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무릎 위 십 오 센티미터 타이트한 치마 입고, 책장 맨 밑에 있는 책을 꺼낼 때, 책에 손을 베일 때, 우리를 무시하는 손님 만날 때, 정산이 잘 안 맞을 때, 연장근무 할 때, 힘든 우리들!" - 뮤지컬 <빨래> 제1막 No.04 '어서 오세요, 제일서점입니다' 중에서

서울에 있는 동네 책방 제일서점. 사장의 아들을 포함해 직원은 다섯 명이나 된다. 하지만 평범한 그냥 책방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상장까지 됐다. 상장기업 제일서점의 사장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모두가 그를 '빵'이라고 부를 뿐이다.

"고향 생각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강에서 빵을 씹고 있을 때, 햇빛이 나를 짝 비추자 새들이 나한테 와서 말했지. 서점 사장이 되라. 그래, 서점 사장. 서점 사장이 되자. 책 속에 길이 있네. 책 속에 돈이 있네." - 뮤지컬 <빨래> 제2막 No.11 '책 속에 길이 있네' 중에서

한강에서 빵을 씹다가 서점 사장이 되기로 마음먹은 그. 하지만 그의 야망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다음 목표는 금배지를 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빵. 그는 과연 의회에 진출할 수 있을까?

참 힘든 서울살이

뮤지컬 <빨래> 공연 사진 지난 3월 10일, 뮤지컬 <빨래>의 18번째 공연이 개막했다. 몽골에서 온 청년노동자 솔롱고와 강원도 출신 서점 직원 나영이의 사랑이 메인스토리인 이 공연은, 서울에 발 붙이고 있는 서민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이들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극이다. 오는 2017년 2월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오픈런으로 진행된다.

▲ 서울살이 몇 핸가요? 뮤지컬 <빨래>의 2016 투어 사진. 뮤지컬 <빨래>의 무대는 서울이다. 많이 줄었지만, 그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버둥거리며 사는 이들은 아직도 분명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 (주)씨에이치수박


"서울살이 십 년, 세 번째 적금 통장 해지. 다니고 다니다 깨진 건 적금통장 그리고 부부금실. 서울살이 육 년, 네 번째 직장. 최저임금액 6030원이면 말 다했죠. 생리휴가, 육아휴직 그런 것들은 없어요. 짤리고 짤리다 늘어난 건 술, 담배 그리고 변비. 버리고 버려도 늘어난 세간살이, 집세 그리고 내 나이." - 뮤지컬 <빨래> 제1막 No.01 '서울살이 몇 핸가요' 중에서

서민들의 서울살이 애달픔을 묘사한 뮤지컬 <빨래>에는 현실이 반영돼 있다(관련 기사 : 홍광호는 역시 홍광호, <빨래>는 역시 <빨래>). 주인할매가 운영하는 월세방은 렌트푸어의 집합소다. 극 중 인물 대부분은 최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심지어 솔롱고와 마이클은 파견 기간이 끝난 불법이주노동자다. 혹여 누가 신고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몇 달째 월급이 밀려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주인할매의 딸 둘이는 지적장애인으로 구석진 방에 혼자 대·소변도 못 가리며 40년째 살고 있다.

반면 그의 등급을 재산정하기 위해 찾아온 구청 공익근무요원은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반송장 취급한다. 베트남 여성을 사고팔 수 있는 상품 정도로 취급하는 사람들,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물리적 폭력으로 푸는 사람들도 있다.

"참아요. 참다 보면 가끔 잊어요. 우리도 사람이란 사실을. 우리도 때리면 아프고, 슬프면 눈물 나는 사람인데. 사람들은 모른 척 살죠. 모른 척 눈 감고 살죠. 모른 척 눈감고 귀 막아도 우린 숨 쉬며 살죠. 같은 하늘 아래 아프고 눈물 흘리며 살아가요." - 뮤지컬 <빨래> 제2막 No.14 '아프고 눈물 나는 사람' 중에서

뮤지컬 <빨래> 공연 사진 지난 3월 10일, 뮤지컬 <빨래>의 18번째 공연이 개막했다. 몽골에서 온 청년노동자 솔롱고와 강원도 출신 서점 직원 나영이의 사랑이 메인스토리인 이 공연은, 서울에 발 붙이고 있는 서민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이들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극이다. 오는 2017년 2월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오픈런으로 진행된다.

▲ 참 예뻐요 뮤지컬 <빨래>는 몽골에서 온 청년노동자 솔롱고와 강원도 출신의 서점 직원 나영의 사랑이 메인스토리이다. 이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서울에 발 붙이고 있는 서민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몽골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솔롱고는 언제 강제추방당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일을 하고 있고, 제일서점에서 일하는 고졸 출신 나영 역시 빵의 부당행위 앞에 무기력하다. ⓒ (주)씨에이치수박


뮤지컬 <빨래> 공연 사진 지난 3월 10일, 뮤지컬 <빨래>의 18번째 공연이 개막했다. 몽골에서 온 청년노동자 솔롱고와 강원도 출신 서점 직원 나영이의 사랑이 메인스토리인 이 공연은, 서울에 발 붙이고 있는 서민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이들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극이다. 오는 2017년 2월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오픈런으로 진행된다.

▲ 슬플 땐 빨래를 해 방문 앞에서 지쳐 쓰러져 눈물 흘리는 나영을 희정엄마와 주인할매가 위로하면서 부르는 '슬플 땐 빨래를 해'. 지친 우리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이 노래를 듣고, 나영은 "나는 지치지 않을 거야!"라고 소리친다. 지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가 지치지 않는다고 세상이 바뀌지도 않는다. ⓒ (주)씨에이치수박


뮤지컬 <빨래>는 이토록 힘든 상황에서 개인의 의지와 희망을 노래한다. 희정엄마와 주인할매는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니"라고 울면서 노래하는 나영을 안아준다. 그리고 "슬픔도 억울함도 같이 녹여서" 빨아버리자고 말한다. 버스 기사의 가슴팍에 세월호 노란 리본이 아직 달려있는 것처럼, 솔롱고가 고향의 가족을 생각하며 꿈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동대문에서 장사하는 희정엄마가 행복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은 것처럼. "지치지 않을 거야"라고 외치는 주인공 나영을 통해, <빨래>는 어렵지만, 우리 힘을 내자고 다독인다.

뮤지컬 <빨래>의 엔딩은 마치 해피엔딩인 것처럼 보인다. 나영은 솔롱고와 함께 살게 됐고, 솔롱고는 새 직장을 구했다. 인천 살던 주인할매의 아들은, 어머니와 오랫동안 끊었던 연을 이어 붙이며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월세방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나영은 여전히 파주로 파견 나가서 파김치가 되어서 돌아오고, 솔롱고는 밀린 월급을 받지 못한 채 불안한 삶을 이어간다. 마이클은 결국 강제추방됐다. 폐지를 줍는 주인할매집 사정은 나아진 게 없고, 그의 아들 내외는 이 좁디좁은 방에서 불편한 주거를 시작해야 한다.

진짜 해피엔딩으로 만들기 위해

뮤지컬 <빨래> 공연 사진 지난 3월 10일, 뮤지컬 <빨래>의 18번째 공연이 개막했다. 몽골에서 온 청년노동자 솔롱고와 강원도 출신 서점 직원 나영이의 사랑이 메인스토리인 이 공연은, 서울에 발 붙이고 있는 서민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이들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극이다. 오는 2017년 2월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오픈런으로 진행된다.

▲ 서울살이 몇 핸가요? Reprise 뮤지컬 <빨래>의 주인공들은 웃으면서 극을 마친다. 꽃 피는 봄을 맞아서, 각자가 각자의 희망을 품고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면면을 뜯어서 살펴보면, 그다지 해피엔딩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작 상황이 바뀐 건 별로 없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빨래>는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삶 전체를 바꾸기 어렵다는 것 역시 보여준다. ⓒ (주)씨에이치수박


다시 빵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국회의사당 입성을 목전에 뒀다고 생각하는 빵은 거칠 것이 없다. 빵에게 책은 지식과 감정의 보고가 아니라 그저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다. 능력 없는 아들을 낙하산으로 데리고 있는가 하면, 여직원들에게 이름표를 달아주겠다며 가슴에 손을 뻗는다.

서점 창립부터 함께 해온 직원 김지숙은, (아마도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함부로 가게 자본을 굴리는 빵에게 직언을 했다가 순식간에 해고당한다. 부당해고라고 항의하는 나영에게 빵은 "올해부터 법이 바뀌었다"며 "부당해고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개악된 노동법을 이용해 말 한마디로 직원을 자른 그는, 항의하는 나영도 파주창고로 발령을 보낸다. 이 직원들이 할 수 있는 건 술자리에서 욕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힘들다고 꾀피운 적 없다. 알았냐, 빵 같은 놈아! 쫄딱 망해라. 길 가다 넘어져라. 빵하고 터져라. 사장 욕할 땐 술만 한 친구가 없고, 소주 안주엔 삼겹살만 한 안주가 없지. 삼겹살은 제주 똥돼지가 최고. 자, 마시고 죽자!" - 뮤지컬 <빨래> 제2막 No.12 '자, 마시고 죽자!' 중에서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며 말끝마다 경제위기를 강조하는 빵. 가게의 어려움을 노동자의 탓으로 전가하고 부당노동행위를 강요하는 빵. 핸드폰을 붙잡고 "요새 젊은 애들 투표합니까, 걱정 마십시오"라고 아부하는 빵. 그를 보면서 과연 어느 당의 공천을 받을까 잠시 생각하는데, 서점의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제'일'서점.

뮤지컬 <빨래> 공연 사진 지난 3월 10일, 뮤지컬 <빨래>의 18번째 공연이 개막했다. 몽골에서 온 청년노동자 솔롱고와 강원도 출신 서점 직원 나영이의 사랑이 메인스토리인 이 공연은, 서울에 발 붙이고 있는 서민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이들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극이다. 오는 2017년 2월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오픈런으로 진행된다.

▲ 내 딸 둘아 뮤지컬 <빨래>의 투어 공연 사진. 주인할매에게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걸 보고 홧김에 서방질을 해서 낳은 딸이 있다. 움직일 수도, 용변을 가리지도 못하는 그 아이를 40년 째 키우는 그녀에게 둘이는 참 아픈 손가락이다. ⓒ (주)씨에이치수박


뮤지컬 <빨래> 공연 사진 지난 3월 10일, 뮤지컬 <빨래>의 18번째 공연이 개막했다. 몽골에서 온 청년노동자 솔롱고와 강원도 출신 서점 직원 나영이의 사랑이 메인스토리인 이 공연은, 서울에 발 붙이고 있는 서민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이들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극이다. 오는 2017년 2월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오픈런으로 진행된다.

▲ 자, 건배 뮤지컬 <빨래> 2016 투어 공연 사진. 솔롱고와 마이클을 데리고 구씨네 슈퍼가게에서 술을 사주는 직원은 "경기가 어렵다"면서 월급이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소심하게 항의하는 것 그리고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술이나 사 마시는 것밖에 없다. ⓒ (주)씨에이치수박


"지겨운 기저귀, 벌써 40년째여. 마흔이 다 되도록 기저귀 신세를 못 면헌 내 딸 둘아! 너도 건넛방 처자처럼, 알록달록 치마도 입고 구두도 신고 싶겄지. 너도 희정엄마처럼 남자 만나 아이 낳고 아웅다웅 살고 싶겄지. 그러나 어쩌것냐, 이것이 인생인 것을." - 뮤지컬 <빨래> 제1막 No.09 '내 딸 둘아' 중에서

"나 한국말 다 알아. 아파요, 돈 줘요, 때리지 마세요. 나 한국말 다 알아. 빨리빨리, 이 자식, 저 자식, 개새끼, 십새끼. 내 이름은 마이클인데, 나더러 불법 사람이라고. 아침부터 욕하기 싫은데 배운 게 욕이네. 반말하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못된 말 하지 마세요." - 뮤지컬 <빨래> 제1막 No.02 '나, 한국말 다 알아' 중에서

장애를 가진 둘이도 똑같은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 아무도 함부로 말하며 마이클을 때리지 못하는 세상, 셋방 주인이 솔롱고의 방을 함부로 뺄 수 없는 세상, 김지숙이 쉽게 해고되지 않는 세상, 야간대학을 다니며 작가가 되기를 소망했던 나영이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어떤 선택을 하든 누구도 희정엄마의 삶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세상, 누구도 누구를 짓밟을 수 없고 아무도 차별과 편견으로 인해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뮤지컬 <빨래>가 진심으로 그리고 싶었던 마지막은 그런 세상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상이 고작 종이 한 장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닐 터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는 법, 하다못해 그런 세상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덜 멀어지게 하는 법은 있다. 언젠가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을 쥐여주지 않으면 된다.

제일서점 주인 빵이 국회의원 빵이 되는 건 상상만으로 끔찍하지 않은가. 4월 13일은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날이다.

뮤지컬 <빨래> 포스터 2015년 창작 10주년을 맞아, 올해로 창작 11주년이 된 뮤지컬 <빨래>. 대학로 스테디셀러 <빨래>가 지난 3월 10일 18번째 막을 올렸다. 2017년 2월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오픈런으로 운영된다. 뮤지컬 <빨래>는 우리에게 꿈을 잃지 않을 용기와 희망을 준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의 애환을 보여준다. 우리고 보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 뮤지컬 <빨래> 포스터 2015년 창작 10주년을 맞아, 올해로 창작 11주년이 된 뮤지컬 <빨래>. 대학로 스테디셀러 <빨래>가 지난 3월 10일 18번째 막을 올렸다. 2017년 2월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오픈런으로 운영된다. 뮤지컬 <빨래>는 우리에게 꿈을 잃지 않을 용기와 희망을 준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의 애환을 보여준다. 우리고 보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 (주)씨에이치수박



뮤지컬 빨래 총선 국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