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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는 없다

유발 하라리 교수가 쓴 책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교수가 쓴 책 '사피엔스'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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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즉, 돈), 제국, 종교는 모든 대륙의 사피엔스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구촌 세상으로 끌어들였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는 큰 그림으로 보면 다수의 작은 문화에서 몇 개의 큰 문화로, 마지막에는 하나의 전지구적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 인간사 역학에 따른 필연적 결과란다. 그는 역사를 결정론으로 설명되거나 예측될 수 없는 카오스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게다가 역사는 이른바 '2단계'(level two) 카오스계다. 1단계 카오스는 날씨처럼 자신에 대한 예언에 스스로 반응하지 않는 카오스이지만,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장이다. 정치도 2단계 카오스계다. 하여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적 이해 지평을 넓히기 위함이다. 즉,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역사가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는 없다. 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일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처럼 보고 있다. 하여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새 숙주(宿酒)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다.

바이러스 같은 기생체는 숙주의 몸속에서 산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는 인간의 마음속에 침전되어 있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gene)라 불리는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밈'(meme; 문화적 구성요소 혹은 모방)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역사는 교차로에서 교차로로, 뭔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처음에는 이 경로를 택했다가 다음에는 저 경로로 진입하면서 나아간다. 기원후 1500년 경 역사는 전대미문의 중대한 선택을 했는데, 하라리는 이것을 '과학혁명'이라 했다.

기원후 1천년 어느 스페인 농부가 잠이 들어 5백 년 후에 콜럼버스가 이끈 선원들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깼다고 하자.

하지만 그가 깨어난 세상은 매우 친숙해 보일 게다. 그러나 만일 콜럼버스의 선원 중 한 명이 같은 식으로 잠에 빠졌다가 21세기 아이폰 벨 소리에 잠이 깼다면,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와 있다고 당황할 게다. "여기가 천국인가, 지옥인가?"하고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그 5백년의 변화를 나는 유라시아 동쪽 끝에서 당대에 다 체험했다.

1945년 7월 16일, 인류는 역사를 바꿀 수도 끝장낼 수도 있는 힘을 얻었다

해방둥이인 나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6.25 한국전쟁을 겪고 피난까지 갔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라 학교엘 갔지만 2학년 때까지 책걸상도 없었고, 미국에서 보내온 분유가루 끓인 걸로 점심을 때우기가 다반사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게 절반 정도였고, 여학생들은 그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전형적인 농업중심 국가였고 국민소득은 2백불 이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았으나, 70년대 이래로 남한은 산업사회로의 급격한 이행에 성공함으로써 지금은 국민소득 3만 불을 내다보고 있다.

언필칭 지금 나는 후기산업시대의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토플러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당대에 제1물결에서 제2물결을 거쳐 제3의 물결 시대까지 관통해서 살아 온 게다.

인류역사에서 지난 500년 동안 인간의 힘은 경이로울 정도로 커졌다. 1500년 지구에 살던 호모 사피엔스의 수는 5억 명이었지만, 오늘 날에는 70억 명으로 늘어났다. 1500년에 인류가 생산한 재화와 용역의 총 가치는 2500억 달러였지만, 21세기 인류의 연간 총생산량은 60조 달러에 가깝다.

5백 년 전 인류가 하루에 소비한 에너지는 약 13조 칼로리였지만, 지금 우리는 1500조 칼로리를 소비한다. 500년 동안 인구는 14배로 늘어났지만, 생산량은 240배, 에너지 소비는 115배로 늘어난 게다.

하지만 저자는 지난 500년간 가장 눈에 띄는 단 하나의 결정적 순간으로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의 사건을 든다. 정확히 그때, 미국 과학자들은 사막에 첫 원자폭탄을 터뜨렸다. 그 순간 이후 인류는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킬 능력뿐 아니라, 역사를 끝장낼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현대과학의 속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무엇이 과학과 정치와 경제의 연대를 구축했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라리는 현대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걸 지적한다.

그 첫째는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다. 그는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라,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랬다. 현대과학은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고, 관찰과 수학의 결합, 이론기반의 기술개발이라는 세 측면에서 새로운 힘을 획득하게 되었다.

현대 과학은 늘 경험적 관찰들을 모은 뒤 수학적 도구의 도움으로 그것들을 하나로 결합했다. 뉴턴은 자연의 텍스트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들은 인간을 창조할 때 죽음을 필연적 숙명으로 만들었고, 인간은 그 숙명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하지만 진보적 사도들은 마냥 이런 패배주의적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자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기술적' 문제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사람이 죽는 것은 신이 숙명적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심근경색이나 암, 감염 같은 다양한 기술적 실패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기술적 문제에는 기술적 해답이 있기 마련이다.

중국의 만성적 통일과 유럽의 만성적 분열, 18세기를 가른 결정적 차이

하라리 교수는 2050년이 되면 일부 인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제 과학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상상의 세계를 형성할 게다. 과학연구에 막대한 자금이 지원되는 이유는 그 연구가 모종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누군가 믿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과학과 제국과 자본 사이의 되먹임 고리는 논쟁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지난 5백 년간 역사 추동의 가장 중요한 엔진이었다고 본다.

1775년까지만 해도 아시아는 세계경제의 80%를 차지했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규모를 합친 것만으로도 세계 총생산의 3분의 2에 이르렀다. 그러나 175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세계권력 중심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하였다.

1900년이 되자 유럽은 세계경제와 대부분의 영토를 확고하게 지배했다. 1950년 서유럽과 미국을 합친 생산량은 세계전체의 절반을 넘었고, 중국의 몫은 5%로 축소되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J. Diamond)는 <총·균·쇠>(1998)에서 "중국은 어쩌다 유럽에 추월당했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인간사회의 궤적에 결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하는 환경적 요소들과 그에 따른 정치체제에 주목한다.

다이아몬드는 중국이 기술적·정치적 우위를 유럽에 빼앗긴 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중국의 만성적 통일과 유럽의 만성적 분열"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게다.

중국이 지리적으로 동서에 걸쳐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는 환경조건과 내부의 장애가 대단치 않았다는 게 대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이점으로 작용했지만, 가끔 정치적 폭군의 결정은 당장 혁신을 중단시킬 수 있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했다는 게다.

그에 비해 유럽의 지리적 분할상태는 서로 경쟁하는 독립 소국과 혁신의 중심지를 만들어 냈다. 유럽의 지리적 장애물들은 정치적 통일을 막기에는 충분했지만, 기술과 아이디어 전파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는 게다.

게다가 중국에서처럼 유럽 전역의 유통망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폭군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다. 하지만 현대사에서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등장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 역사에 정답은 없다.

어쨌든 현대인들은 당사자들이 통상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수준으로 유럽식 복장을 하고 그들의 사고방식과 취향을 지니고 산다. 오늘날 급성장하는 중국경제도 결국 구미식 생산과 금융모델 위에 구축되었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어째서 군사-산업-과학 복합체는 인도가 아니라 유럽에서 꽃피었을까? 영국이 약진했을 때 어째서 프랑스, 독일, 미국은 재빨리 따라가고 중국은 뒤처졌을까?"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다.

근대경제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단어는 바로 '성장'

이제 유럽과 유럽인은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지 않지만, 과학과 자본의 힘은 나날이 강력해 지고 있다. 비유럽 문화권들이 진정 세계적 시야를 가지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이는 유럽이 헤게모니를 잃게 된 결정적 요인의 하나였다. 만일 국지적 전투가 전 지구적 대의명분의 대상이 된다면 초강대국이라도 패배할 수 있다는 걸 알제리와 베트남 게릴라군은 보여주었다.

저자는 과학과 제국의 일약 성공 뒤에 숨은 힘으로 '자본주의'에 주목한다.  만약 돈을 벌려는 사업가들이 없었다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닐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그 작은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란다.

이처럼 돈은 제국건설과 과학진흥에 필수적이었다. 근대경제사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단어는 바로 '성장'(growth)이라는 하나의 단어다. 저자는 근대경제는 마치 호르몬이 넘쳐나는 십대처럼 성장해 왔고,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기대치보다 늘 몇 센티미터 더 많이 자란 것으로 평한다.

자본주의는 경제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이론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론은 돈이 어떻게 작동·순환하는지를 설명했고, 수익을 생산에 재투자하면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다는 아이디어를 선전했다.

자본주의의 핵심 신조는 경제성장이 최고선이라는 것, 그리고 정의와 자유, 심지어 행복까지도 경제성장에 좌우된다는 게다. 하라리 교수는 오늘날 자본과 과학과 역사의 연동성을 이렇게 말한다.

지난 몇 년간 은행과 정부는 미친 듯이 돈을 찍어냈다. 지금의 경제위기가 경제성장을 멈추게 할지 모른다고 모든 사람들이 겁에 질려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난데없이 조 단위의 달러와 유로와 엔화를 만들어서 값싼 신용을 시스템에 펌프질해 넣고 있다.

그러면서 경제의 거품이 터지기 전에 과학자, 기술자, 공학자가 어찌해서든지 뭔가 큰 건수를 올리기를 희망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실험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중략) 만일 거품이 터지기 전에 연구실들이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매우 힘들어 질 것이다.

농업혁명처럼 경제성장도 거대한 덫으로 드러날지 몰라

2014년의 경제적 파이는 1500년보다 분명 크지만, 분배는 너무 불공평해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아프리카의 농부와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집에 가져오는 식량은 500년 전보다 적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성장은 거대한 덫으로 드러날지 모른다. 세계경제는 성장을 거듭해 왔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파이가 좀 더  커지도록 놔두면, 모두에게 좀 더 두꺼운 조각이 돌아갈지 모르지만, 과연 경제적 파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을까?

모든 파이에는 원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조만간 우리 지구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고갈 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럼 어떻게 될까?

최근 몇 세기 동안 인류의 에너지와 원자재 사용은 급격히 늘어났지만, 이용 가능한 자원과 에너지의 양도 늘어났다. 산업혁명은 값싸고 풍부한 에너지와 원자재라는 전대미문의 조합을 창출했다. 그 결과 생산성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다.

산업혁명은 자본주의를 재생산했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만 했다. 상어가 계속 헤엄치지 않으면 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여 자본주의는 소비지상주의를 강요한다. 소비지상주의는 사람들의 탐닉을 끝없이 자극한다.

이제 크리스마스 같은 종교 휴일은 쇼핑 축제가 되었다.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계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저자는 비만을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로 꼬집는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 다이어트 제품을 구매하니,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 계율이 새겨져 있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다.

자본주의-소비지상주의 윤리는 종교적 윤리에도 혁명적 변화를 초래했다. 우리에게 윤리의 역사는 아무도 그에 맞춰 살 수 없는 아득한 이상들로 점철된 슬픈 이야기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예수를 모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불교도는 부처를 따르는 데 실패했으며, 대부분의 유생들은 공자를 울화통 터지게 했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소비지상주의 이념을 성공적으로 준수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윤리가 천국을 약속하는 대신 내건 조건은 부자는 계속 탐욕스러움을 유지한 채로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시간을 소비할 것, 대중은 갈망과 열정의 고삐를 풀어놓고 더 많은 것을 구매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신자들이 요청받은 대로 행하는 역사상 최초의 강력한 종교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대가로 정말 천국을 얻게 되리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야 TV에서 이미 보지 않았는가.

과학과 산업혁명,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끝없는 혁명은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산업혁명은 에너지를 전환하고 상품을 대량생산하는 길을 열었고, 세상은 호모 사피엔스의 필요에 맞게 변형되어 갔다.

그러는 동안 서식지는 파괴되고 종들은 멸종되어 간다. 과거 녹색과 푸른색이던 지구행성은 콘크리트와 프라스틱으로 만든 쇼핑센터가 되어가는 중이다.

오늘날 지구상의 70억이 넘는 사람들의 무게는 모두 약 3억 톤인데, 우리가 가축화한 동물들-소, 돼지, 양, 닭 등-의 전체 무게는 7억 톤에 달하지만, 지구에 살아 있는 야생동물들은 모두 합쳐도 1억 톤에 못 미친다.

생태적 혼란은 사피엔스 자신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지구온난화, 해수면 상승, 광범위한 환경오염은 지구를 우리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인류가 자신의 힘으로 자연의 힘에 대항하고 생태계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종속시킨다면, 언젠가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맞닥트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산업혁명은 불과 2세기 만에 가족과 지역 공동체들을 산산이 깨부수었다. 대신 가족과 공동체가 수행하던 전통적 기능은 대부분 국가와 시장으로 넘어갔다. 이제 지구는 단일한 생태적, 역사적 권역으로 통일되었다.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으며, 오늘날 인류는 예전이라면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부를 누리고 있다. 과학과 산업혁명 덕분에 인류는 초인적 힘과 실질적으로 무한한 에너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게다가 인류만의 행복이 모두에게 진정한 행복인가? 행복은 자신 속에서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 안녕'이다. 그 느낌은 즉각적이면서 장기적인 감정이다.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피곤하기 짝이 없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가 행복의 주된 원천이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에게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엄청난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가치체계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의미 없는 삶은 끔찍한 시련이다.

델포이 신전 입구 "너 자신을 알라", 우리는 나 자신을 모른다

뤽 베송이 만든 영화 <루시>. 영화는 뇌를 100% 사용한 끝에 영구불멸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인간을 다뤘다.
 뤽 베송이 만든 영화 <루시>. 영화는 뇌를 100% 사용한 끝에 영구불멸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인간을 다뤘다.
ⓒ 영화 '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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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포이 신전 입구에 "너 자신을 알라!"는 글귀가 함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정한 자신에 대해 모르며, 따라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데올로기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 혹은 집착(집념/상념)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다.

명상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망하면서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 덧없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행복'이 기술발전이나 성장, 진화과정과 비례하지 않는다고 본 하라리 교수는 평소 자신의 삶에서 불교적 명상을 통해 행복의 실마리를 찾는 걸 모범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는 매일 2시간씩 명상을 하며, 매년 30〜60일간 외부와 자신을 완전히 차단하는 불교적 '결제'를 하고 있단다(관련기사 : "인간 감정조차 인공지능보다 뛰어나다는 보장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역사를 물리학-화학-생물학으로 이어진 연속체의 다음 단계라고 했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지난 40억 년이 자연선택의 기간이었다면, 이제 지적인 설계가 지배하는 우주적 시대가 열리려 하고 있다. 그 방법은 주로 세 가지인데 첫째가 생명공학, 둘째가 사이보그 공학(유기물과 무기물을 하나로 결합시킨 공학), 셋째가 비유기물공학이다.

생명공학은 생물학적 수준에서 인간이 계획적으로 개입하는 것으로, 예컨대 유전자 이식이 그 사례다. 사이보그는 생물과 무생물을 부분적으로 합친 것으로, 생체공학적 의수(이를테면 인공와우이식수술 장치 같은 것)를 지닌 인간이 그런 예다.

역사의 다음 단계에는 기술적, 유전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에도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은 이제 결코 허망한 상상이 아니다. 2050년이 되면 일부 사람들이 이미 죽지 않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머지 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주하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7만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는 동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 만 년에 걸쳐, 사피엔스는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우리가 세상의 고통 총량을 줄였을까?

인간 역량은 엄청 늘어났지만, 개별 사피엔스의 복지 혹은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동물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야기하는 잔인한 일들이 되풀이되었다.

이 책 말미에 하라리는 이렇게 묻는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있을까?" 하여 저자는 "인간이 신을 발명할 때 역사는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라 했다.

과연 그럴지 어떨지는 저자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 신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동안에 지금보다 훨씬 품위 있는 상생(相生)의 역사가 펼쳐지길 소망한다. 하여 시인(박노해, 1997)은 '사람만이 희망'이랬다.


태그:#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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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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