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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연희관에서 고별강연에 나선 문정인 정치외교학과 교수.
 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연희관에서 고별강연에 나선 문정인 정치외교학과 교수.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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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나 알고, 깊게 아는지 자신이 없다."

1981년부터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쳐온 교수가 65세 정년퇴임을 코앞에 두고 털어놓은 얘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학자다. 동북아시아 안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큰 몫을 했다. 강의 시간에 조는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고 늘 눈빛 초롱초롱한 학생들의 질문 세례를 받곤 한다.

"선택과 집중에 실패, 잘 가르치지도 못 했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7일 오후 고별강연으로 '국가안보와 정보' 수업에 나섰다. 다른 교수라면 몰라도 '잘 모른다', '자신이 없다'는 말은 문 교수와 어울리지 않는다.

사회과학논문 인용색인(SSCI)급 논문이 40여 편, 700편 이상의 언론 칼럼, 전 세계를 돌아다닌 명문대 초청강연, 무엇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의 햇볕정책과 동북아 평화번영 정책을 입안하고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보좌한 이력을 보면, 학문으로 보나 현실 참여로 보나 대학 교수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성과를 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 교수는 "스스로 만족했느냐를 보면, 나는 실패했다고 본다"고 했다. "선택과 집중을 못 했다"는 게 첫째 이유다. 그는 본래 개발국가론과 제3세계 국가안보를 주제로 한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각종 저널에서 원고 청탁이 오고 이에 따른 '주문생산' 논문에 치중하느라 본래 전문 분야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문 교수는 "그걸 거절하면서 내 일을 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 했다"며 "정치경제학과 제3세계 전문가가 남북관계 전문가, 동아시아 전문가가 돼 버렸고, 젊은 날의 모든 성과 열을 다했던 분야를 떠나 제네럴리스트가 됐다"고 자평했다.

그는 "젊은 교수님들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선택과 집중을 하고 (논문) 주문생산을 피하고, 자기가 쓰고 싶은 논문을 쓰라는 것"이라며 "한국에선 (논문을) 주문생산하면 인컴(수입)이 생긴다, 하지만 춥고 배고파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천착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문 교수의 두 번째 반성 거리는 "내가 정말 학생들을 잘 가르쳤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질의 응답을 많이 하는 방법은 좋았다고 보지만 그게 과연 내가 준비한 많은 것을 학생들에게 체계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느냐에는 회의적"이라고 했다. "'진보적인 어젠다를 주입시키려고 한다'는 이메일을 보낸 학생들도 있는데, 스스로는 가치중립적으로 한다고 생각했는데 학생들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며 "내 가치와 이념을 학생들에게 인위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교수의 활동에는 세가지 분야가 있다. 연구, 교육, 봉사(사회활동)"라면서 "연구가 50%, 교육이 40%, 봉사가 10% 정도면 좋은데 저는 봉사가 40~50%, 교육이 20%, 연구가 30% 정도였던 것 같다"고 자평했다. 그는 "난 이 사이의 균형을 잡는 걸 못 했다,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다, 성질이 급하니까 되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털어놨다.

"고별강연을 하는 시점에서야 나는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았다는 걸 얘기한다. 정말로 치열한 연구, 제대로 가르치기, 가려서 하는 봉사를 못 했다."

35년 만에 강단에서 내려오면서 '더 잘 해보겠다'?

문 교수의 '고해성사'를 듣고 있던 학생들과 같은 과 교수들은 별로 수긍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기자는 1999년 문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과목은 정치경제학이었고, 문 교수 말마따나 "한 시간씩 딴 얘길 한 적"도 있지만, 대학 시절을 통틀어 '공부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몇 안 되는 수업 중 하나였다. 다른 학생들의 평가도 좋았다.

그런 문 교수가 퇴임을 맞아 '내 교수 생활은 잘못 됐어'라고 자책한 데엔 이유가 있다. 그는 "이제 고해성사를 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앞으로 10년 동안 제대로 잘 해 보겠다"며 "5년 동안 명예특임교수로 송도캠퍼스에서 (1학년을 대상으로) 가르치고, 10년 동안의 계획은 세워놨다, 단독 저서로 책도 많이 쓰고 제 2의 인생을 살겠다, 강의도 열심히 하겠지만, 제대로 된 연구를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결국, 고별강연의 핵심 주제는 '더 잘 해 보겠다'는 다짐이었다. 35년의 강단 생활에서 정년퇴임하는 문 교수가 '앞으로 더 잘 연구하고 더 잘 가르치겠다'고 한 것이다.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의 숙원이던 16강 진출을 이루고도 '우리는 아직도 배 고프다'고 했던 히딩크 감독처럼.

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연희관에서 고별강연에 나선 문정인 정치외교학과 교수.
 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연희관에서 고별강연에 나선 문정인 정치외교학과 교수.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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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타키투스의 함정'에 빠졌다"

고별강연도 문답식이었다. 학생들의 관심사는 역시 남북관계였다. 문 교수는 "박근혜 정부는 '타키투스의 함정'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로마의 역사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는 정부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과장해서 선전해놓고 막상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시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후에 좋은 정책을 펴려고 해도 성과를 낼 수 없다고 경고했다. 

문 교수는 "개성공단 폐쇄 같은 일이 자꾸 일어나면 정부에 대한 신뢰, 사업자들의 신뢰, 북한의 신뢰가 떨어진다"며 "신뢰성의 위기를 가져오면 다음에 개성공단에 가라고 하면 누가 가겠느냐"고 지적했다.

또 문 교수는 "남북관계는 행정부가 자의적으로 좌지우지하는 것보다 행정부가 국회의 동의를 받고 처리하도록 하는 등 제도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며 "정부가 죽일 것과 살릴 것을 가려서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고별강연 청중은 100석 규모인 강의실을 꽉 채웠고, 자리가 없어 서서 들은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 김한정 더민주 의원, 이재영 새누리당 전 의원, 김달중 정외과 명예교수 등이 찾아왔고, 김용학 연세대 총장이 문 교수에 꽃다발을 건넸다.


태그:#문정인, #정치학, #햇볕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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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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