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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
 박원순 서울시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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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성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적으로 한 표를 똑같이 행사하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경제 영역인 시장 거래 역시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평등한 개인들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거래를 하고 계약을 한다고 알고 있다. 심지어 공적 공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장 사적인 공간이라고 간주되는 가정에서도 요즘에는 가부장제 대신 가족 구성원이 모두 평등하게 존중받는 문화가 점점 우세해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 기업의 담장 안에서는 1인 1표의 민주적 원리가 아니라 의연히 1원 1표의 자본의 원리가 작동한다. 하필이면 대다수 성인이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는 직장 안에서는 민주주의가 없는 것이다. 당연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 이론의 최고 권위자였던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은 "국가 통치에서 민주주의가 정당하다면 기업통치에서도 민주주의가 정당"하다면서, "이미 국가를 통치하면서 그랬던 것처럼 기업의 통치에서도 민주적 절차를 요구할 권리를 행사해서는 안 될 이유는 없다"고 주장한다

노동 이사제도 도입을 경제 민주화의 맥락에서 읽어보자

다방면에서 혁신정책을 선도하고 있는 서울시에서 이번에 또 하나의 획기적인 혁신안을 들고 나왔다. 민주주의를 직장 안으로 확장하는 노동 이사제도의 도입이 그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7년에 출범예정인 서울지하철 통합공사에 공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노동 이사제도를 도입하여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구현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아직 공식적으로 명확히 발표된 것은 없지만 대체로 2명 내외의 노동이사 선임과 30여 명 규모의 경영협의회 구성이 주요 내용이라고 알려졌다.

기업의 주요 이해관계자인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는 방식은 지분참여, 이익(분배)참여, 의사 결정 참여 등 매우 다양하다. 의사결정 참여만 떼어 보아도 단순한 정보교환에서 협의참가, 그리고 결정참가로 더 세분화될 수 있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자료에 의하면 "정보교환은 경영상의 정보를 노사가 공유하는 가장 초기 단계의 참가 형태로 파악할 수 있고, 협의참가는 근로자 측이 심의, 조언, 적극적 제안과 공동협의를 하고, 협의결과의 실시는 경영측의 도의적인 책임에 근거한 재량에 의존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결정참가는 노사 간의 협의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으로 결정하는 참가 형태를 말한다". 노동 이사제도는 적극적인 의사결정 참여 제도의 하나로서 외국에서는 독일의 공동결정제도가 가장 전형적인 사례다.

때마침 이번 4.13 총선에서 경제 민주화 의제가 오랜만에 다시 떠오르면서 노동 이사제도를 경제 민주주의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성찰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4년 전 당시 민주당에서는 경제민주화를 위한 119위원회를 만들고 정책 가이드라인을 설계하면서 '종업원 대표의 이사 추천권 도입'을 제안한 적도 있다. 그 당시 자료에 의하면 "노동조합 혹은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 종업원 대표가 이사를 추천할 권한을 보장"하자면서 다음과 같이 그 근거를 들었다.

"노동조합의 대표 혹은 종업원 대표가 기업의 이사회에 참석해 공식적으로 기업의 최고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제도인 종업원 이사제도(ERP: Employee Re-presentation on Board)는 선진국에 일반화된 제도이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법률에 의해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강제되는 예가 많다. 1951년 독일에서 처음 시도된 이후 스웨덴,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룩셈부르크, 덴마크, 네덜란드 등으로 전화되었다. …… 당사자 자율주의를 지향하는 미국과 영국에서는 노사합의에 의해서 이를 실시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서울시 노동이사제도 도입에 대해 연합뉴스가 시론까지 발표하면서, "외국에서 노동이사제가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서 노사관계의 역사와 문화, 법체계가 다른 우리나라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고 성급하게 주장한 것은, 경제 민주화라는 맥락보다는 단지 기계적으로 과거적 틀을 답습하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어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연합뉴스 2016년 3월 22일자)

노동 이사제도는 정말 한물 간 제도인가?

노동 이사제도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이 제도가 독일 등 유럽에서 이미 퇴조하고 있는 제도인데, 새삼스럽게 우리가 다시 도입하는 것은 시대적 추세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어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 토론회에서 "노동이사는 지배구조의 비효율성 때문에 현대 선진 각국에서는 더는 채택하지 않는 제도"라며, "우리 노조 활동과 성향에 비추어 경영 효율성을 갉아먹는 제도가 될 개연성이 너무도 크다"고 주장했다.(연합뉴스 2016년 3월 28일자)

그러나 이 역시 다음과 같은 반론에 매우 취약하다.

"유럽연합 27개 회원국 가운데 18개 국가는 '노동자 대표의 이사회 등 경영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즉 노동자 대표는 기업의 이사회 또는 감사회에 참여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바로 노동이사제다. 노동자 또는 노동조합이 경영의 한 주체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경영참여 성공사례로 평가된다. 2011년 세계경제포럼은 "노동자 경영참여는 독일의 위기 완화와 성공요인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노동 이사제도는 낡은 것이 아니다. 유럽에서 보편화된 제도다."(매일 노동뉴스 2016년 3월 25일자)

더욱이 노동자 경영참여가 현재의 경제위기에서 노사관계 안정과 사회 갈등적 위기극복에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위기도 (독일에서-인용자) 공동결정제도가 없었다면 노동시장에서나 전체 사회에서나 훨씬 열악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공동결정제도는 또한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문제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주고 있다." 결국 유럽에서 한물간 제도이기는커녕 경제 민주화라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위해서나 경제위기를 함께 극복하기 위한 상황 대응의 차원에서도 노동 이사제도는 전향적으로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 다양한 기업경영방식은 허용될 수 없는 걸까?

한편 일부에서는 노동자들이 전문성이 떨어지므로 기업경영참여에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인식도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미 30년 전에 로버트 달은 "종업원들은 대체로 주주들만큼은 자신들의 기업을 운영할 능력이 있으며, 평균적으로는 아마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고 단언한다. 사실 한 발 더 나아가 이미 130년 전에 존 클락은 "경영주와 함께 모든 노동자들은 집합적으로 훌륭한 혁신가(entrepreneur)"라고 주장한 바 있다. 사회문화적 진보의 시대인 21세기에 이르러 노동자를 비하하는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을 얻기가 힘들다.

사실 혁신은 다양성을 최대화할 때 나올 수 있다. '검은 백조'라는 개념으로 혁신적인 현상의 출몰을 그려냈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경영은 하향식 계획에 의존하는 대신 기회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최대한 이것저것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 시도의 목록 중에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배제할 어떤 필연적 이유도 없을 것이다.

경제위기와 일자리 부족이 장기화되고 있는 대침체의 시기를 맞아 바야흐로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 등 사회적 경제 등의 영역이 우리사회에 빠른 속도로 만개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협동조합 설립 신고가 지난 3년 동안 1만개를 넘었다는 소식이 그 단적인 사례다. 이는 우리 경제에서 기업형태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더욱이 노동자 협동조합은 노동자가 소유자이고 경영자인 기업이 아닌가. 잘 알려진 스페인 7위 기업인 몬드라곤 협동조합이 또 그러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노동 이사 몇 명을 배정하는 정도의 경영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프랑스의 경우 1983년에 공기업을 대상으로 근로자 임원제도를 우선 도입하였고, 이어 민간으로 전파된 사례가 있다. 서울시 역시 공기업에 노동이사제도를 실험적으로 도입하고 이를 기반으로 확대 적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좋은 정책 아이디어이다. 더욱이 경제 민주화 의제가 부각되면서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 영역이 확산되는 시점에서 기업의 경영 방식 다양성 실험은 매우 적절한 혁신 사례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양성은 혁신의 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도상으로는 지분을 나누는 우리사주제도나 근로자 참여 제도가 있었지만 유명무실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노동자 경영참여나 노동 이사제도를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문제나 시기상조 문제 등으로 거부하지 말고, 혁신의 관점에서, 다양성의 관점에서, 그리고 민주주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구체적인 적용을 위한 숙의와 협의 과정이다.

덧붙이는 글 | 김병권 기자는 서울혁신센터 산하 '사회혁신리서치 랩'의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이 기사는 리서치랩의 <사회혁신 포커스>로 작성한 것을 재수정한 것이다. 또한 이 기사는 사회혁신리서치랩 블로그에도 동시게제되었다.



태그:#사회혁신, #서울시, #노동 이사제도, #경영참여,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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