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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미국에 끊임없이 던지는 것은 '사귀자'는 말이다. 수교를 하자는 요구다. 최근, 가시적 진전은 보이지 않았지만, 의미 있는 관련 보도가 있었다.

지난 2월 21일자 <월스트리트저널>은 2월 6일의 제4차 북한 핵실험 전에 북한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위한 논의를 하기로 비밀리에 의견을 모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실험 단행으로 인해 추가적인 외형상 진전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보도했다. 

북미수교의 실현 여부는 북한보다는 미국에 더 많이 달려 있다. 정말 수교가 이루어질 건가, 이루어진다면 언제 될 건가는 미국 정부의 의지에 보다 더 많이 달려 있다.

북미관계와 상당히 유사한 선례가 있다. 이 선례를 검토하면 미국의 향후 행보에 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선례라는 것은 1970년대까지의 미중관계다. 이것을 살펴보면, 북미관계와 미중관계가 어쩌면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 하는 느낌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그 시절 미중관계로부터 향후의 북미관계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베이징 천안문광장.
 베이징 천안문광장.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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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950년부터 3년간 미국과 전쟁을 했다. 그리고 그 뒤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고자 북한은 수교를 희망했지만, 미국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미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이 그렇게 하는 데는 자체적인 전략적 판단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만, 북한의 라이벌인 한국이 자국의 동맹국이라는 사실도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

적대관계 속에서 압박을 주도한 쪽은 주로 미국이다. 미국은 외교·군사·경제 방면에서 압박을 가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미국을 곤혹스럽게 하는 한편, 계속해서 수교의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공식적으로 부정하면서 대북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위의 두 문단은 1945년 이후 북미관계에서 나타난 주요점을 대략 정리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주요점이 1970년대까지의 미중관계에서도 거의 그대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중국으로 불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대결했다. 이런 적대관계는 전쟁 후에도 계속됐다. 하지만, 중국은 그런 관계를 원치 않았다. 이 점은 한국전쟁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부터 중국은 외교부장 주은래(저우언라이)를 통해 대미 수교를 추진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중국의 러브콜을 거부하고 외교·군사·경제 분야의 중국 봉쇄 정책을 전개했다. 

북한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에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합법적인 중국 정부로 인정했다. 타이완을 기준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도 핵개발을 강행했다. 경제곤란이 심각할 때인 1959년부터 중국은 핵개발을 강행했다. 이런 상황은 1964년 핵실험 단행으로 이어졌다. 

핵은 1945년 이후의 세계를 지배하는 무기다. 세계 지배자 반열에 포함되는 국가들만 현존 국제체제 하에서 합법적으로 이것을 보유할 수 있다. 중국이 최초의 핵실험을 할 당시, 이미 핵실험을 한 나라는 미국(1945년), 소련(1949년), 영국(1952년), 프랑스(1960년)뿐이었다. 이들은 다들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상임이사국들이다.

이렇게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를 당시의 중국이 갖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미국과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중국의 핵개발을 차단하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중국의 열망은 대단했다. 중국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핵개발을 밀어붙이자, 미국은 소련·영국을 끌어들여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1963년, 미국과 소련·영국은 공동으로 중국을 봉쇄하자는 합의를 도출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같은 공산권 국가인 소련이 중국의 핵개발을 반대한 것은 중국과의 라이벌 관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이후로 더 이상의 핵 보유 국가는 없어야 한다'는 핵보유국들의 일반적 심리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북한의 핵 보유에 대한 중국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련·영국이 함께하는 국제 공조에 힘입어 미국은 중국을 향해 전쟁위협 발언까지 던졌다. 핵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중국 서부의 신장위구르는 물론이요 수도 베이징까지 폭격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이때가 1963년이다. 하지만, 이듬해에 있었던 중국의 핵실험으로 삼국의 국제공조는 사실상 무색해지고 말았다. 

중국의 핵실험 이후로도 한동안 미국은 기존의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사정변경이 있었다. 그간 중국의 수교 제의를 외면했던 미국이 "그때 했던 그 제의, 아직 유효하냐?"며 중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정세 변화가 있었다.

정세 변화라는 것은 1960년대판 중동 전쟁인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곤경에 처하게 된 일을 말한다. 오늘날 미국은 중동 전쟁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쟁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그래서 '1960년대판 베트남전쟁'이라고 한 것이다.

베트남전쟁에 파견된 육군 백마부대 장병들.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베트남전쟁에 파견된 육군 백마부대 장병들.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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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만 해도, 미국은 중국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 해에 미국은 북위 17도 이북의 북베트남을 상대로 대대적인 북폭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3년 뒤인 1968년, 북베트남과 베트공(베트남판 빨치산)이 미국의 영향권인 남베트남에서 일제 봉기를 개시하면서부터 상황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 상황을 뒤집을 역량이 없다는 게 드러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 추락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 상황은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시아·태평양에서 더 이상의 추락을 막자면 미국 단독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미국을 부축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미국은 중국을 다시 보게 되었다. 중국과 손을 잡으면 이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을 좀더 연장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나라다. 그랬던 미국이 베트남전쟁 실패를 계기로 싹 달라졌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대화 채널을 열고자 한 것이다. 1969년부터 미국은 프랑스와 파키스탄 등을 통해 "한번 만나자"는 제안을 중국 정부에 보냈다. 이때부터는 중국이 아닌 미국이 만남의 성사에 목을 매게 되었다.

그런데 1969년 당시의 중국은 예전의 중국이 아니었다. 미국이 가진 핵무기를 중국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과의 관계에서 미국의 협상력은 이전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다. 선물을 잔뜩 내주지 않고는 중국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미국이 건넨 선물 중 하나는 중국을 다섯 번째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수렁에 빠지기 전인 1966년부터 미국은 소련과 더불어 핵확산금지조약(NPT) 체결에 대한 협의를 개시했다.

두 나라의 협의가 보다 많은 나라들의 협의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베트남전쟁 실패가 있었고, 이로 인한 미국의 대(對)중국 태도 변화는 NPT 조약을 친중국적 조약으로 만드는 결과로 연결되었다. 1969년 유엔총회에서 승인된 NPT 조약이 중국의 핵 보유를 공인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NPT 조약 제9조 제3항에서는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만이 합법적인 핵보유국이 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네 번째 핵보유국인 프랑스는 1960년에 핵실험을 단행했다. 만약 미국이 중국의 핵보유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면, 조약 제9조 제3항의 "1967년 1월 1일"에서 네 번째 숫자가 분명히 바뀌었을 것이다. 중국의 핵보유를 인정할 생각이 있었기에, 중국 핵실험이 단행된 이후의 시점을 합법적인 핵보유의 마감 시한으로 잡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이 준비한 선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1971년에는 중국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만들어주었다. 1978년에는 전통적 우방인 타이완과의 관계를 끊었다. 1979년에는 중국과 국교를 체결했다. 이 정도면, 미국이 중국의 '출세'를 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법적인 핵개발을 하지 말라며 중국을 압박했던 미국이 도리어 중국의 출세를 돕는 나라가 됐던 것이다.

이런 선례가 미국과 북한의 관계에 똑같이 적용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전에 어떤 위기를 경험했고 모종의 결단을 통해 그 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는 개인이나 국가는, 이전과 유사한 위기에 또다시 직면한다면 그때의 결단을 다시 꺼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전에 벌어졌던 미·중 핵 대결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북·미 핵 대결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전 경험에서 미국은 중국과의 수교라는 결단을 통해 자국의 패권 추락을 어느 정도 막아냈다. 그랬기 때문에 미국은 자국의 패권 추락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면 수교 카드라는 결단을 통해 북·미 핵 대결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

지금 미국은 현대판 '베트남전쟁'인 중동 전쟁에서 곤혹을 치르고 있다. 이슬람국가(IS)의 등장으로 인해 이 곤혹은 한층 더 가중되고 있다. IS나 혹은 그것의 향후 대체물이 미국의 중동 패권을 한층 더 위협하고 그로 인해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까지 위험하게 된다면, 미국은 더 이상의 추락을 막기 위해서라도 북한과의 관계를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현재로 봐서는 그 시점에 북미수교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북미수교, #미중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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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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