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일본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
 일본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
ⓒ 박도

관련사진보기


위안부 소녀상

한 친지와 겨우내 전화로만 안부를 물어오다가 이제 곧 입춘으로 날씨가 한결 풀리자 한번 만나기로 했다. 그분은 원주에서 열차를 타고 오는 나를 배려한 듯, 지난 2일 12시 교통도 좋고 내가 잘 아는 종각 역 부근으로 만남의 장소를 정했다.

사실 그곳은 고교시절 4년(나는 가정사정으로 고교를 4년 다녔음)과 모교 교사시절 1년 동안 거의 날마다 지나다녔던, 나에게는 홈그라운드나 다름이 없는 곳으로 지금도 그 일대 좁은 골목길조차 아련히 새겨져 있는 곳이다.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 조계사가 있고, 거기 길 건너가 나의 모교(중동고교) 옛 터요, 그 길 건너편에는 일본대사관이 있다.

나는 이즈음 나들이 길에는 거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 카메라가 구형으로 크고 무거운데다가 "나이가 들수록 지갑은 열고 말수는 줄이라"는 아내의 충고를 따르고자 함이다. 하지만 이번 나들이에는 카메라를 꼭 지참하고 싶었다.

마침 아내가 장기간 나들이 중인 데다가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역사의 기념물로 카메라에 담아 내 사진파일에 저장해 두고 싶었다(혹,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지도 모르기에). 아울러 아직도 추운 날씨인데도 위안부 소녀상을 지키는 갸륵한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 한 마디라도 해주고 싶었다. 지인과 종각역 가까운 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진 뒤 나는 조계사를 통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모교 터를 지나 일본대사관 앞으로 갔다.

곧 화면으로 자주 본 낯익은 위안부 소녀상이 나왔고, 그 곁 길바닥에 이불과 담요를 깔고서 소녀상을 지키는 여섯 명의 대학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을 밝히고 사진촬영 여부를 묻자 다행히 허락해주었다. 그들은 '한일위안부합의무효대학생 대책위원회' 소속 학생들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나는 사진 몇 컷을 찍은 후 한 학생에게 몇 마디 물었다.

위안부대책위 학생들이 위안부 소녀상을 노숙을 하며 지키고 있다.
 위안부대책위 학생들이 위안부 소녀상을 노숙을 하며 지키고 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한국을 매우 우습게 여기는 일본

- 소속대학과 이름은?
"국민대학교 황 아무개입니다."

- 며칠째 노숙하고 있습니까?
"35일째입니다."

- 왜 이렇게 노숙을 하십니까? 
"지난해 12월 28일 한일외교장관회담의 합의문을 보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 진정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졸속, 매국적인 합의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소녀상을 이전시키거나 아예 없앨 것 같아 뜻있는 대학생들이 이렇게 밤낮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 언제까지 이렇게 노숙할 겁니까?
"글쎄요... 일본이 진정으로 사과를 할 그날까지겠지요."

나는 그곳을 떠나 청량리 역에서 열차를 타고 원주 내 집으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먼저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65년은 한일회담이 체결된 해로 그때 박정희 정권은 '대일굴욕외교'라는 많은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졸속으로 회담을 일괄 타결했다. 그 결과 많은 지사들이 우려한 대로 그 후유증을 아직도 빚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결과를 빚었는가에 대한 가장 근원 문제는 아직도 일본이 한국을 매우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관련기사]
광복절보다 더 기념해야 할 '국치일'

나는 최근 10여 년 동안 일본을 여섯 차례 방문하면서 일본을 바로 보고 들으려고 노력하였다. 일본 전문가에 따르면, 그들은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라는 게 있어서 겉보기로는 매우 친절하고 평화를 사랑한 듯 보이지만, 속내는 그와 전혀 다르게 매우 전투적이며 잔인하다고 한다. 특히 그들의 친절성에는 깜빡하기 일쑤다. 오죽하면 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도, 독립신문을 만든 춘원 이광수도, 그들의 회유에 변절했겠는가.

'한일병탄'에 찬성한 친일 고관부인들이 일제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미스코시 백화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매국 고관 부인들의 일본나들이 '한일병탄'에 찬성한 친일 고관부인들이 일제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미스코시 백화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일본인들의 이중성

일본인들은 대체로 철저한 이중성으로, 강자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고, 약자에게는 무자비하고 매우 오만하다. 내가 미국 버지니아 주 남쪽 노퍽에 있는 맥아더기념관에 가 보았더니 일본인들이 맥아더에게 준 선물을 자랑스럽게 진열하고 있었다. 기념관에 소장된 사진에는 일본인들이 신으로 받들던 일왕 히로히토가 일왕의 복장 대신 연미복을 입고 맥아더 사령부를 찾아와 부동의 자세로 살려달라고 사죄한 뒤 잔뜩 겁에 질린 왜소한 자세로 맥아더 옆에 서 있는 사진도 있었다. 그들은 강자에게는 매우 비굴할 정도로 고개 숙인 데 견주어, 개화 이후 70여 년간 크나큰 고통을 준 한국에 대해서는'통석(痛惜)의 념(念)' 정도의 말장난으로 얼버무리며 더 이상의 진정성 있는 사죄는 외면하고 있다.

맥아더를 찾아온 일왕 히로히토
 맥아더를 찾아온 일왕 히로히토
ⓒ 맥아더기념관 /박도

관련사진보기


기자가 2003, 2004년 백범암살진상 규명에 관한 기사를 한참 쓸 때 당시 교육방송국(EBS) 본부장(박창순)이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제작에 걸맞은 소재를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래서 나는 100년 전 13도창의군 왕산 허위(許蔿) 선생과 그 어른을 사형시킨 조선 침략의 제일선 첨병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일본군 헌병대장 후손과의 화해의 장면을 기획한 뒤, 미국 휴스턴에 사시는 왕산 손자 허도성(許道成) 선생에게 제의했다. 허 선생은 "이제 100년이 지났는데 한일 양국은 구원을 씻고, 새로운 세기 화해의 시대로 같이 나가야 한다"고 하시며 어렵지만 통크게 허락했다.

그 이야기를 박 본부장에게 전하자 매우 좋은 기획이라고 선뜻 채택해 함께 그 일을 추진하였다. 마침 그 이듬해(2005년)가 한일 '우정의 해'라 나는 그 일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교육방송국 측에서는 창사기획 특집 <잊혀진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제1부에서는 '왕산의 후예들'이라는 제목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뿔뿔이 흩어진 왕산 후손 이야기를, 제2부에서는 '한 세기를 뛰어넘는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두 가문의 후손 간 화해의 만남을 기획했다. 그 마지막은 아카시 손자가 왕산 선생이 순국한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이나 구미 금오산 기슭에 있는 왕산 묘소 앞에서 사과 헌화한 뒤, 그 자리에서 두 집안 후손이 화해의 악수를 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작성한 뒤 EBS 담당 김동관 PD가 일본으로 건너가 아카시 손자 아카시 모도츠구(明石元紹)의 의사를 타진했다. 그때 김 PD가 귀국한 뒤 나에게 보낸 메일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 주류들의 대 한국관(韓國觀)

한일 병합 당시 일본군 헌병대장 아카시 모토지로
 한일 병합 당시 일본군 헌병대장 아카시 모토지로
ⓒ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 당시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한 생각은?
"(한국병합은) 불행한 일이었으나 당시에 조선을 그냥 두었더라면 조선은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먹혔을 것이며, 일본은 위험한 처지에 놓였을 것이므로 (한국병합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 민족이 자신의 나라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왕산을 죽게 한 데 대해서는 미안함이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 정세와 국가의 가치관 등에 있어 지금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그 어떤 환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그 당시 반근대적이고 법, 경제 등 여러 부문에서 뒤쳐져 있었으며,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문명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은 조선에게 일본의 문명화된 면모를 전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침략 당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일본은) 그 정도의 악의는 없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이 적어도 반 정도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일본이 잘못 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일본이 조선의 발전에 기여한 것들이 여러 수치에서도 입증되고 있으며, 법률,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일본이 한국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도 그 당시 제대로 된 하나의 국가였고, 그러한 나라에 대해 행한 (침략)행위에 대한 반성으로 (할아버지 아카시 모토지로는 대만총독으로) 대만에서는 대만 사람들을 존중하고, 일본인과의 차별 없이 잘 대해 준 것으로 알고 있다(대만에서는 할아버지에 대한 평판이 매우 좋음. 현재 아카시의 유골도 유언에 따라 대만에 이장되어 있음).

13도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
 13도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
ⓒ 박도

관련사진보기

- 선생께서 먼저 그들(왕산 후손)에게 만남을 제의할 의향은?
"만날 기회가 있으면 만나고 싶다(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구체적 대답을 회피함)."

김 PD가 별도 전화로 나에게 전하는 말로는 도쿄 교외에 거주하는 아카시 손자 아카시 모도츠구(明石元紹)는 현 일왕과도 친분이 깊은 사이로 일본 사회 주류 인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100년 전 할아버지 시대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했고, 한국 방문에 즉답을 회피한 것으로 보아 애초 기획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면서, 이것이 일본 주류들의 마음 속 생각일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 기획물은 끝내 제작하 못하고 대신 <왕산가의 사람들> 제1편 '의병장의 후예로 살아가기(2005. 6. 22.)'와 제2편 '잊혀진 후예들(2005. 6.23.)'을 제작 방영한 바가 있었다.

위안부 소녀상 건너편의 경찰차와 일본대사관
 위안부 소녀상 건너편의 경찰차와 일본대사관
ⓒ 박도

관련사진보기


이제 그만 엎드려 절 받으려고 하지 말자

나는 아베를 비롯한 주류들은 아직도 이런 지난날의 사고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과거 자기네들의 충견 노릇을 한 헌병오장 아들, 그리고 일본군 장교 딸이 지금 한국 정가에서 주름을 잡고 있으며, 여태 살아있는 간도특설대원마저도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주류 신문을 옮겨다니며 '영웅' 대접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작태를 보면서 일본의 극우 주류들은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총독부 회의실에서 미군에게 항복문서를 조인한 뒤, 제 나라로 쫓겨 가면서 했다는 다음의 말을 상기할 것이다. 

"우리는 총칼보다 더 무서운 문화무기로 조선인들을 교육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쉽게 그 굴레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민족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00년 내에 다시 조선에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무릎을 치면서 내심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센징, 바가야로. 너희들 먼저 집안부터 정리하라."

우리 백성들은 이제라도 일본인들의 속 좁은 강대 약, 약대 강의 철저한 그들의 잔인한 이중성을 잘 알고, 지난 한일 외교장관 합의문을 파기하거나 최소한 10억 엔 출연 돈만은 제발 받지 말기를 제의한다. 이제 더 이상 일본에게 우리의 자존심 상하는 사과를 요구하지 말자. 엎드려 절 받고자 한 요구도 한두 번이면 족하지 않는가.

그 대신 우리 국내외 백성들이 한 푼 두 푼 성금을 모아 위안부 할머니의 노후를 보장해 드리고, 일본의 죄악상을 남길 수 있는 기념관, 그리고 이미 많은 한을 품은 채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탑 등을 만들어 드리자. 그게 하늘에 계신 할머니나 살아 계신 할머니 모두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일본 정부가 출연한 그 더럽고 치사한 10억 엔을 받는다면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 돈을 쓸 때 새삼 지난날의 치욕이 되살아나 얼마나 괴롭겠는가. 하지만 백성들이 한 푼 한 푼 모은다면 할머니들은 이제까지 산 보람을 느끼고, 하늘에 계신 할머니들은 비로소 눈을 감을 것이다.

일본대사관 앞 폴리스라인 안에서 노숙을 하며 소녀상을 지키는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 대학생대책위 소속 학생들.
 일본대사관 앞 폴리스라인 안에서 노숙을 하며 소녀상을 지키는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 대학생대책위 소속 학생들.
ⓒ 박도

관련사진보기


우리의 성금으로 위안부를 돕자

이런저런 일제강점기의 모든 역사적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자. 그러면 언젠가  양심이 살아있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국에 세워진 위안부 위령탑 앞에 무릎 꿇고 자기네 조상의 잘못을 사죄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이 역사의 정의요, 진리다.

일본인들이 우리들에게 한 일들은 너무나 지독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울분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자기 딸 같으면, 자기 누이 같으면 위안부를 시켰겠습니까? 히로히토 천황에게 너무나 할 말이 많았습니다. (나는) 일본군 부대에서 "천황의 명령이다"라는 말을 매일같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나이를 먹어 버렸습니다. 이 한을 풀지 않고는 죽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죽기 전에 일본은 진상을 밝히고 이제라도 보상해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오점을 제대로 알아야만 하고 빨리 씻어 내야 합니다.
- 박도 엮음 <일제강점기> 635쪽 황금주(1927~2013) 할머니의 증언 마지막 말

위안부 황금주 할머니가 생전에 일본 나고야 현지에서 위안부 생활을 증언하고 있다.
 위안부 황금주 할머니가 생전에 일본 나고야 현지에서 위안부 생활을 증언하고 있다.
ⓒ 눈빛출판사

관련사진보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새 어느덧 열차는 원주 역에 멎었다. 나는 옷깃을 여미면서 국내외 동포들에게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모금'을 정식으로 제안하는 바이다.

우리 백성들의 깨끗한 돈으로 돌아가신 위안부 위령탑을 세우고, 살아있는 위안부 노후를 보살피며, 그분들의 기록을 후세에 영원히 남기자.

이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 대한 백성들의 최소한 양심이 아닐까?


태그:#위안부 소녀상, #성금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이 기자의 최신기사"아무에게도 악을 갚지 말라"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