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성률 시집이 나왔을 때 시집을 다 읽고 소감문을 써봐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다 읽은 지가 꽤 오래 되어서야 이제 시 세 편에 대해 소감을 써보려고 한다. 이성률 시인은 동화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시로 먼저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근래 그의 동화집 두 권이 중국으로 수출되어 인천문단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진작 시를 읽었으면서도 다소 늦게나마 수록 작품 몇 편 살펴보려 한다.

이성률 시인의 두번 째 시집
▲ 시집 <둘레길> 이성률 시인의 두번 째 시집
ⓒ 최일화

관련사진보기

이성률 시집 <둘레길>은 그 문체와 시상에서 개성이 뚜렷하다. 모든 시인이 개성적인 자기의 문체와 감성과 사상을 확보하고 있겠지만 이성률 시인의 경우 그 개성이 더욱 뚜렷하여 시인의 이름을 지우고 읽어도 금세 시인의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록된 63편의 시 중에 어떤 시를 읽어도 그 어조와 잔잔한 사고의 흐름이 일정하다.

조용하게 흐르는 강물 같기도 하고 얼음장 밑으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기도 하다. 그 물소리엔 따뜻한 봄기운이 가득하다. 이 시집에 있는 어떤 시를 읽어도 마음을 파고드는 감동은 있다. 내가 다루려고 하는 세 편은 읽고 소감을 쓰려고 따로 정해 놓은 작품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임의로 펼쳐 읽은 세 편이다. 그럼 첫 번째 작품부터 읽어보기로 하자.

며칠 전에 후려친 뒤퉁수

도로를 기어가는 굼벵이
뛰어가고 있다는 거 알았을 때
세상사는 이야기 끼리끼리 나누며
떼 지어 하늘 걷는 새들 보았다.
이 땅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길 위의 사람들 보았다.

나는 나인 내가
내가 나인 나는 아니었다.
네가 흘린 눈물 내가 흘릴 리 없고
내 삶은 특별한 거라 믿은 내가
네가 내가 한 우물이었다.

며칠 전에 후려친 네 뒤퉁수
내 뒤퉁수였다.

도로를 기어가는 굼벵이는 사람의 입장에선 기어가는 것이지만 굼벵이의 입장에선 뛰어가고 있는 것이다. 도로는 굼벵이에겐 다급하고 위험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한편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새는 얼른 보기엔 다급하게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굼벵이의 입장에서 보면 새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걷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도 이 땅을 힘겹게 걷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굼벵이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1연에선 일반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2연에선 존재로서의 나(나는 나인 나)와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내가 나인 나)와는 다르다는 걸 나타내고 있다. 그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는 이 세상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로서 인식하여 네가 흘린 눈물이 내가 흘린 눈물일 수 없다고 여겨 왔으나 결국 너와 나는 한 우물 속의 같은 물이라는 인식에 닿게 되는데 그것은 아마 그의 세상살이의 연륜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상상과 허구 속의 나를 바로잡아 현실 속의 나, 생존자로서의 나를 깨닫고 있다.

그리고 3연에 가서 그 인식은 더욱 확고하게 굳어져 며칠 전에 후려친 네 뒤퉁수가 사실은 내 뒤퉁수를 후려친 것과 같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젊은 날 차별성을 가지고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던 자세는 바뀌어 연륜이 지나면서 한 집단의 성원 모두가 공동 운명체라는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다음 시를 보자.
          
광어

내가 먹는 것은 회가 아니라
한 끼니의 분위기라 생각한 적 있습니다.
자연산 웰빙이요 회칼의 과학
바닷가 낭만이라 생각한 적 있습니다.
광어 입장에선
남자가 여자를 따먹었다는 말
누가 누구를 발가벗겼다는 말처럼
자존심 상할 일입니다.
광어와 난 몸 대 몸
목숨과 목숨입니다.
끈질기게 매달려온 삶 같고
비워줘야 할 시간 다를 바 없는
나도 광어에겐 지느러미 넷 달린 몸입니다.

이 시는 광어라는 한 바다생명체 앞에서 철저하게 반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시의 계보는 다양하다. 김영승은 시 '반성 743'에서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고 하면서 무생물인 선풍기에게도 인격을 부여하고 있다. 한편 최일화는 시 '방치된 슬픔'에서 '산새에게도 오해를 풀어주지 않으면/ 돌밭을 굴러가는 수례처럼/ 시간은 덜컹거린다'며 날짐승에게도 역시 인격을 부여하고 있다.

이성률은 광어라는 바다생명체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광어를 인간과 1대 1 동질의 생명체로 인식하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내고 있다. 좀 더 확대하면 우리가 먹는 모든 육류, 그리고 어류, 그리고 과일과 채소류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며 인류 문명 전체를 향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도 우리가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을 야만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있듯이 인간의 이기적인 먹거리를 위해서 동식물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착취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이성률은 바닷가 횟집에서 광어회를 먹으며 그 먹는 행위를 '한 끼의 분위기' 혹은 '회칼의 과학' 혹은 '바닷가 낭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반성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마치 여자에게 성희롱 발언을 하는 것처럼 광어의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할 일이라는 것이다. 나도 광어도 일 대 일 동등한 목숨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시인의 사물 인식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다음 세 번째 시를 보기로 하자. 

함께 하는 날들

네가 말 할 때보다 침묵할 때
너에게 더 귀 기울인다.
이불 밖으로 나온 맨발에서
부르튼 어머니의 말씀
더 많이 읽은 것처럼
도리어 네 말 잘 들린다.
바람도 네 침묵에 귀를 여는
공원의 여름밤이 차분하다.
귀가 있어서 흘려들은 말
그간 얼마나 상처로 가득할지
한 걸음 말이 비켜 있는 동안
야위어 가는 얼굴에 드리운
생활의 고달픈 그림자
언제고 눈여겨보았을까 싶은
보랏빛 저음의 네 숨결
미안하다, 너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함부로 너에게 꽂은 화살이었다.

이 시 역시 반성의 염을 담고 있다. 귀를 가지고도 상처 가득한 사람들의 말을 흘려듣던 것을 반성하고 있다. 화자는 말할 때보다 침묵할 때 더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침묵 속에 말로 했을 때보다 더한 상처가 있다는 걸 얼굴에 드리운 고달픈 그림자를 보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마침내 사과의 말을 쏟아내며 자신이 얼마나 고달픔 가득한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쉽게 판단했는지를 반성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시인은 세상을 행한 따뜻한 시선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 많은 시가 내용은 없이 말장난으로 일관하는 예를 보이는데 이성률은 그 반대다. 언어는 진지하고 메시지는 명료하다. 흔히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원로 시인은 교회에서 성직자들의 지나친 달변과 쏟아내는 웅변이 오히려 신앙의 진정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시에서도 그렇고 생활 속에서도 그렇다. 말과 웅변이 해결하지 못하는 걸 침묵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것이 아마 침묵의 힘일 것이다.

우리가 침묵의 예술 작품에서 강한 인상과 감동을 받듯이, 밖으로 나온 어머니의 부르튼 발에서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받듯이 화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세상의 모든 말없는 표정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다가가고 있다. 시인의 음성은 낮고 따뜻하다. 지금쯤 계곡의 시냇물은 졸졸 얼음장 밑으로 흐를 것이다. 겨우내 얼었던 세상이 시냇물소리에 봄을 회복하듯이 이 시집의 따뜻한 시편들이 세상살이에 고달픈 독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북돋워줄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인천 in



둘레길

이성률 지음, 황금알(2015)


태그:#이성률, #둘레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본인의 시, 수필, 칼럼, 교육계 이슈 등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쉽고 재미있는 시 함께 읽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