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브리야트 쪽 바이칼 호수 근처의 예쁜 목재 가옥.
▲ 러시아 목재 가옥 브리야트 쪽 바이칼 호수 근처의 예쁜 목재 가옥.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다 못해 추운 날씨와 단풍들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 지난 여름의 더운 기억은 사라졌다.

지난 8월 6일부터 13일까지 러시아를 여행했다. 바이칼을 다시 찾기는 4년만이다. 간간히 기억에 떠오르는 러시아 특유의 목재 가옥이 그리웠고 바이칼도 다시 보고 싶었는데, 마침 한·몽·브 사회정책학회 국제세미나가 브리야트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 기자도 같이 가지?"
"그럴까요?"

윤조덕 한국사회정책연구원장이 참가를 권하는 말에 생각을 접고 얼른 대답했다. 몇 년 간 해외를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쫓기듯 살았으니 여행 정도는 나를 위해 써도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번 여행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르쿠츠크 공화국에 도착해 알혼섬으로 가서 관광하고, 브리야트 공화국으로 출발해 국제세미나에 참석한다는 일정이다. 7박8일 일정을 잡은 이유도 간단했다.

"비행기가 일주일에 한 번 뜨거든."

바이칼 호수는 풍광이 수려하고 갈매기가 많다.
▲ 바이칼 바이칼 호수는 풍광이 수려하고 갈매기가 많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바이칼 알혼섬까지 10시간 걸렸다

6일, 뜨거운 해가 내리쬐는 오후 3시, 이르쿠츠크 공항에 도착해 타티아나 브리야트 국립보훈병원 원장과 함께 브리야트에서 보낸 미니버스를 타고 바이칼에서 가장 큰 섬, 알혼섬으로 출발했다.

중간에 점심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르고, 휴게소에서 쉬면서 알혼섬으로 가는 길은 방목하는 소와 양떼가 황량한 마른 들판에 풀을 뜯는 풍경의 연속이었다. 2년째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는 지독한 가뭄은 동시베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석 달째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단다.

알혼섬은 포장 도로가 없고 황량한 들판이 펼쳐졌다.
▲ 알혼섬 알혼섬은 포장 도로가 없고 황량한 들판이 펼쳐졌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밤 11시가 넘어 도착한 선착장은 차량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배에 차를 싣고 10분 정도를 건너면 알혼섬인데 12시가 넘도록 배를 타지 못했다. 20인용 미니버스는 대형차량에 속해 한 번에 두세 대 정도만 허용하기 때문이란다. 알혼섬까지 차량과 사람을 싣고 왕래하는 이 배는 배삯이 무료라고 한다.

검은 물결이 일렁이는 바이칼 호수에 배가 뜨자 머리 위로 별의 향연이 쏟아져 내렸다.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고 가까운 북두칠성이 선명하고 뚜렷했다. 어느 쪽이 북쪽이고 남쪽인지 설왕설래 하는 동안 알혼섬에 도착했다.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가 이어졌다. 길이 70km, 폭 15km의 거대한 알혼섬에는 포장도로가 없다.

앞에 보이는 배가 차량을 싣고 이동한다.
▲ 알혼섬 선착장 앞에 보이는 배가 차량을 싣고 이동한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내리감기는 눈은 덜컹대며 뛰어오르는 바퀴 덕분에 소스라치게 놀라 깨며 무려 두 시간을 달려 새벽 3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했다. 사람의 적응력은 놀랍다. 이날 비포장 도로를 달린 덕에 덜컹거리는 미니버스 속에서도 여유롭게 잠을 자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알혼섬 샤먼 초청, "대대로 무당업을 이어왔어!"

"바이칼은 우리민족의 시원이기도 하지만 무속의 근본이래요."

별 의미 없이 중얼거린 내 말에 박순일 한국사회정책연구원 대표이사가 당장 행동에 나섰다.

"그래? 그럼 만나보자구."

통역을 맡은 라자 브리야트국립대학 교수에게 바이칼 무당을 만나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고, 라자 교수는 알혼섬 출신 가이드를 통해 바이칼 무당을 숙소로 초청했다.

타티아나 부원장, 라자 교수, 내가 쓰고 있는 방이 가장 크기에 우리 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김종구 한국사회정책학회 회장, 박순일 대표이사와 윤조덕 원장, 차정숙 화가, 내가 있는 방으로 커다란 가방을 들고 찾아온 무당은 60대 남자였고, 마음을 들여다 보는 듯한 깊은 눈과 세월의 각인이 새겨진 얼굴을 가졌다.

우리를 찾은 바이칼 샤먼이 라자 교수(중앙)의 통역으로 대화를 나눴다.
▲ 바이칼 샤먼 우리를 찾은 바이칼 샤먼이 라자 교수(중앙)의 통역으로 대화를 나눴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가방을 열고 주섬주섬 무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목에 커다란 메달 두 개를 걸고 앉아 우리를 바라봤다. 라자 교수의 통역으로 바이칼 무당과 대화가 시작됐다.

"언제부터 샤먼이 됐나요?"
"조상 대대로 해왔고 지금도 합니다."

학자 아니랄까봐 김 원장, 박 대표이사, 윤 원장은 일제히 수첩을 펼치고 펜을 꺼내 기록하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도 이곳에서 한반도로 내려왔나요?"

샤먼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우리는 기다렸다. 이윽고 눈을 뜬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아주 멀고 먼 옛날 이곳에 당신들이 있었어요. 그 옛날 부족 간에 전쟁이 벌어졌고 당신들은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향했어요."
"어떤 식으로 점을 보게 되나요?"
"아주 오랜 내 조상이 나타나서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무당이 조상신을 섬기며 신을 만나는 것과 방식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가슴에 걸린 두 개의 메달을 만지면 신이 온다고 했다. 또 작은 칼을 꺼내들며 예전에는 신이 오를 때 이 칼을 불에 달궈 혀로 핥기도 했지만 지금은 안 한다고 한다.

칼을 들어보이는 바이칼 샤먼. 불에 달궈 혀로 핥아도 화상을 입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에 건 메달로 신을 불러온다고 한다.
▲ 바이칼 샤먼 칼을 들어보이는 바이칼 샤먼. 불에 달궈 혀로 핥아도 화상을 입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에 건 메달로 신을 불러온다고 한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나는 이런 학구적인 방식으로 바이칼 샤먼을 만나는 것에 싫증이 났다. 무당을 만나면 점사를 봐야지. 질문을 던졌다.

"우리도 점을 봐줄 수 있나요?"
"물론이죠. 걱정거리가 뭔가요?"
"음, 딸의 장래와 돈을 언제 벌 것인지가 궁금하네요."

늙은 샤먼은 그 깊은 눈으로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빙그레 자애로운 웃음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당신은 호기심이 아주 많고, 뜨거운 열정이 끓고 있어요."
"딱, 한 기자 맞네."

윤 원장과 박 대표이사가 이구동성을 하며 웃었다. 딸은 걱정할 필요 없고 돈은 때가 되며 들어온다고 했다. 복채로 얼마를 내면 되냐고 묻자 정해진 것은 없다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기에 1인당 100루블씩 냈다.

다른 사람들이 방을 나가자 무복을 벗으며 돌아갈 준비를 하던 샤먼이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무엇인가 말을 남겼다.

"앞날을 걱정할 필요 없다 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래요."

나중에 라자 교수가 해준 말이다.

알혼섬으로 가는 중 지방 경계에 세르게가 서있고 바닥에는 동전이 수없이 흩어져 있다. 길에 100m가 넘게 나무마다 오색천이 걸려 있어 무속의 근원지로 가는 길임을 실감했다.
▲ 세르게 알혼섬으로 가는 중 지방 경계에 세르게가 서있고 바닥에는 동전이 수없이 흩어져 있다. 길에 100m가 넘게 나무마다 오색천이 걸려 있어 무속의 근원지로 가는 길임을 실감했다.
ⓒ 한성희

관련사진보기


알혼섬에서 만난 바이칼 샤먼은 바이칼 주변에 눈에 띄는 오색천이 걸린 나무와 세르게가 잘 어울렸다. 우리와 닮은 브리야트 몽골인과 백계 러시아인들이 보드카를 뿌리고 동전을 던지는 모습이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 마을 어귀마다 있던 성황당 풍경과 너무 흡사했다.


태그:#바이칼 샤먼, #알혼섬 무당, #바이칼 호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