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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용문(登龍門)의 고사는 유명한 이야기다. 중국 황하의 상류에는 용문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근처 물살이 워낙 세고 거칠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쉽게 올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생 끝에 그 용문을 오르면 용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 사람들에겐 과거가, 한국인들에겐 고시가 바로 용이 되는 길이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등용문에 비해 점액의 고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점액(點額)은 용문을 오르려다 다친 물고기들의 이마에 상처가 생겼다는 고사다. 용이 된 물고기가 하나 나오려면 이마가 찢어진 물고기가 수백, 수천 마리가 있어야 한다. 용이 된 물고기 입장에서 용문은 추억과 희망의 장소지만 잘 생각해보면 용문은 살갗이 찢어진 물고기들의 절망이 넘실거리는 곳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 '개천에서 나오는 용'의 전설은 하나의 신화적인 모델로 자리잡았다. 한국 사회에서 자수성가한 자영업자나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여 영웅이 된 인물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쉽게 들을 수 있다. 강연이나 멘토링 현장에만 가도 개천에서 용이 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노력했는지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개천 용'들은 다른 사람에게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긍정의 힘을 심어준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가 바뀔 수 있다는 조언은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때문이다. 개천 용들의 조언을 듣고 희망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도움 자체를 비판하긴 어려울 것이다.

한국이 점점 개천에서 용이 나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 있다. 개천에 사는 미꾸라지들에게도 용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는 것이 기회의 평등 측면에서 좋은 일이라고 한다. 학업과 취업을 위한 준비 비용의 상승, 입학과 취업 전형의 난립과 정보의 격차 증대는 개천 용이 나오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을 사회적인 문제로 간주하여 해결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모델의 권장과 유지에 회의적이다. 개천에서 용이 되는 것 자체는 분명 개인에겐 좋은 일이겠지만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이 사회적인 모델로 권장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개천에서용나면 안 된다>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15.05
 <개천에서용나면 안 된다>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15.05
ⓒ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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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 사는 모든 미꾸라지가 용이 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개천의 환경 상태나 주변 미꾸라지들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용이 돼서 개천을 떠날 거라는 의식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책, <개천에서 용나면 안된다>는 '개천 용'을 키우는 모델이 갖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비판한다.

우리는 개천에 사는 모든 미꾸라지가 용이 될 수 있다는 이론적 면죄부를 앞세워, 극소수의 용이 모든 걸 독식하게 하는 승자독식주의를 평등의 이름으로 추진하는 집단적 자기기만과 자해를 저지르고 있다. 미꾸라지들끼리 연대와 협동의 정신으로 공동체와 사회를 꾸려나가는 가치엔 그 어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 - 본문에서

개천에서 용이 되는 경쟁은 기본적으로 승자독식 게임이다. 개천을 나온 용은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주류에 속하게 된다. 인정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개천 용에게 개천은 더 이상 생활 공간이 아니다. 용이 되지 못한 존재는 용이 되기 위해서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어쩌면 용이 되지 못한 자신이 겪는 모욕감을 비료로 삼아 성장하겠다고 마음먹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갑이 을에게 횡포를 부릴 때 을끼리의 연대는 불가능하다. 을의 전략은 연대가 아닌 용이 되는 각개약진이기 때문이다. 속칭 '갑질'이 아무리 많아도 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는 셈이다.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이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개천 용에겐 많은 찬사를 보내지만, 용이 되지 못하고 이마에 상처가 난 존재들에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개천 용들의 이야기만 재생산되고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기 때문에 사회 문제의 초점은 구조와 가능성이 아닌 노력과 극복에 맞춰지게 된다.

과정이 좋더라도 결국 아무것도 손에 남지 않기 때문에 결과에 더욱 더 집착하게 된다. 시스템의 피해자는 패배자로 여겨진다. 가해자의 잘못이 아닌 피해자의 약함에 집중하고, 구조의 개선을 도모하는 이들을 루저로 모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에 따라, 지방은 중앙에 인재를 공급하기 위한 인적 자본 충원지로 착취당하고 있다. 지방 식민지화는 서울 일극 집중주의에 의한 인정욕구의 획일화, 서열화는 물론 대학입시, 사교육 전쟁, 극심한 빈부격차, 지역주의, 정치의 이권투쟁화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주요한 문제들의 핵심 원인이다. - 본문에서

한국이 가지고 있는 사회 구조와 대학의 편재로 인해 지방은 영원히 개천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지방 인재를 키우기 위해 지방자치단체는 학교 교육에 투자한다.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 인재들은 좋은 대학에 합격하여 서울로 떠난다. 이 지방 출신 개천 용들을 지원하기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는 서울에 학숙을 건립하고 학습을 돕는다.

그리고 이 학생들은 명문대를 졸업하고, 좋은 기업에 취업한다. 이 개천 용들은 자기가 나고 자란 지방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자신이 명문고를 나온 경우에 지방 고등학교의 동문회를 서울에서 열 뿐이다. 물론 돌아오지 않는 개천 용들 입장에선 직장과 인프라를 따져서 사는 것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이 선택에 따라 지방은 개천으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이제 그만 폐기할 것을 주장한다. 확률이 낮다고 로또는 사지 않지만 경쟁에서 자기는 살아남을 거라고 믿는 개인들이 '체념'을 해야 변화를 위한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개천은 성장을 위한 배양의 공간이 아닌, 꿈과 희망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저자가 바라보는 대안은 전쟁 승리를 독려하는 의지와 끈기의 모임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모임도 아닌 개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적 연대다.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 갑질 공화국의 비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2015)


태그:#개천, #용, #개천 용, #동문회,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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