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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개봉한 영화 <아가씨>의 원작 장편소설 <핑거스미스>(FIngersmith)(2002)는, 영국 작가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중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앞서의 두 작품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시대 배경과 주제 의식을 공유합니다. 또한 작가가 앞선 작품들을 쓰면서 했을, 여러 시도와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핑거스미스>를 읽기 전에, 이 '3부작'에 속하는 다른 두 작품들인 <벨벳 애무하기>(Tipping the Velvet)(1998)와 <끌림>(Affinity)(1999)을 먼저 읽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 세 권은 모두 국내에 출간되어 있습니다.

<벨벳 애무하기>(열린책들, 2009)

<벨벳 애무하기>의 표지
 <벨벳 애무하기>의 표지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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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워터스는 원래 영문학자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그러니까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19세기 중후반의 레즈비언과 게이 로맨스 소설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그때 떠올렸던 착상을 토대로 쓴 데뷔작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런던에서 멀지 않은, 굴로 유명한 해안가 동네 윗스터블에서 나고 자란 낸시는 주말에 읍내 대중 연예 공연장을 찾는 것이 취미입니다. 어느 날, 낸시는 남장 여자 연기를 하는 키티 버틀러에게 완전히 반해 버립니다. 키티를 따라 런던으로 떠난 그녀는 새로운 삶에 적응하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냅니다.

낸시가 겪게 되는 사랑의 모험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책입니다. 책장이 저절로 쭉쭉 넘어가죠. 그리고, 누가 봐도 야하다고 느낄 정도의 적나라한 묘사가 특징입니다. 그야말로 로맨스 장르 문법에 충실한, 본격 레즈비언 로맨스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을 첫 사랑의 열병 이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가 천천히 복귀시킴으로써, 자신의 미숙했던 열정을 차분하게 숙고하게 만드는 이야기 구성이 인상적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주인공은 결국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또한 주인공 낸시의 인간적인 성숙은, 성소수자인 그녀가 동시대의 노동자 운동 및 여성 운동의 존재를 깨닫고 연대하는 모습으로도 표현되지요.

출간 당시 '레즈비언 소설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존 레즈비언 소설들이 사회의 편견과 압제에서 맞서 사랑을 완성하는 희망찬 결말이거나 비극적으로 실패하는 식의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끌림>(열린책들, 2012)

<끌림>의 표지
 <끌림>의 표지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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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의 성공에 힘입어 바로 이듬해에 출간된 이 작품은, 전작의 뜨겁고 요란스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놀랍도록 차분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전개되는 소설입니다.

학자인 아버지의 연구를 도우면서 살았던 독신 여성 마거릿은,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울증에 걸린 것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 치료의 방편으로 여자 감옥 방문을 권유받은 그녀는 감옥의 인권 유린의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서 치를 떱니다.

하지만 여기서 돋보이는 미모의 영매 셀리나를 만나게 되지요. 법조계에 있는 남동생이나, 결혼을 앞둔 여동생과 늘 비교 당하며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마거릿은 점점 셀리나에게 빠져듭니다.

여기서는 전작과 같은 성애 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은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셀리나에 대한 열정이나, 지금은 남동생의 부인이 된 헬렌과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모습들로 보면 그렇지요.

빅토리아 시대의 여자 감옥과 당시 유행했던 영매들의 세계를 생생하게 되살려낸 치밀한 연구 조사가 돋보이는 편입니다. 그런 노력은 사회 통념에 들어맞지 않는, 예민하고 똑똑한 여성이 받았을 정신적 고통과 압박감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데 큰 몫을 합니다.

구성면에서도 찰스 디킨스 풍의 떠들썩한 피카레스크 구성이었던 전작과는 다릅니다. 마거릿과 셀리나의 일기가 내내 교차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며, 결말부에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는 식의 반전이 숨어 있지요.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핑거스미스>(열린책들, 2006)(2016 개정판 출간)

<핑거스미스>(2006년판)의 표지.
 <핑거스미스>(2006년판)의 표지.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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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화된 <아가씨>가 반전이 숨어 있는 플롯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으려고 노력한 것과는 달리, 원작 소설은 두 주인공의 관계가 진정한 사랑으로 진화하며 단단히 맺어지게 되는 과정에 집중합니다.

어머니가 사형수라고만 알고 있는 수전은 빈민가에서 양어머니 손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사기꾼 젠틀먼의 제안으로 부잣집 상속녀 모드의 하녀로 들어가게 됩니다. 모드와 결혼한 다음 정신병원에 그녀를 처박고 재산을 가로채려는 젠틀먼의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수전은 모드에게 반해 버립니다. 그런데 모드에게도 계획이 있습니다. 수전을 자기 대신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자유의 몸이 되려는 것이죠. 하지만 모드 역시 수전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영화와 가장 다른 부분은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설정입니다. 책의 설정이 무척 상투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만, 막장 드라마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의 반전 효과만을 노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드가 수전에 대해 가졌던 근거없는 우월감을 내려 놓고,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사랑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그로 인해 수전과 모드의 사랑은 훨씬 굳건해지지요.

영화는 각색 과정에서 진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시련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그 점이 원작 소설의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인데도 말이죠.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첫눈에 반한 다음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번도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물들의 감정선이라고 할 만한 것이 딱히 없지요.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사람들이 영화에 실망을 표시하는 주된 이유는 아마도 이런 점 때문일 겁니다.

<핑거스미스>는 작가가 전작 <벨벳 애무하기>나 <끌림> 같은 작품을 쓰면서 갈고 닦지 않았더라면 나올 수 없었을 작품입니다. <벨벳 애무하기>의 피카레스크식 구성과 실감나는 성애 묘사, 그리고 <끌림>의 감옥 생활 묘사와 1인칭 시점을 활용한 반전의 트릭 같은 것들을 보다 능숙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은 먼 나라 영국의 근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21세기의 한국 사회에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일체의 우월감이나 열등 의식 없이 똑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연대할 때 의미있는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작가의 주제 의식은, 여성과 소수자의 사회적 지위가 여전히 열악한 오늘의 한국 사회가 들어야 할 꼭 필요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연대'는 사회적으로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철저한 자기 반성이 선행된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겠지만요.

덧붙이는 글 | <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지음 /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펴냄 (2009. 5. 25.)
<끌림> 세라 워터스 지음 /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펴냄 (2012. 4. 20.)
<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지음 /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펴냄 (2006. 9. 30.) (2016. 3. 15. 재출간)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2009)


태그:#세라 워터스, #핑거스미스, #끌림, #벨벳 애무하기,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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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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