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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테러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장장 192시간 동안이나 지속됐던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필리버스터 중단을 주장했던 박영선 의원은 연설을 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며, 이해해 달라며, 그리고 표를 달라며 눈물을 흘렸으며, 이종걸 원내대표는 필리버스터 최장 기록을 경신하며 죽을 죄를 지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필리버스터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던 주요 언론들은 필리버스터가 끝나자 그제야 그 의미를 부여하느라 바쁜 듯 하지만, 테러방지법을 반대했던 시민의 입장으로서 이번 야당의 필리버스터 중단은 그 자체로 꺼림칙하기만 하다. 다시 한 번 더불어민주당의 깜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 중단이 아쉬운 이유

더불어민주당이 이종걸 원내대표의 발언을 끝으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종결한다고 밝힌 가운데,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가 참석해 야권 통합을 제안하고 있다.
▲ 야권 통합 제안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이 이종걸 원내대표의 발언을 끝으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종결한다고 밝힌 가운데,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가 참석해 야권 통합을 제안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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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더불어민주당이 주장하는 필리버스터 중단의 현실적 이유들은 충분히 이해한다. 아무리 필리버스터가 지속된다 한들 야당은 테러방지법을 막을 수 없다. 필리버스터를 3월 10일까지 버틴다고 하더라도 그다음 회기에는 통과될 것이며, 박근혜 대통령이 서슬 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이상 새누리당은 그 어떤 타협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혹여 필리버스터 때문에 총선일정이 연기된다면 더불어민주당이 주장하듯 그들은 '독박'을 쓸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미 영혼을 판 언론들은 야당을 잡아먹을 듯 공격할 것이며, 많은 국민들은 야당의 발목잡기와 무능을 비난할 것이다. 게다가 혹자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로서 총선연기 후 국회해산을 들먹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김종인 대표가 고성까지 질러가며 필리버스터 중단을 주장할 수밖에.

사실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시작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는 게 맞다. 여론의 이목을 끌었고,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을 널리 알렸으며, 야권 지지자들을 그 어느 때보다 결집시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은 많은 국민, 특히 야권 지지자들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번 필리버스터가 그들에게 야당이 야당다울 수 있다는, 야당이 이번 총선에 기적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이들이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하는 것은 결국 이 희망 때문인 것이다.

노무현을 떠올리다

정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이다
 정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이다
ⓒ 김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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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이유로 필리버스터를 계속할 수 없다고 결정한 더불어민주당. 그런 야당을 보며 내가 떠올린 인물은 다름 아닌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많은 이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사랑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똑똑해서도 아니고, 잘 생겨서도 아니다. 그는 처세에 민감한 우리들과 달리 묵묵하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비현실적이어서였을까? 아니다. 정치인인 그가 그럴 리 없다. 그러나 정치란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그는 바보같이 부산에 계속 몸을 던졌다. 빤히 질 줄 알면서도 당위성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그리는 이상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안위를 초개와 같이 버렸었다. 정치란 현실을 분석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런 노무현 후보에게 감응했고 빚을 졌다. 그는 냉철한 현실감으로 무장하고 있던 우리에게 꿈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고, 패배주의의 늪에 빠져 있던 우리에게 패배가 끝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비루한 현실에 저당 잡혀 있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었으며, 현실은 인정하되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그리기 시작했다.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바로 그와 같은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더불어민주당의 현주소

그런데 지금, 소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계승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을 보라. 그들은 현실을 핑계 삼아 현실과 타협하려 하고 있다. 현실을 냉철히 판단하는 척하며, 현실의 뒤에 숨어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려 하고 있다.

그들이 그토록 외치는 현실을 보자. 현재 새누리당 지지율은 40%이상이며,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은 20% 안팎이다. 과연 현실을 뒤흔들지 않고서 총선 승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더불어민주당은 평생 야당에 만족하면서 지낼 것인가?

야당이 총선을 이기기 위해서는 아무도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는 담대한 도전이 필요하다. 냉철한 현실 인식보다는 뜨거운 현실 타파의 의지가 필요하다.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을 받아들이려 할 때가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고자 할 때 움직인다. 어차피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은 당신들이 아니라 나의 몫일 터, 당신들이 할 일은 나의 발밑을 흔드는 일이다.

어쨌든 필리버스터는 끝났다. 사람들은 초라한 결과에 분노하고 있으며, 현실에 저당 잡힌 야당의 무기력함에 다시 한 번 모멸감을 느끼고 있다. 이에 대해 야당이 할 일은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판을 흔들어야 한다. 그것이 총선에서 잘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시 노무현을 떠올린다. 그의 우직함과 진정성, 그리고 무모함이 그립다. 과연 그였으면 이때 어떻게 했을까? 그대들이 자문할 일이다


태그:#필리버스터,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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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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