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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덜 들어가고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서 남편과 아들을 번호로 표현해봤습니다. 남편은 0번, 첫째는 1번, 둘째는 2번, 셋째는 3번으로 표현했습니다. - 기자 말

5월 7일, 0번이 아버님께 전화한다. 물론 내가 시켜서 하는 거다. 그래도 나를 안 통하고 직접 전화를 하니 예전보다 많이 발전한 거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도 찾아 뵈어야죠."

구순의 아버님은 0번의 고단한 회사생활을 무척 안쓰러워하신다. 한 주 뒤에 제사니 힘들게 올 거 없다고 하신 모양이다. 1시쯤 찾아뵙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는다.

12시에 출발하려면 차례대로 씻어야 한다. 그런데 다들 뭘 하는지. 0번은 아침 먹고 안방에서 잔다. 새벽에 들어온 1번은 컴컴한 방에서 동면 중이다. 1번은 스물이고 키 180cm에 넓은 등짝을 가진 남자다.

해가 서향으로 기울 때까지 화장실도 한 번 안 가고 잠을 자는 날도 있다. 너무 오래 자는 1번의 등짝에 스파이크를 날려본 적이 있다. 1번은 "왜 때리는데"라고 딱 한 마디 하고 다시 잠을 잤다. 내 손은 마디마디가 얼얼했다. 그래서 다시는 1번은 안 때린다.

2번은 열여섯이다. 키는 170cm가 넘지만, 몸무게는 50kg도 안 될 정도로 마른 데다 힘이 없어 걷는 모습을 보면 흡사 허수아비가 팔을 휘젓는 것 같다. 2번은 방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며 간간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아마 오늘 새로 나온 웹툰을 보거나 SNS를 확인하고 있을 거다.

올해 10대가 된 3번은 내복 차림으로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애니메이션를 보고 있다. 아, 3번도 남자다. 현관 벨이 울린다. 3번 친구 김군이다.

"나 오늘 할아버지네랑 할머니네 가야 해."
"엄마, 나 지금 못 놀지?"
"못 놀아."
"안 된대. 잘 가."

3번이 문을 닫고 다시 애니메이션을 본다.

하루에 일정이 2개, 기회는 오늘 하루뿐

우리 가족의 외출은 험난하다.
 우리 가족의 외출은 험난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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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5월 7일)은 시댁뿐 아니라 친정에도 꼭 가야 한다. 이번 연휴 기간이 나흘이라 해도 1번, 2번, 3번이 다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은 딱 오늘 하루뿐이기 때문이다. 다들 어찌나 약속이 많고 바쁜지 모르겠다.

점심은 시댁에 가서 먹고 저녁은 친정에 가서 먹을 계획이다. 만일 늦어져서 친정에 오늘 못 가고 내일 가게 되면 아이들이 못 간다고 버틸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친정 근처 쇼핑센터에서 옷을 사주겠다고 꼬셔 볼 생각이다. 물론 몇 명이 따라올진 모른다.

11시 이제 씻을 시간이다. 제일 먼저 0번을 깨우러 안방에 들어갔다. 0번은 오늘 외출에 나와 동일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일어나. 11시 넘었어. 지금 씻어야 12시에 나가지."
"애들 먼저 씻으라고 하면 안 돼?"
"애들이 먼저 씻겠어?"
"딱 10분만 편히 쉬다가 나갈게. 딱 10분만."
"벌써 10분 지났어."
"알았어. 사과 주면 일어날게."

갖은 핑계를 대던 0번 결국 욕실에 들어간다. 0번이 나오면 2번을 들여보내야 한다. 2번은 머리만 감으면 외출 준비가 끝이다. 1번은 외출하려면 샤워까지 해야 한다. 1번이 씻고 나오면 욕실에 온통 수증기로 꽉 찬다. 그러니 다음 사람이 욕실을 쓰기 불편하다. 그래서 항상 꼴찌다. 뻔히 알면서 2번은 "형 먼저 씻으라고 해" 하며 버틴다.

이래가지고 오늘 두 탕 뛸 수 있을까? 왜 나만 이리 동동거리면서 채근해야 하나? 0번은 자기 집에 가면서도 어찌 저렇게 천하태평일까?

남편과 같이 늦잠잤는데 나만 혼나... 억울했다

신혼 초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결혼하고 1년도 안 되었을 때 일이다. 명절 전날 아침 먹고 시댁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늦잠 자는 0번을 열심히 깨웠다. 0번은 꿈쩍도 안 했다.

"내가 지금 우리 집 가자는 거야? 몰라 나도 잘 거야. 늦게 갔다고 혼나면 다 당신 탓이야!"
"아이고 우리 엄마는 그런 거 가지고 뭐라 하는 분이 아니셔."

나도 모르겠다 싶어 옆에서 같이 자버렸다. 한참을 자고 해가 길어졌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님이었다.

"아버지께서 아침부터 기다리는데 안 오고 뭐 하는 거냐?"

억울했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데도 나만 혼난 것이. 정작 늦잠을 자고 안 일어난 건 0번이었는데. 어떤 해명도 그 상황에선 변명이 된다는 걸 알았다. 0번은 어머님께 어마어마한 믿음을 받는 완벽한 아들이었다.

'우리 엄마는 그런 거 가지고 뭐라 하는 분이 아니셔'라는 0번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0번은 안 혼났으니. 그날 난 깨달았다. 0번과 식구들을 소몰이꾼처럼 몰아서 시댁에 데려가는 일의 책임자는 나라는 걸. 억울했지만 20년을 그리 살았다.

오늘 난 또 0, 1, 2, 3번을 몰아서 시댁에 갔다가 친정에 다녀와야만 한다. 이래야 어버이날 하루라도 효도를 한 거로 친다. 만일 이걸 안 하면 일 년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다섯 식구 모두 씻고 겨우 집을 나섰다. 예상시간보다 15분이 늦어져서 12시 15분이다. 자동차 운전석엔 0번, 조수석에 키 큰 1번이 앉고 뒷자리엔 2번 3번이 앉아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타려는데 3번 표정이 안 좋다. 손으로 정강이를 잡고 있다. 그새 2번한테 맞았나?

"비켜 봐. 엄마 가운데 앉게."

2, 3번보다 큰 엉덩이를 가진 내가 왜 좁은 가운데 자리에 앉아야 하나? 게다가 가운데 뒷자리는 창가 자리보다 높아서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다. 손을 앞 좌석 어깨 부분에 짚어야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불편해도 시댁이나 멀리 갈 때 아이들이 좁은 공간에서 안 싸우게 하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왜 또 그러는데?"

안전띠까지 매고 3번에게 물었다.

"형이 발로 찼어."
"그게 아니라. 얘가 옆에 가라고 했는데 안가잖아? 옆에 자리 많으면서."
"형이 처음부터 발로 찼잖아."
"처음엔 말로 했거든. 그리고 너 왜 500원 안 주는데? 어제 게임해서 이긴 사람한테 500원 주기로 했잖아."

앞에 앉은 0번도 한마디 한다.

"좀 조용히 해. 아빠 운전하는 데 정신이 하나 없어."

조수석 1번은 키득거린다. '니들이 그렇지' 그런 의미를 가진 웃음소리 같다.

"제발 조용히 좀 가자. 잘못하면 사고 나."

아이들과 입씨름하니 진이 빠진다. 차는 이제 막 요금소를 지나 고속도로에 들어섰는데 나는 벌써 지치니 어쩌면 좋을까? 제발 오늘은 좀 안 싸우고 친가 외가 두 곳 방문에 성공하면 좋겠다. 그래서 내일은 이 고생을 안 했으면 한다. 0번은 다음 주 제사 하러 갈 땐 좀 다른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집에 올 때도 내가 또 가운데 자리에 앉아야 하나?


태그:#어버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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