기'라는 말은 사라질 수 있을까요?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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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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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A기자에게 전화한 건 신세계그룹이 후원한 해외취재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세계는 지난달 21~26일 63개 매체의 기자들을 데리고 미국 플로리다에 다녀왔습니다. 기자들은 이곳에서 미국 유통업체 터브먼이 운영하는 쇼핑몰 4곳을 둘러봤습니다. 신세계와 터브먼이 왕복항공권과 숙박비를 비롯해 모든 비용을 댔습니다.

해외 취재를 다녀온 뒤, 이곳 쇼핑몰 홍보성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기사에는 터브먼과 신세계그룹이 손을 잡고 오는 9월 문을 여는 국내 최대 규모의 쇼핑몰도 소개됐습니다. 신세계는 기자들의 해외취재 비용을 지원한 대가로 막대한 홍보효과를 거둔 셈입니다.

A기자도 이번 해외취재를 다녀왔습니다. 그에게 이번 취재의 사실관계를 물었습니다. 그는 "다른 업계 해외취재를 가면 놀러 가는데, 이번에는 국립공원 한 군데밖에 안 갔다", "진짜 재미없었다. 다시는 유통업계 해외출장을 가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놀랐습니다. 공짜 해외취재에 대한 그의 생각은 여느 기자들과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5월 손해보험협회 기자단이 협회 후원으로 외유성 유럽 취재에 다녀온 것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이곳 기자단 간사는 외유성 취재를 인정하면서도 "열심히 취재했다는 점을 감안해 달라"고 했습니다. 반면, A기자는 "이번 해외취재는 외유가 아니었다"면서 짜증을 냈습니다.

A기자에게 돌직구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업 후원으로 해외취재를 가서, 기업이 원하는 홍보성 기사를 쓴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답변입니다.

"언론사가 (비용을) 부담했다면, 나도 안 갔다. 내가 왜 가나. 그런 식으로 하면 해외출장은 아무도 안 간다. 업체 빨아주는 기사를 쓰는데, 언론사가 왜 비용을 내고 (해외취재를) 가나.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사가 아닌 기업 홍보성 기사를 써야 하는 해외취재라면, 가지 않는 게 맞겠지요. 기업이 해외취재 비용을 댄다고 해서, 여기에 응하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A기자와 15분가량 통화했습니다. 저는 해외취재를 다녀온 후 홍보성 기사를 쓴 것을 두고 취재윤리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고 여러 차례 물었습니다. A기자는 "내가 잘못 갔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서 버럭 화를 냈습니다. 제게 모욕적인 말도 했습니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씁쓸했습니다. 기자들이 "기레기" 소리를 듣고 언론이 "찌라시"라 불리는 세태와 맞물려,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28일 헌법재판소가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적용 대상에 언론인을 포함시킨 것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정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겠죠.

한 경제지 기자는 제게 "이러한 잘못된 관행에 문제제기하는 목소리가 최근에는 없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A기자는 자신과 전화통화한 내용을 기사로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기자들의 자성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 일부를 공개했습니다. 그에 따른 비판이 나온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기자 사회가 조금이라도 바뀌길 기대해 봅니다.

[클릭] 김영란법과 언론인 기획기사


태그:#김영란법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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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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