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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 인도 사람들 코끼리 좋아하는 것 알지?"

난데없는 최고의사결정연구단 다나카 단장의 질문이다.

"아무래도 코끼리와 소를 신의 모습이라며 귀하게 여긴다고 들었습니다."

미나미 의원은 얼떨결에 답한다.

"그 많고 많은 신들 가운데 인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신 중 하나인 지혜의 신 '가네샤' 머리가 코끼리라는 것만 보더라도 인도 사람들이 코끼리를 얼마나 숭상하는지를 알 수 있지.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예전에 상아를 얻기 위해 코끼리를 사냥하는 것이 다반사였지. 요즘은 금지됐지만.

그 코끼리 사냥꾼들에게는 철칙이 있다네. 무리 중 가장 크고 늙은 우두머리 코끼리부터 쓰러뜨려야 한다는. 그래야 나머지 코끼리들을 쉽게 잡을 수 있기 때문이지. 코끼리 떼 우두머리는 길잡이인 동시에 충실한 파수꾼이라는 얘기야. 지금 연구단은 우리 대일본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존재해. 하지만 늙은 호랑이와 겁 없는 여우가 그 노력을 망치고 있으니, 반드시 바로잡아야지."

다나카는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장외에서 온갖 훈수를 두고 있는 미우라 총리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미나미에게 에둘러 말한다.

"단장님, 그럼 무슨 묘안이라도 있습니까?"

미나미 의원은 궁금하다.

"아직 밝힐 수는 없고, 준비하는 게 하나 있기는 하지. 자네가 진정으로 내 사람이라면 이번 일에 한몫을 해줘야 하네."

자못 심각하게 다나카 단장은 미나미 의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는 영원한 단장님 오른팔입니다. 명만 내려 주십시오."

비굴한 아첨 낯빛을 감추지 않는 미나미 의원이다.

"나와 나눈 얘기는 극비로 하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들은 마치 무슨 가치 있는 정치적 사명감이나 크나큰 명분을 내세우듯 얘기한다. 그러니까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 영화 <올 더 킹즈 맨(All the king's men)>을 잘못 패러디 한 것이다. 다나카 간사장은 영화의 주인공 윌리 스탁(숀 펜)이 부정부패를 없애버리겠다며 루이지애나 주지사에 출마하는 것처럼 치장한다. 그리고 미나미 의원은 기자 생활 중 알게 된, 순수하고 열정적인 '초짜' 정치인 윌리 스탁에 매력을 느끼고 보좌관으로서 일조하기 위해 갖은 '나쁜 짓을 음지에서 일삼는 잭 버든(주드 로)을 자청하는 셈이다.

2006년 작,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영화 <올 더 킹즈 맨(All the King's Men)>에서 지방재정관 출신 루이지애나 주지사 윌리 스탁(숀 펜)과 기자 출신 보좌관 잭 버든(주드 로)는 정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정치는 그들을 기존 정치인들처럼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타락시킨다.
 2006년 작,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영화 <올 더 킹즈 맨(All the King's Men)>에서 지방재정관 출신 루이지애나 주지사 윌리 스탁(숀 펜)과 기자 출신 보좌관 잭 버든(주드 로)는 정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정치는 그들을 기존 정치인들처럼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타락시킨다.
ⓒ 영화 '올 더 킹즈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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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과 그 속내는 전혀 딴판이다. 닳고 닳은 정치인 다나카는 단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성채와 같은 미우라 전 총리와 죽이고 싶은 만큼 얄미운 다케우치 실장을 쳐내려는 것이다. 자신이 잡은 동아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나미는 다나카에 빌붙어 묻어가려는 속셈이다.

그 자리에서 음험한 계략의 단초는 뚜렷하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나카 단장이 미우라 전 총리와 다케우치 실장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함정을 파고 있고, 미나미는 그것을 부추기고, 꼬드기고 있다는 혐의는 분명하다.

K가 미키에게 했던 말이 맞다.

"어떤 세계에나 먹이사슬은 존재하지. 야생이든,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도 포식자가 있으면, 먹히는 대상도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다만 정글과 같은 야생에서는 배부른 포식자는 더 이상 먹이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배부른 포식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언제나 먹이가 있으면 훗날을 위해 무조건 사냥하고 본다는 얘기지. 일단 갈무리 해 두는 게 인간의 속성인 것 같아. 잉여가 넘쳐나더라도 무조건 챙긴다는 것.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는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안달이지.

먹이 대상도 무제한에 가깝고. 예외적으로 '식인 행위'를 하는 엽기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같은 인간을 잡아먹지는 않지만. 그 이외에 모든 것, 동물이나 식물을 포함해 인간이 먹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재산이나 권력, 아울러 정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손에 쥐려고 하는 탓에 세상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고 봐. 물론 이런 근본적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휴매니태리어니스트도 있기 때문에 세상은 굴러가지만. 요즘은 그것도 힘에 부쳐도 한참 부치는 것 같아. 그래서 비극은 계속 이어지고."

늦여름 볕이 아직 따가운 오전이다. 미키는 부모님 집에서 오하라가 전해준 클라우드 사이트에 접속한다. 가능하면 태교(胎敎)를 위해서 좋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게 '예비 엄마' 마음이다. 하지만 아이 아버지를 찾아주는 것이 더 우선이라 태교는 잠시 접기로 한다.

처음 봤을 때는 잘 몰랐다. 곰씹어보니 오하라 검사라는 사람 참으로 무서우리만큼 주도면밀하다. 마치 '다케우치 평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세세한 내용 때문이다. '성장과정'과 '연구단 입문' 폴더는 뛰어넘고 '다케우치 비밀작전'에 집중한다. 'Takeuchi's Secret Operations'라고 제목이 달린 폴더는 최근 그가 저지른 여러 가지 범법적 사실을 낱낱이 설명하는 내용이라 더욱 눈에 띈다.

K를 살인범과 국가안전보장법 피의자로 엮어 넣은 '이메쿠라 극비 작전'을 본 미키는 정신 줄을 놓칠 뻔했다. 그 내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아니 어떻게 국가권력을 이용해서 한 개인을 이렇게 파괴할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두렵기만 하다.

당장 오하라 검사 후배인 고바야시에게 전화한다. 그러나 오하라 검사는 이미 고향인 니카타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미안하지만, 입원해 있는 니가타 병원 이름과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미키는 확인하고 싶었다. 이것이 사실인지, 되돌릴 수는 있는지 그 작전에 참여했던 오하라 검사의 얘기를 들어야만 했기 때문에 더욱 간절했다. 바로  오후 니가타 행 신간센 열차를 예약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엄마, 저 나가요. 저녁 늦게나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바삐 택시를 잡아타고 도쿄역으로 향한다. 니가타까지 신칸센을 타면 2시간 조금 넘는 거리다. 일본 말로 따오기라는 '도키'라는 열차에 오른다. 평일이라 열차 2층 칸은 한산하다. 노인 부부 몇 쌍과 수트를 입은 한두 명의 직장인이 고작이다. 창가 자리에 앉은 미키는 착잡하기만 하다. 도무지 어디부터, 어떻게 풀어야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지금 정부라는 국가기관은 외신 보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곡하려 든다. 의식 있는 일부 정치인들이 나서고 시민들은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불합리를 지나 비합리와 몰상식, 그리고 불법과 만행으로 치닫고 있다.

인간의 가치나 양심이라는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미쳐가는 일본을 되돌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K를 되찾을 수 있을까.'

너무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몸에서 신호가 온다. 지금쯤 정신없이 자라고 있을 아기의 뇌세포가 보내는 모양이다.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젠 눈을 감아요. 숨을 크게 쉬세요. 그리고 아빠와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봐요.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 질 거예요."

갑자기 요의(尿意)를 느낀다. 화장실에 다녀온다. 무얼 마시지도 않았는데 자주 화장실을 찾는 것이 요즘 미키에게 일어난 몸의 변화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무더웠던 여름의, 검은 빛에 가까운 녹음이 많이 옅어졌다.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 간혹 황금빛도 보인다. K와 만난 다음 계절이 두 번 바뀌었고, 이제 세 번째 계절을 맞이한다. 이 계절을 K와 함께 지내고 싶다.

니가타 역에서 택시를 타고,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니가타대학 의치학총합병원'에 도착했다. 프론트에 물어보고 오하라 검사 입원실을 찾는다.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그리고 얼마 전 시위 현장에서 혼절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맡았던 병원 냄새와 별반 다름이 없어 익숙하다.

입원실을 찾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노크를 해야 되나? 하지 말아야 되나?'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환자 한 사람이 누워있다. 그러나 오하라 검사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하라 검사님, 검사님이시죠?"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아, 저 이토 미킵니다."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죄송해요. 도쿄에 계실 때 병원으로 찾아뵐까 했는데 못 갔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미키는 이렇게 묻고 나서 당황한다. 입에는 붕대가 둘러지지 않았지만 눈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어서다.

"조금 심각하게 보이죠? 별일 아니에요. 잠시 시신경이 마비된 것 뿐이니까요"

"아니, 가스 폭발이면 큰 사고잖아요. 다른 데는 괜찮고요?"

"화상이 좀 있고, 다리 골절 정도라고 하네요. 한 달 정도 입원하면 된다고 하네요."

"천만다행이네요."

오하라는 거짓말을 했다. 시신경을 완전히 잃어서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전신 화상으로 그 흔적을 일생동안 지울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미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짐짓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오하라 검사님이 전해 준 자료 보고 너무 충격 받았어요. K가 없어진 것도 다케우치 짓인 줄 안 다음, 치가 떨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미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소리 없는 눈물을 떨군다. 오하라가 더듬더듬 미키 손을 잡는다.

"이토 기자, 미안해요. 저도 책임져야 할 일이에요. 어쨌든 다케우치 실장 수족이 돼서 일 해왔으니까요. 제가 다케우치 실장과 관련해서 모든 자료를 드린 것은 당신이 기자이기 때문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보다 당신이라면, 다케우치 실장과 최고의사결정연구단의 미친 짓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NYT 기사처럼요."

오하라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키는 오하라의 손을 놓는다. 그리고 기자, 아니 전직 기자답게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잊지 않는다.

"근데, 제게 준 자료들 모두가 사실입니까? 그리고 이 내용을 언론에 공개해도 당신에게 아무런 피해가 없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연구단 측이나 다케우치 실장 쪽에서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니까요."

미키의 모습이 이미 고전이 된 1976년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의 밥 우드워드(로버트 레드포드) 기자와 겹친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해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었던 주인공이다. 그는 정보원인 익명의 고위 정부 당국자 '딥 스로트(deep throat, 2005년 한 잡지를 통해 그는 당시 연방수사국(FBI) 2인자, 부국장이었던 윌리엄 마크 펠트로 알려졌다!)'로부터 "돈을 좇으라"라는 워터게이트 사건 단서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딥 스로트'에게 모든 의혹이 사실이냐고 진중하게 재확인하듯 미키는 오하라에게 되물은 것이다. 영화와 다른 점은 미키의 자료에서 중요한 단서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고전이 된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에서 정부 고위직 관료인 '딥 스로트(deep throat)'가 기자 밥 우드워드(로버트 레드포드)에게 '돈을 쫓으라'고 귀띔을 해준다.
 고전이 된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에서 정부 고위직 관료인 '딥 스로트(deep throat)'가 기자 밥 우드워드(로버트 레드포드)에게 '돈을 쫓으라'고 귀띔을 해준다.
ⓒ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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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사실입니다. 다케우치 실장과 관련된 미우라 전 총리, 다나카 단장, 미나미 의원을 살펴보면 됩니다. 그 인적 네트워크를 추적하면, 자료를 검증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이거…."

오하라가 내민 것은 두 사람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는 메모지다. 한 사람을 스텔라, 다른 한 사람은 미야자와 회장 것이었다.

"이게 뭐죠?"

"다케우치 실장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아는 사람들이에요. 한 사람은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자고, 한 사람은 그 여자를 돌보는 명망 있는 사업갑니다. 그분들에게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저, 이토 기자,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 제가 죽어서도 못 갚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붕대에 가려진 오하라의 눈에서 눈물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하라의 목소리는 이미 속죄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게 사과하지 마세요. 그 사람을 제 앞에 데려오세요. 그것만이 오하라 검사님이 그에게서 용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저는 그럼 평생 죄를 갖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나게는 해드렸어도 그를 풀어 주는 일은 오로지 다케우치 실장님이나 그 윗선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미키는 다케우치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최종 확인했다. 결국 그  악에서 빚어진 모든 비극의 막을 내리기 위해서는 다케우치와 그의 네트워크를 없애야 한다는 얘기다. 참으로 어려운 숙제다. 하지만 미키는 다잡는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얻었다. 다케우치와 그의 네트워크에 맞서는 나와 나의 네트워크를 조직해야 할 일이 남았다.'


태그:#가네샤, #올 더 킹즈 맨,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숀 펜, #로버트 레드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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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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