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원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박기원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 박진철


"이번만큼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 기필코 스피드 배구를 완성하겠다."

박기원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목소리는 사뭇 비장했다.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절실함이 보였다. 한국 배구의 미래가 그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세계 무대는 고사하고 아시아에서도 중위권으로 밀려나고 있는 남자배구. 대한배구협회는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감으로 2020 도쿄 올림픽을 겨냥해 한국 배구 역사상 초유의 프로젝트들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대대적인 혁신에 돌입했다.

지난 10월 사상 최초로 '고교·대학 선수 14명'을 국가대표로 전격 발탁했다. 2m가 넘는 장신의 유망주들이 대거 포함됐다. 고교 1학년인 만 16세의 임동혁(라이트·201cm)은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라는 새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더욱 획기적인 부분은 고교·대학 국가대표 14명을 따로 소집해 2016년 1월 3일부터 30일까지 진천선수촌에서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을 실시한다는 점이다. 이번 남자배구 대표팀 특별훈련과 여자배구 대표팀 지원을 위해서 30일부터 'V-퓨처(Future) 펀드' 모금도 시작했다. 프로팀의 젊은 감독들 중심으로 적극 동참할 의사를 보이고, 대학팀 감독까지 확산되는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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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배구협회


이제 남자배구 혁신의 키는 박기원 신임 감독에게 맡겨졌다. 박 감독은 국내 지도자 중에 몇 안 되는 해외파인 데다 확고한 스피드 배구론자이다.

박 감독은 1970년대 부동의 국가대표 센터였다. 해외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1979년 세계 최고인 이탈리아 리그로 진출했다. 이후 2003년도까지 20여 년 동안 이탈리아 리그 프로팀 감독을 역임했다. 리그 우승 5회, 준우승 4회를 달성하며 성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이란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사상 첫 은메달을 안겼다. 이후 4년 동안 이란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면서, 스피드 배구로 이란 대표팀을 탈바꿈시키고 오늘날 세계적인 강팀으로 올라서는 데 토대를 구축했다. 지금도 이란에서는 '이란 배구의 대부' 격으로 여기며 후한 대접을 한다.

박 감독은 2011년 4월 한국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스피드 배구를 도입했다. 신선했고 성과도 좋았다. 감독 부임 이후 첫 국제대회인 2011월드리그에서 세계랭킹 4위 쿠바를 세트 스코어 3-0으로 완파했다. 프랑스에는 2승을 거두었다. 세계 강호인 이탈리아와도 풀세트 접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전광인이라는 스피드 배구에 최적화된 공·수겸장 레프트를 발굴했다.

2013년 세계선수권 예선전에서는 홈팀 일본을 3-0으로 완파하며 8년 만에 세계선수권 출전권을 따냈다. 당시 한국에 패한 일본 배구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2014년 세계선수권 본선에서도 세계 최강 브라질과 풀세트(2-3 패)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그러나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이란에 집중한 나머지 준결승에서 일본에 패하는 뼈아픈 실패를 했다. 그렇게 박 감독의 실험은 미완성으로 끝나는 듯했다.

이후 문용관 감독 체제로 전환한 대표팀은 올해 8월 아시아선수권에서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세계예선 출전권을 노렸다. 그러나 8강에서 또다시 일본에 패했다. 그 여파로 대회 7위에 그치며 올림픽의 꿈도 사라졌다. 남자배구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출전 이후 16년 동안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하고 있다. '지금 상태로 가면 영원히 올림픽 못 간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다.

결국 대한배구협회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리시브 중심의 구식 배구를 버리고, 세계 배구의 핵심 전술인 스피드 배구로 전환을 선언하고 박기원 감독에게 다시 대표팀 지휘봉을 맡겼다. 신만근 전무, 김찬호 경기력향상위원장 등 지난 5월 취임한 신임 지도부가 스피드 배구론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상 첫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을 앞두고 있는 박 감독의 생각과 구상을 직접 들어봤다. 인터뷰는 대한배구협회 배구회관(강남구 도곡동)에서 진행했다.

 박기원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박기원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 박진철


- 2011년 대표팀 감독을 맡을 때 초창기에는 스피드 배구를 했다. 그런데 2~3년이 지난 뒤부터 구식 배구와 타협한 모습을 보였다는 지적이 있다.
"그건 맞다. 나중에 스피드 배구가 희석된 것만은 사실이다. 대표팀 구성이 초기 스피드 배구를 할 때의 주전 멤버가 아니고, 계속 멤버가 바뀌다 보니 그런 측면이 있었다. 스피드 배구는 충분히 연습을 해서 국제대회에 나가야 하는데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대회 때마다 최상의 컨디션을 보인 선수 위주로 데려갔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대한배구협회가 장기간의 계획을 가지고 미리 대표팀을 틈틈이 소집해서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2011년에 스피드 배구를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 만큼 어느 정도까지는 한국형 스피드 배구를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

- 남자배구가 남미·유럽 강팀들과 현격한 실력 차이가 나는 핵심 이유가 있다. 남미·유럽 강팀들은 모든 포지션의 선수가 신장이나 파워, 체력, 기술 등 모든 면이 우리보다 뛰어나다. 거기에다 스피드 배구를 하면서 시스템 배구와 토털 배구를 구사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주로 한 두 명에 의지한다. 또한 공격을 잘하면 수비가 약하거나 수비를 잘하면 공격력이 딸리는 소위 '반쪽 선수'가 많다. 그런 조건에선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국내 상당수의 팀들은 여전히 안정된 리시브에 의존하는 배구를 하고 있다.
"사실 매 경기 리시브를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 굳이 어려운 스피드 배구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서브가 갈수록 강력하고, 블로킹 수준도 높아졌다. 경기 때마다 리시브를 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리시브가 잘 안되는 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서 리시브가 잘 안 됐을 때도 세터와 공격수 전원이 평소 연습하고 약속된 시스템대로 빠른 플레이를 하면서 성공률을 높이고자 하는 게 스피드 배구다.

당연히 '반쪽 선수'로는 스피드 배구를 할 수가 없다. 레프트 공격수 2명은 똑같이 서브 리시브, 디그(상대방 공격을 받아내는 것), 2단 연결(수비된 볼 토스) 등 수비 능력은 물론, 언제든지 강력한 '파이프 공격'(중앙 후위 시간차 공격)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파이프는 스피드 배구의 꽃이다. 파이프를 자주 써야만 공격 루트가 다양해지면서 상대의 블로킹을 쉽게 따돌릴 수 있다.

라이트, 센터, 리베로 등 다른 포지션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가지만 잘해서는 안 된다. 특히 리시브가 잘 안 됐을 때, 공이 네트에서 2m 떨어진 상태에서도 센터가 속공을 때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리시브도 위에서 오버 토스로 받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서브도 모든 선수가 스파이크 서브든 플로터 서브든 강하고 까다롭게 구사해야 한다."

- 이번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의 주안점이나 목표는?
"이번 특별훈련을 통해 모든 포지션의 선수를 공격과 수비, 강서브, 토스와 2단연결 능력 등을 두루 겸비한 완성형 선수로 만들기 위해 기초적이고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할 예정이다.

한선수(대한항공), 전광인(한국전력) 같은 선수를 최소한 3~4명 만들어내는 게 이번 특별훈련의 핵심 목표이다. 한선수는 공격수 전원을 살려줄 수 있는 빠른 토스워크가 가능하고, 전광인은 공격과 수비력을 두루 갖춘 완성형 레프트다. 그게 국가대표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고, 프로 팀에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 실제 프로에서도 그런 선수를 가장 원하는 것 아닌가.

또 이번 특별훈련이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은 2m가 넘는 장신 선수들을 제대로 키우고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참가하는 고교·대학 선수 중에는 2m가 넘는 장신 선수가 많다. 그런 선수들은 고교 때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영양 보충과 체력 단련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

진천선수촌처럼 모든 게 잘 갖춰진 곳에서 관리를 해야 장신 선수들이 대학이나 프로에 가서도 좋은 기량을 발휘할 수 있고, 유럽 선수처럼 성장할 수 있다. 현재 학교 시스템에만 맡겨놓으면 프로에 갈 때쯤엔 기량이 퇴화하고, 키만 컸지 이도 저도 아닌 선수가 된다."

- 대한배구협회는 이번 특별훈련에 참가하는 고교·대학 국가대표 선수를 단일팀으로써 내년 여름 한국배구연맹(KOVO)이 주최하는 KOVO컵 대회에 출전시키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아주 좋은 아이디어다. KOVO측과 협의를 해야 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성사됐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연습은 실전 경기이기 때문이다.

이 선수들이 KOVO컵에 출전한다면 프로팀과의 공식 경기를 통해 스피드 배구 실전 경험 축적, 신예 스타 탄생, 프로배구 제8 구단 창단 동기 부여 등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국가대표팀과 프로배구가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KOVO컵에 참여해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보고 싶긴 하다. 배구팬들도 흥미로운 볼거리가 생겨서 좋아하실 것 같다."

- 박 감독은 요즘 V리그 경기장을 자주 찾고 있다. 프로팀 소속 국가대표를 추가 선발하기 위한 점검 차원으로 보인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선수가 있나?
정지석(대한항공)과 노재욱(현대캐피탈)이다. 정지석은 스피드 배구에 필요한 공격과 수비력을 겸비한 완성형 레프트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노재욱 세터는 현대캐피탈의 스피드 배구를 지휘하고 있다. 한선수도 앞으로 4~5년은 충분히 국가대표 세터로 뛸 수 있다. 후계자가 생길 때까지 후배들이 옆에서 보고 배울 점이 많다. 전광인의 몸 상태도 눈여겨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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