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곡성>의 포스터.

영화 <곡성>의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곡성>이 세상에 그 실체가 드러난 날부터 인터넷 공간에는 이 영화와 관련된 '스포'들이 발에 채였다. 누가 귀신이라는 둥, 악마 혹은 범인이라는 둥, 어떤 것들이 등장한다는 둥,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영화와 관련된 악의적 스포일러를 날리는 통에 다수의 인터넷 유저들이 곤혹스러워했다. 스포일러로 인해 영화 관람을 주저하는 경우조차도 있었다.

그렇다면 <곡성>의 스포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센스> 같은 것일까? 만약 <곡성>을 보고 스포를 날린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아직 영화 <곡성>의 미혹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리라. 그는 아직 영화 속 '미혹'의 세계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진실이라 믿는 것을 '폭로'한다 생각하고 있다. 영화 속 그들처럼.

나홍진, 그 집요함의 끝

<곡성> 시사회가 끝나고 평론가들과 배우들은 감독 나홍진에 대해 "집요하다", "끝까지 간다"고 입을 모았다. 주인공을 비롯한 마을의 사람들을 참혹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만들고만 영화 속 사건을 말하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러닝타임이 마무리 되고 나서야 비로소 뒤통수를 치고 들어오는 진실,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진실 때문이었을까?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그 무엇에 정신이 팔려 진짜 곡소리를 내야 할 것들을 놓친 관객들 때문이었을까?

종구(곽도원)는 영화 내내 자신이 맞닥뜨린 뜻밖의 사건에 질문을 던진다. 내게 우리 가족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사건을 보는 '눈'을 잃었다. 동료 경찰이 풀어놓은 괴기스런 일본 사람 이야기에 면박을 준 그는, 정작 자신이 사건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자 그 누구보다 먼저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리고 만다.

미끼를 문 것은 종구만이 아니다. 그가 휩쓸려 들어간 '미혹'의 덫에 관객들도 동시에 텀벙 빠져들어, 그와 함께 미로 속을 헤맨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빠진 미혹의 덫을 깨닫지 못한 종구마냥 영화를 본 사람들도 영화가 끝난 이후에 종구가 되어 버린다.

종구는 경찰이다

 곡성 종구 곽도원

곡성 종구 곽도원 ⓒ 사이드미러


종구는 경찰이다. 정전된 파출소에 나신의 여성이 등장하자 뛸 듯이 놀라 자빠지고, 살해 현장에 들이닥치지 못한 채 멀찍이서 빙빙 도는 모습을 보인다 해도, 그는 경찰이다. 딸내미에게 "아빠 경찰이니까 걱정하지마"라고 자부심을 보였던. 그리고 동료 경찰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먼저 미혹의 덫에 걸렸어도 피부과를 조사해 보라거나, 귀신처럼 등장한 여성이 최근 벌어진 사건과 관련된 가족의 안주인이었음을 깨닫는 등 제법 촉이 밝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경찰 노릇도 거기까지이다.

자신의 피붙이가 사건의 당사자가 된 이후, 그는 한 번도 경찰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번연히 드러난 검사 결과조차 제쳐버리고, 자신이 빠져버린 미혹의 실체를 쫓기 위해 비합법적 수단을 불사한다. 어디 경찰뿐인가. 종구의 나와바리 친구들도, 그리고 그를 돕느라 합류했던 부사제도, 친구의 일이기에 친척 형의 일이기에 스스로 미혹의 길을 자초한다.

그들이 스스로 한껏 미혹의 미끼를 물때, 연신 TV에서는 독버섯으로 만든 음료가 시판되었다는 기사가 등장하고, 마을 곳곳에서 해골 모양으로 말라가는 것들이 주렁주렁 등장해도 누구 하나 거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대신 더 분명해 보이는 미혹에 빠져든다.

미혹=무명

미혹의 뜻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하면 뜻밖에도 '무명(無明)'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영화 속 천우희를 뜻한다. 무명은 불교 용어로 미혹과 어리석음, 무지를 뜻한다. 또한 미혹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목격자로부터 시작해 무명은 결국 종구를 미혹한다.

지난 달 22일 정재승 교수는 <한겨레>에 실린 칼럼 '우리는 왜 설현의 손짓과 송중기의 눈빛에 무너지나?'를 통해 '사바나'에 살던 조상과 동일한 DNA를 가진 인류는 그 조상과 같은 심리적 기제를 갖고 있다고 밝힌다. 즉, 순간순간 생존을 염려했던 시절, 깊은 사고 대신 순간의 반응이 우선이었던 인류는 1만여 년 전의 그 DNA를 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미래를 계획하는 듯하지만, 설현과 송중기의 순간적 매력에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영화 속 21세기 마을 주민들은 눈앞의 검시 보고서보다 눈을 가리고 마을을 떠도는 소문을 믿는다. 마치 가상의 신을 만들어 자신의 소망을 투영한 사바나인들처럼. 자신의 두려움과 절망을 미혹된 그 무엇에 투영하고야 만다. 왜 자신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는지에 대한 불가지성을, 불가해한 신비의 영역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게리 마커스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런 인간을 두고 '서투르지만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이란 의미의 고물 컴퓨터 '클루지(kluge)'라 애교스럽게 부른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돌과 배우의 눈빛에 빠져드는 정도를 넘어선다면 어떨까. 공익을 담당해야 할 사람이 자신의 직무를 방기하고, 돈 1000만 원 짜리 기복적 행위(굿)를 마다하지 않고, 사적 처단과 교통사고 피해자 유기를 서슴지 않는 상황이 되면, 사바나의 부작용 수준을 넘어선다.

거대한 우화

 영화 <곡성>의 한 장면.

등장인물들의 미혹을 우리 사회 속 부조리한 인간 군상으로 치환해낼 수 있는 사회의 눈밝음 정도는 얼마나 될까.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무엇보다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의 이익이라는 전제 하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 지점에서 <곡성>은 오컬트 영화를 넘어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우화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그 우화가 무명과 일본인의 미묘한 정체를 넘어 진실까지 어느만큼 닿을지는 미지수다. 여기서의 미지수는 영화의 난해함이 아니라 종구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미혹을 우리 사회 속 부조리한 인간 군상으로 치환해낼 수 있는 사회의 눈밝음 정도에 닿아있다.

귀신과의 사투가 소재인 듯 보이는 영화에서 언뜻 영화 <검은 사제들>(2015)을 떠올린다. '편견을 넘어 실존하는 귀신과 싸우는 퇴마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보이는 듯하지만, 오히려 <곡성>은 2014년 바다 안개에 휩싸인 전진호를 통해 한국 사회를 상징한 <해무>에 가닿는다. <해무>가 19세 관람가로 무시무시한 한국호의 진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한 것과 달리, <곡성>은 절묘하게 15세 관람가로 대중적 접촉면을 넓힌다. 또한 지명을 등장시켜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에 종교적 매개를 얹어 한국 사회를 진단했다는 측면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떠오른다.

관객들이 감독이 던진 심오한 미혹의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곡성>은 그 자체로 오리무중 오컬트 영화로서, 15세 관람가의 상업 영화로서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모두 황정민, 쿠니무라 준, 천우희의 열연 때문이다. 허나 이들의 열연도 열연이지만, 영화의 핵심은 따로 있다. 영화 속에서 정작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는 건 끝내 '관객과 함께' 어수룩하게 당하고 마는 곽도원의 종구 그 자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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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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