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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를 출입하는 정치팀 이경태 기자가 기사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청와대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 방문에 나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오후 서울공항에서 전용기에 오르며 손을 흔들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 방문에 나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오후 서울공항에서 전용기에 오르며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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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르다.'

말이나 생각, 행동 따위가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남이 없이 옳고 바르다는 뜻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 역사교과서를 '올바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13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자라나도록 가르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죠. 실제로 정부·여당 모두 '국정' 역사교과서를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통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올바를 수 있을까요.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라고 했습니다. 즉,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다양한 시각이 끊임없이 조응하는 과정이 역사란 얘기입니다. 그러나 '올바르다'는 뜻에는 이미 '규범'이란 가치기준이 정립돼 있습니다. 결국 '올바르다'는 평가는 '누군가의 기준'에 맞춘 셈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새누리당은 현행 '검정'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배우는 등 좌파 편향적인 역사인식을 갖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올바른 역사교과서'는 현재보다 우파적 시각에서 기술돼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또 탈(脫) 냉전시대와 맞지 않게 남북 분단의 특수성에 입각한 '냉전적 사고'를 강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12일 국정화 발표 당시 "근대 이후 산업화를 최단 시기에 달성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역사를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올바른 역사교과서'는 유신 등 권위주의 정권의 '과'보다 '공'을 더 강조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쯤하면 역사교과서 국정화 결정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상실한 '정통성'을 되찾기 위한 산업화·우파 세력의 승부수라 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이승만·박정희 다룬 <백년전쟁> 대응 때부터 드러난 '이념 전쟁'

사실 이 같은 '이념전쟁'은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부터 시작됐습니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룬 민족문제연구소의 역사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청와대가 보인 대응이 그 예입니다.

현 KBS 이사장인 이인호 당시 서울대 명예교수는 2013년 3월 국가 원로 초청 오찬에서 <백년전쟁>을 두고 "역사 왜곡이다, 국가 안보차원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라고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를 '수첩'에 메모한 뒤 "잘 살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

그 말대로 실질적인 대응이 나왔습니다. 유정복 당시 안전행정부 장관은 그해 4월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백년전쟁>과 관련해 "객관적인 검증이 없는 동영상으로 국민통합을 저해할 소지가 있다"라며 "한국의 정체성이 지켜지고 역사관이 올바로 설수 있게 문제에 대응해 나가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소관 부처도 아닌 안행부 장관이 직접 '대응'을 거론하고 나선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내세운 논리 역시 현재의 '국정' 역사교과서 이유와 동일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해 5월 기자회견을 열어 "모철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국사편찬위원장 등 정부 산하 기관장을 지난 3월 말 청와대로 불러서 <백년전쟁>과 관련해 적절히 대처하라고 지시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모 전 수석은 지시는 부인했지만 만남 자체는 인정했습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백년전쟁>을 방영한 시민방송 RTV에 공정성·객관성 위반,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결국 정권 차원에서 다큐멘터리 하나를 두고 공세에 나선 겁니다.

<백년전쟁> 문제는 이후 교과서 전쟁으로 번집니다. 2013년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명희 공주대 교수 등이 주도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발간됩니다. 그 뒤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교학사 교과서는 우편향 여부를 떠나 2112건의 오류가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비판 여론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채택률 0%대를 기록하며 교육 시장에서 '낙오'합니다. 정부·여당은 이를 '좌파 진영의 조직적 방해 탓'으로 치부하며 국정교과서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교과서 밖에서 활약할 '올바른 역사관'...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때 확인

황교안 국무총리가 13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 출석해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다. 이날 대정부질문에 나선 백재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국정 교과서가 결국 친일 미화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을 미화할 생각이 아니냐"고 따지자, 황 총리는 "유신을 찬양하는 교과서는 나올 수 없다.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13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 출석해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다. 이날 대정부질문에 나선 백재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국정 교과서가 결국 친일 미화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을 미화할 생각이 아니냐"고 따지자, 황 총리는 "유신을 찬양하는 교과서는 나올 수 없다.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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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전쟁이 교실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학사 교과서를 집필한 두 교수는 2011년 출범한 한국현대사학회 회원들입니다. 앞서 <백년전쟁>을 국가 안보차원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문한 이인호 이사장이 고문을 맡고 있죠. 특히 이 단체는 2011년 교과서 집필 기준 중 하나인 '민주주의' 문구를 '자유민주주의'로 수정시킨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는 2014년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청구 당시 쟁점이 됐던 부분입니다.

현 국무총리인 황교안 당시 법무부장관은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의 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민중주권주의'라는 미명 하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 정당의 탈을 쓰고 활동하고 있다"라고 진보당 해산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통합진보당은 해산됐습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추어올렸습니다.

이는 정확히 교학사 교과서 필진이었던 권 교수의 의견과 같았습니다. 권 교수는 그보다 1년 전인 2013년 7월 <문화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통합진보당의 노선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상당히 위협이 되는 입장이라 본다"라고 답했습니다.

황교안 총리는 지난 13일 대정부질문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합니다. 그는 "국정화 방침이 일본 아베 정권의 못된 우경화 정책에 따른 역사 왜곡과 무엇이 다른가"란 이찬열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질문에 "사상의 자유는 모든 사상의 자유를 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자유민주주의가 그 한계"라고 답했습니다.

'국정 2인자'라 할 수 있는 총리가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 내에서만 가능하단 답변을 내놓은 셈입니다.

팩트 아닌 종북 타령에 위축되는 국민, '올바른 대한민국 국민'인가

14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열린 가운데, 고려대 학생들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촉구하는 유인물을 읽고 있다.
이날 고려대 총학생은 박근혜 정부가 시민, 학부모, 교사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을 강행한 것을 규탄하며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역사관에 의해 쓰인 책으로 기록되고 가르칠 만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역사관이 존중받고 병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며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은 분명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다"고 규탄했다.
이들은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임을 상정했을 때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처럼 검정제에서 국정제로 역주행하려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고 주장했다.
 14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열린 가운데, 고려대 학생들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촉구하는 유인물을 읽고 있다. 이날 고려대 총학생은 박근혜 정부가 시민, 학부모, 교사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을 강행한 것을 규탄하며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역사관에 의해 쓰인 책으로 기록되고 가르칠 만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역사관이 존중받고 병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며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은 분명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다"고 규탄했다. 이들은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임을 상정했을 때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처럼 검정제에서 국정제로 역주행하려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고 주장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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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만 되면 나오는 '종북 타령'도 같은 맥락입니다. 책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을 가다>를 펴낸 신은미씨의 통일 토크콘서트 논란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박 대통령은 2014년 12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최근 소위 종북 콘서트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우려스러운 수준에 달하고 있다"라며 신씨의 토크콘서트를 비판했습니다. 특히 "우리가 평화통일을 지향하면서 북한의 실상을 바로 알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만 이 모든 행위들은 헌법적 가치와 국가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대원칙 아래 이뤄져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반면 박 대통령은 당시 신씨의 토크콘서트 현장에서 한 고등학생의 '백색 테러'가 있었다는 사실은 외면했습니다. 일부 언론의 '마녀사냥'에 동참하면서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테러를 가한 범죄자를 '사회적 갈등' 정도로 치부한 것입니다.

'박심(박 대통령의 의중)'은 곧바로 전파됐습니다. 그로부터 40여 일 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우수도서로 지정됐던 신씨의 책은 우수도서 목록에서 제외됐습니다. 신씨는 검찰 수사 끝에 강제출국됐습니다.

신씨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부산시교육청 산하 11개 공공도서관의 '이달의 책 선정위원회'는 지난해 비문학 추천도서로 선정했던 책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 이야기>를 선정 취소했습니다. 한 민원인이 '6.25 전쟁을 해방전쟁이라 가르친다'고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민원은 사실과 달랐습니다. 출판사인 '철수와 영희'에 따르면, 책 본문 10쪽과 25쪽, 28쪽에서 남침이란 사실을 명시하는 등 충분히 객관적 사실을 명시해놨습니다.

사실과 다른 편향된 이념 공세임에도 제대로 된 검증조차 않고 덮어버리는 것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이쯤 하면 박 대통령이 원하는 '올바른 대한민국 국민'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지금 와서 생각나는 것은 과거 박 대통령의 영화 <국제시장> 평입니다. 박 대통령은 심각하게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국기하강식 탓에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하는 주인공 부부의 '웃픈' 모습을 두고서 "그렇게 해야 나라라는 소중한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대한민국 국민'은 이래야 한다는 뜻일까요?

○ 편집ㅣ이준호 기자



태그:#박근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백년전쟁, #종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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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입사. 사회부(2007~2009.11)·현안이슈팀(2016.1~2016.6)·기획취재팀(2017.1~2017.6)·기동팀(2017.11~2018.5)·정치부(2009.12~2014.12, 2016.7~2016.12, 2017.6~2017.11, 2018.5~2024.6)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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