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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포운하 모습.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차례 굴착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현재의 모습만 남아있다
 굴포운하 모습.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차례 굴착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현재의 모습만 남아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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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부터 10일까지 당진에서 열린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3일째 일정은 내포지역 해양문화 답사이다. 9일(토) 오전 9시, 세한대 당진캠퍼스를 떠난 일행이 한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굴포운하 유적지다.

"아니! 우리나라에도 운하가 있었단 말인가?" 하고 의아해하며 굴포운하가 있었던 현장을 가니 움푹 패인 곳에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수로가 나타났다.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간 약 7㎞에 달하는 운하 유적은 제일 낮은 곳이 3m이고 제일 높은 곳은 50m이다.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지 않고, 훼손이 진행 중이며 자연 하천, 논밭 등의 경작지로 되어 있는 부분도 많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오석민 연구실장이 마이크를 잡고 굴포운하가 생긴 이유를 설명했다.

물살이 세 난파선의 공동묘지이자 수중문화재 보고인 안흥량 모습. 안흥량에서도 관장목은 우리나라 해역 중에서도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해역이다
 물살이 세 난파선의 공동묘지이자 수중문화재 보고인 안흥량 모습. 안흥량에서도 관장목은 우리나라 해역 중에서도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해역이다
ⓒ 다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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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외항에서 꽃섬 인근의 사자바위 부분이 급물살이라 천수만으로 들어온 배가 굴포를 통과해 서울로 가기 위해 운하를 뚫었습니다. 사자바위 부분에는 암초도 많고 물살이 세서 이곳 사람들 얘기로 '밀물이 되어 물이 어벙벙할 때 바다를 건넙니다. 물살이 가장 센  '관장목 부분에서는 오리발목이 부러진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편안한 길목'이라는 '안흥량(安興梁)'... 원래는 뱃길이 힘들어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렀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 뱃길은 일종의 산업도로였다. 육상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세곡(稅穀)은 대개 뱃길로 운반되었다. 특히 서해바다는 고려시대 개경, 조선시대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아울러 서해바다는 중국과 교통하던 경로이다. 백제 때는 남조, 고려시대에는 중국사신을 맞이했던 객관이 있었다. 문제는 이곳 뱃길이 험난해 수많은 배들이 난파당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 남쪽의 속칭 '쌀썩은 여'는 조운선이 난파해 쌀이 썩어 붙은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물살이 가장 센 바다는 황해도 장산곶, 충청도 관장목, 전라도 울돌목, 경상도 미조목이다.

안흥량에서도 가장 물살이 센 관장목을 보기 위해 답사에 나선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회원들이 마도해변에서 바다를 보고 있다
 안흥량에서도 가장 물살이 센 관장목을 보기 위해 답사에 나선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회원들이 마도해변에서 바다를 보고 있다
ⓒ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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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량은 신진도와 마도에서 이어지는 관수각과 가의도 사이의 해역을 말하며 안흥량 가운데서도 물살이 가장 센 곳이 관장목이다. 조운선과 중국 무역선, 사신 행렬이 지나는 안흥량은 물살이 세고 안개가 자주 끼어 원래는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렀지만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해 '편안한 길목'이라는 뜻의 '안흥량(安興梁)'으로 개명했다. 

국가재정의 근간인 삼남지방 세곡(稅穀)은 전라도 군산을 거쳐 진포-마량진 -원산도-안면도-안흥진-소근진-황금도-난지도를 거쳐 경기만으로 이르렀다. 세곡 운반선이 안흥량에서 끊임없이 난파당하자 조정에서는 운하굴착을 시도했다. 굴포는 안흥량을 거치지 않고 경기만으로 통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운하굴착의 역사를 보면, 고려 인종 12년(1134년) 7월 내시 정습명이 약 7리를 남기고 중단했고, 고려 공양왕 3년(1391년) 7월에는 왕강이 10리 정도를 굴착했지만 토사 때문에 중단했다.

조선 태조 시절 '최유경'과 '남은'이 암반층 때문에 굴착이 불가능함을 고하자 태종 12년에는 하륜(1412년)이 갑문식 운하를 만들어 조운선이 도착하면 작은 배로 옮겨 실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수차례 시도했던 굴포운하가 실패한 이유를 오석민 연구실장은 이렇게 지적했다.

▲500석 조운선의 짐을 150석 배로 옮겨 싣는 번거로움 ▲천수만 수심이 낮아 대형조운선이 운하에 접근곤란 ▲암반층으로 인해 항행 곤란 ▲운하인근 지반이 약해 토사가 운하로 흘러내림

우리나라 유일한 안면운하...운하를 만들기 전 안면도는 본래 육지였다

우리나라 유일의 안면운하 모습으로 앞에 보이는 다리는 드르니에 보도이고 저멀리 안면대교가 보인다
 우리나라 유일의 안면운하 모습으로 앞에 보이는 다리는 드르니에 보도이고 저멀리 안면대교가 보인다
ⓒ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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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는 원래 태안군 남면과 연륙되어 있었고 지명도 안면곶이었다. 그런데 조선 인조(1623~1649)때 태안 아전 방경장이 안면도와 남면 사이를 끊어 뱃길을 냈다. 이에 따라 홍주목을 비롯한 천수만에 소재한 군현의 경우 백사수도를 통과하면서 200여리가 단축되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보존센터... 태안해역의 수중문화재 발굴보존

마도에서 관장목해역을 바라볼 수 있는 지역을 답사한 일행의 다음 목적지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보존센터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난파선의 공동묘지이자 수중문화재 보고인 태안해역에서 2007년부터 태안선, 마도1호선, 마도2호선, 마도3호선, 마도4호선을 발굴했다.

탈염처리 중인 고선박들을 둘러보는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회원들
 탈염처리 중인 고선박들을 둘러보는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회원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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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보존센터에서 경화처리 중인 고선박유물.
20~30년간 경화처리 후 전시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보존센터에서 경화처리 중인 고선박유물. 20~30년간 경화처리 후 전시된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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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선은 강진에서 만든 청자 2만 2천여점을 싣고 가던 청자운반선이고, 마도1~3호선은 고려시대 곡물운반선이다. 마도4호선은 바다에서 최초로 발견된 조선시대 조운선이다. 시굴, 탐사과정에서 우리나라를 오가던 중국 상인들의 흔적과 120여점의 닻돌을 발굴했다.

철제 닻이 없던 시절에 돌에 밧줄을 묶어 닻으로 사용했던 닻돌 모습. 움푹 패인 부분을 밧줄로 묶어 사용했다
 철제 닻이 없던 시절에 돌에 밧줄을 묶어 닻으로 사용했던 닻돌 모습. 움푹 패인 부분을 밧줄로 묶어 사용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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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안내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 수중문화재 보존처리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수중문화재를 발굴했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공기 중에 노출되는 것이다. 안정된 상태로 있던 유물이 공기와 접촉하게 되면 급격한 환경변화로 훼손된다.

연구소에서는 내부에 깊숙이 침투된 소금기를 제거해주는 탈염처리를 거쳐 경화처리실에서 20~30년간 보존처리 후 전시한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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