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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대지진의 상처

무너진 이후 저 상판 밑에 훨씬 두꺼운 고무를 깔았다고 한다
▲ 한신 고속도로 고가 무너진 이후 저 상판 밑에 훨씬 두꺼운 고무를 깔았다고 한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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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도착한 지 3일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숙소 근처, 고베 항 끝부분에 붙어있던 고베 메모리얼파크였다.

그곳은 1995년도에 일어났던 고베 대지진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공간으로서, 이미 전날 밤 저녁 먹고 들어오는 길에 잠깐 들러서 대충 구경했었지만, 날이 밝을 때 다시 한 번 제대로 보고 싶었던 공간이었다. 어쨌든 고베는 1995년의 대지진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도시인 바, 거기서부터 연수단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듯 싶었다.

그러나 웬걸. 밝은 햇살 아래에서 본 고베 메로리얼파크는 어젯밤에 봤던 것보다도 더 작게만 느껴졌다. 그곳에는 지진으로 갈라진 콘크리트 구조물과 그 위에 세워졌던, 기울어진 가로등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는 많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고 거대한 한신 고속도로가 넘어갔었던 고베 대지진을 그려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날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 고베 메모리얼파크 그날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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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메모리얼파크
▲ 고베 대지진의 흔적 고베 메모리얼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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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 옆에 전시되어 있던 사진들도 마찬가지로서, 그곳에는 우리가 1995년 고베 대지진이라고 하면 떠올리던 그때 그 사진들이 없었다. 대신 고베항의 균열과 관련된 사진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옆의 구조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만으로 그때의 끔찍했던 참상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였다.

본토에 온 만큼 뭔가 스펙터클한 사진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는데, 그 감정은 이내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그래, 치밀하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이 그날의 모습을 재현할 수 없어서 안 했겠는가. 그 날을 잊지는 않되, 과하고 자극적이지 않게 간직하려는 것이겠지. 오히려 나 같은 이방인이나 쓸데없는 호기심에 그 날의 참상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런 내가 정작 1995년 대지진의 비극을 느낀 건 메모리얼파크를 지나 평화로운 모습의 고베항과 메리킨 파크를 보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는 주민들이 낚시를 하고, 조깅을 하며, 각자의 아침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 일상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그때의 참혹함을 감히 상상할 수 있었다.

저 멀리 고베타워가 보인다
▲ 고베항 전경 저 멀리 고베타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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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항의 아침
▲ 낚시하는 고베 시민 고베항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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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단순히 커다란 한신 고속도로 고가가 넘어간 일로 기억되는 고베 대지진이지만, 모든 것을 빼앗긴 고베 시민들은 그 순간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무너지는 구조물과 그로 인해 불타는 수많은 목조건물들, 그리고 그 속에 갇혀 죽어가는 사람들. 그 생지옥 속에서 고베 시민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궁금했다. 그들은 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재해로 인해 야기되었던 공포와 사회적 불안 등을 말도 안 되게 조선인 탓으로 돌리며, 증오로 덮어버렸는데 1995년의 트라우마는 현재 어떻게 치유하고 있을까? 연수단의 다음 목적지인 커뮤니티 서포트 센터 고베(이하 CS고베)는 바로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고베의 답이었다.

고베 대지진의 산물 CS고베

아니나 다를까. 나카무라 준코(中村順子) 센터장은 CS고베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그 배경으로 1995년 고베 대지진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록 통역을 통한 설명이었지만 센터장의 표정과 몸짓에서 우리는 당시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고베 산간 지역에 살고 있어서 무사했다는 그녀는 덕분에 곧바로 재난구호 활동에 뛰어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진 등과 같은 재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라고 했다. 일본은 인프라가 좋은 나라라서 최소한의 식수를 구하는 건 힘들지 않았지만, 화장실이나 샤워 등에 필요한 생활용수까지는 아니었던 바, 50여 명이 넘는 인원으로 임시조직을 만들어 약 2개월 동안 고령자나 장애인 등에게 우선적으로 물을 공급했다고 했다.

열심히 설명하는 센터장
▲ CS고베에 대한 설명 열심히 설명하는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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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장은 재해 난민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며 물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치유도 같이 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는데, 2개월이 지나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고 안정화가 되면서 하나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진 이후 많은 이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물자를 지원해주다 보니 많은 난민들이 그것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심해지더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센터장은 그때부터 질문을 바꿨다고 했다. 난민들에게 '더 도와드릴 것이 없나요?'라는 질문 대신 '당신은 이 지역에서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난민들의 의존성을 경계하고 오히려 그들이 서로 도울 수 있도록 독려했다고 했다.

피해 난민들을 단순히 지원이 필요한 객체로 대상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활동하는 구호의 주체로 상정하고, 내부적으로 남는 자원을 모자란 곳에 연결시키는데 집중한 것이다. 대지진 이후 선포된 일본NPO법은 바로 그와 같은 노력의 결정체였다.

CS고베의 사업계획
 CS고베의 사업계획
ⓒ CS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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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995년 고베 대지진 이후 설립된 CS고베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 역시 이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시민들이 행정에게 과도하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협동과 연대를 통해 시민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 나카무라 준코 센터장은 중간지원조직의 정의를 그와 같이 내리고 있었고, 그에 따라서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CS고베는 우리 사회의 중간지원조직들과 조금 달라보였다. 사회적경제조직을 지원하거나 시민들의 사회활동을 돕는 등의 기능이나 역할은 우리의 사회적경제지원센터나 마을지원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좀 더 주민 친화적이었고, 민간 주도적이었으며 정파를 초월해 있었다. 센터가 고베 대지진 때 벌인 자발적인 구호활동을 기반으로,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설립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전거 주차장 관리사업
▲ CS고베의 사업 자전거 주차장 관리사업
ⓒ CS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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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시민들을 대변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그만큼의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CS고베. 따라서 그들은 그만큼 행정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보다 좀 더 동등한 위치에 서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사업성과를 증명하기 위해 정량적 수치 등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대신 행정의 전략적 파트너로서 좀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문제에 더 많은 열정을 쏟고 있었다.

요컨대 CS고베는 고베 시민들이 고베 대지진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들은 CS고베를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CS고베를 통해 시민 간의 연대를 확대시켜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하고 있었다.

방치되어진 우리의 트라우마

CS고베를 나오면서 우리가 하나같이 이야기한 것은 나카무라 준코 센터장의 역할이었다. 그녀를 보면서 다시금 한 사람의 열정이 사회를 얼마나 따뜻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틀 전 방문했던 교토 하루하우스의 후니상이 자신의 집을 커뮤니티 공간으로 내놓음으로써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내었다면, 그녀는 철저하게 조직의 관점에서 지역공동체를 이끌고 있었고, 그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우리들에게 그런 열정이 있는가. 그녀는 고베 대지진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맞아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정파를 떠나 수많은 시민들을 설득하고 조직해왔는데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틀 안에서만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CS고베에서
▲ 나카무라 준코 센터장 CS고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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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사회에도 일본의 지진과 비견될 만한 재앙은 계속 있어 왔다. 1950년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었고, 1980년 광주에서는 죄없는 민간인들이 자국의 군대에게 학살 당했으며, 1997년에는 IMF라는 괴멸적인 경제적 위기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렸었다.

문제는 그와 같은 재앙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대해 아직도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치유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는 분단이라는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혀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으며, 광주민주화항쟁과 관련된 트라우마는 지역정치에 볼모로 잡혀 심지어 아직까지도 혹자들의 폄훼를 받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IMF는 정치적으로 정파성을 많이 띄지 않는 이상 그 트라우마의 치유에 대해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낼만도 하건만 이 역시 난망하기는 매한가지다. 사회가 IMF 이후 신자유주의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그 체제에 대한 성찰 자체가 불순하게 여겨지고 있는 탓이다. 현재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이야기 되고 있는 소득양극화 등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것은 결국 그 시작이었던 IMF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의 본질과 현상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이를 분석하고 승화시켜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그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것이 타인의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고베
▲ 고베의 아침 트라우마를 극복한 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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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CS고베가 새삼스레 다시 보였다. 어쨌든 고베 대지진이란 엄청난 재앙 앞에서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그것을 경험 삼아 시민들의 삶을 좀 더 윤택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앞서 언급했던 재앙들을 맞아 말로는 하나 되어 국난을 극복한다고 했지만, 결국 공동체는 파괴되고 개인들은 파편화 되어 아직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으니 그런 CS고베가 대단하다고 느낄 수밖에.

우리 연수단은 CS고베를 나와 고베의료생협으로 향했다. 고베 대지진이 과연 고베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번에는 고베의료생협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태그:#고베, #일본연수, #CS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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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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